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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카와 전 일본은행 총재] 생산성 향상-재정 건전화가 日 최대 과제 

 

퇴임 후 5년여의 침묵 깨고 저서 출간하며 중앙은행의 역할, 일본 경제의 과제 등 밝혀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方明·70)씨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퇴임한 지 5년 반만에 침묵을 깨고 첫 저서인 [중앙은행:센트럴뱅커(중앙은행장)가 경험한 39년](동양경제신보사)을 10월 중순에 출판했다. 중앙은행과 금융정책의 역할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일본의 과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 2시간에 걸쳐 들어봤다.

이 시점에 출판을 결심한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우선 중앙은행이나 금융정책의 역할에 대해 사회적으로 심도 있는 논의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과 학계의 논의도 바뀌었으면 하는 희망이 강했기 때문이다. 금융정책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었고 때로는 첨예한 의견 대립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대립은 사실상 중앙은행의 존재와 역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에 대부분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중앙은행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존재인만큼, 좀 더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때문에 중앙은행에 대한 소신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논의 거리를 제공하고 싶었다. 중앙은행을 둘러싼 논의에는 몇 가지 중요한 ‘장(章)’이 빠져 있다. 예를 들어 중앙은행이 가진 ‘은행의 은행’으로서의 측면이다. 중앙은행은 결제시스템 운영이나 ‘마지막 대주(貸主)’로서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교과서에는 실려 있지만 금융정책에 대한 논의에서는 잊혀진다. 중앙은행과 사회와의 관계도 논의에서 빠져 있다. 종종 ‘중앙은행과 정치 배틀’이라고 일컬어지나, 이런 견해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정치의 배후에는 사회가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로 뽑힌 게 아닌 전문가가 무엇을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는가는 어려운 문제다.

다음으로 격동의 5년 간 때마침 총재 자리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기록을 남길 역사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기 동안 리먼쇼크, 유럽발 채무위기, 동일본 대지진 등이 발생했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변화가 컸던 시기로 두 차례에 걸친 여·야당 교체가 있었으며, 총리대신은 6명, 재무대신은 10명이나 바뀌었다. 은행 총재가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1990년대 초 불량채권 문제로 한참 씨름하던 당시, 일본은행 총재를 두 번 역임한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씨의 강연록을 읽어본 것이 무척 참고가 됐다. 그런 경험에 입각해 기록을 남기는 것에 의미와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버블 붕괴 후, 일본 경제나 일본은행의 금융정책에 대한 해외의 이해가 너무나도 부정확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대로 두는 것은 전문가로서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해외의 학자나 정책 당국자를 의식해 나의 경험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다.”

재임 기간인 5년 동안 가장 긴박했던 일은 무엇이었나?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총재(왼쪽에서 두 번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각국 중앙은행장들.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 저우샤오촨 전 중국 인민은행장, 장 클로드 트리셰 전 유럽중앙은행(ECB).
“무엇보다 2008년 리먼쇼크다. 세계 금융시스템은 붕괴 위기에 처해 있었다. 2008년 9월 12일 전화회의에서 당시 미국 재무장관이었던 헨리 폴슨이 ‘리만브라더스의 파산은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을 때, 나는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 말을 받아들이면 금융시스템이 붕괴해 버린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그러나 실제로 리먼브라더스는 파산했으며, 도산 처리가 진행됐다. 이어서 예상대로 실제로 정말 큰 일이 일어났다. 가장 긴박한 나날이었다. 또 하나는 동일본 대지진이다. 일본의 전후 최대 국난일 것이다. 일본은행의 사명은 위기 상황에 빠져도 금융기능, 특히 결제시스템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대지진 당시 많은 회사의 인프라가 제기능을 하지 못하게 됐지만, 금융시스템에 장해가 발생해 일본 경제나 사회에 커다란 혼란을 야기하는 사태는 어떻게든 막았다. 일본은행뿐 아니라, 민간 금융회사, 세계 중앙은행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온 것이 효과가 있었다.

지금 이야기한 두 가지가 가장 긴박했던 사건이지만, 금융정책 운영은 수시로 직면한 큰 문제였다. 일본은행은 여러 가지로 비판을 받았다. 비판의 포인트는 ▶일본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에 있다 ▶디플레이션이 화폐적 현상이다 ▶일본은행이 공격적인 금융완화를 시행한다면 일본 경제가 직면한 큰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등이었다. 나는 이 세 가지 모두에 동의하지 못했다. 물가가 오르는 것만으로는 일본 경제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당시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째는 급속한 고령화·저출산·인구 감소 측면에서 일본의 경제나 사회가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다. 인구동태가 모든 것을 규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고령화가 진행되는 현실에 대응해 사회나 경제가 구조를 재고해 간다면 문제는 어느 정도 완화된다. 그러한 노력이 중요하다. 또 다른 하나는 일본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정보통신 혁명이나 오픈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에 잘 대응하지 못한 점이다. 그러한 원인으로는 일본의 노동관행과 사회구조가 오픈이노베이션과의 친화성이 적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두 가지 문제는 물가가 상승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디플레이션은 화폐적 현상’이라는 논리를 가진 이들은 국채를 사들여 본원통화(중앙은행이 공급하는 현금통화로 일본은행권 발행고+화폐유통고+일본은행 당좌예금)를 늘리면 물가는 상승하고, 디플레이션은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단기 금리는 거의 제로, 장기 금리도 상당히 낮은 상황에서 국채 매입이나 본원통화를 대폭 늘려도 눈에 띄는 효과는 없다. 금융완화라는 정책은 본질적으로는 내일의 수요를 오늘 미리 취하는 시책이다. 그러나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가운데, 장래의 수요를 미리 가져오면 가져올수록 장래에 이용 가능한 수요는 줄어든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상황에서 공격적인 금융정책을 실행했다.

“금융완화 자체에는 의미가 있으며, 재임 중에도 과감하게 비(非)전통적인 금융정책을 실행했다. ‘포괄적 금융완화’가 그런 전형이다. 하지만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서 학자·경제학자·매스컴, 그리고 기업경영자들 사이에서 좀 더 공격적인 금융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했다. 그들이 제안한 공격적 금융완화의 효과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옳은 경제논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앙은행은 그런 논의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라고 딱 잘라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2012년 12월 총선거에서는 공격적 금융완화 정책을 강하게 내세운 자민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국민은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실험적인 정책에 나서주기를 바란 건지도 모른다. 중앙은행은 민주주의 체제 속의 하나의 제도다. 일본은행의 독립성도 무조건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중앙은행은 국민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지지와 공감을 얻어야 존재한다.

이와 달리 일본은행의 금융정책의 목적은 ‘물가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일본은행법에 명시돼 있다. 그런 법률이 의미하는 바를 현실의 일본경제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해석해 물가와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실현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역할이다.

심사숙고 끝에 2013년 1월, 정부와의 공동성명을 발표하는데 동의했다. 그때 내가 부적절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일본은행이 장래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금융정책을 운영할 수 없게 되는 사태만은 절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서 기한을 구분해 기계적으로 물가상승률 2%라는 목표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에 빠지지 않도록, 일본은행의 입장에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기본원칙은 남김 없이 전부 집어넣었다. 2%라는 물가상승률 목표 수준도 정부에 따른 경제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금융정책 운영에서는 금융적 불균형의 점검을 포함해 지속적인 물가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강조됐다.”

비전통적 금융정책은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가?


“일본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단기 금리가 거의 제로가 되어 이를 조작하는 전통적인 금융정책의 여지가 거의 없어졌으나, 민간 장기 금리를 낮출 여지는 남아 있었다. 유효한 정책이 있다면 중앙은행으로서 실행할 필요가 있다. 2010년에 채용한 ‘포괄적 금융완화’에서는 장기 금리 인하를 목표로 장기 국채 매입을 시작했다. 금융정책으로 상장지수펀드(ETF)나 리츠(부동산투자신탁) 매입을 세계 최초로 실시했다. 하지만 이런 비전통적인 금융정책은 효과가 불확실하며 부작용도 우려됐다. 따라서 민주주의 체제에서 독립성을 가진 중앙은행의 입장에서 효과나 비용, 부작용을 점검하고 신중하게 설명해야만 했다. 더불어 노동참가율 증가나 생산성 향상에 따른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그것이 중앙은행의 책임감 있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은행의 정책에 대해 해외에서 강하게 비판했다.

“구미 학자나 정책당국 관계자들은 버블 붕괴 후의 금융완화 정책을 좀 더 공격적으로 실행한다면 일본이 저성장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후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상황은 일본의 버블 붕괴 후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버블 붕괴 당시 일본의 경기 정점은 1991년이다. 당시를 100이라고 쳤을 때, 이후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추이와 구미의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의 경기 정점에 해당하는 2007년을 100으로 본 구미의 실질 GDP 추이를 비교하면, 실제로 큰 차이가 없다[그래프 참조]. 이를 통해 어느 국가든지 일단 버블이 발생하면 붕괴 후의 저성장은 금융완화를 공격적으로 실행해도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버블 붕괴 후의 대응이라는 점에서 금융회사 파산에 대한 대응은 큰 특징이다. 2008년 9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리먼브라더스 구제 특별융자를 하지 않았다.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해 세계 금융시스템이 붕괴 직전까지 감으로써 의회는 일단 부결한 불량자산구제프로그램(TARP)법을 성립시키고자 움직였다. 이로 인해 7000억 달러의 공적자금 투입이 가능해졌으며, 금융시스템의 조기 재건에 성공했다. 결과적으로는 ‘쇼크요법’을 취한 것이다. 이와 달리 미국형 쇼크요법은 세계적으로 경제활동의 급격하고 대폭적인 축소를 초래해, 젊은층을 중심으로 실업자가 대량 발생했다. 이는 사회의 분단현상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일본은 ‘문제의 보류’가 비판을 받는다.

“일본은 1990년대 금융위기 당시 쇼크요법은 취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야마이치증권이 파산했을 때 원활한 파산처리를 위해 일본은행은 특별융자를 실시했다. 일련의 대책은 당면한 금융시스템의 불안정화를 최소화하는 데 유효했으나, 그로 인해 공적자금 투입을 포함한 발본책 도입은 뒤쳐졌다. 미국과 일본의 정책결정 과정은 사회에 필요한 합의를 누가 어떤 식으로 성립시키는가 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런 배경에는 국민의 가치관이 있다. 나는 그것을 ‘사회계약’이라고 부른다. 사회에서 필요한 합의는 각국의 사회계약의 차이를 반영하기 때문에, 모든 나라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답은 없다. 경제 실태가 바뀌면 사회계약 내용도 바뀐다. 어떻든 그때 그때 각국의 사회 계약의 차이를 무시한 정책론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일본은행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2%의 물가상승률을 목표로 했지만 달성하지 못했다. 일본 물가는 왜 여전히 낮은 것인가?

“일본의 저인플레이션의 요인에 대해 ‘임금·물가가 오르기 힘든 것을 전제로 한 사고방식이나 관행이 기업과 가계에 뿌리깊게 남아 있다’고 곧잘 이야기하는데 그야말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물가상승률이 해외에 비해 낮은 것은 근래의 일이 아니다. 1980년대 일본의 물가상승률은 세계적으로 가장 안정돼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본 경제는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을 유지해왔다. 저인플레이션의 이유는 충분히 해명되지는 않았으나, 노동관행의 차이와도 관련 있다. 물가가 급등한 1973~74년 ‘광란물가’ 당시, 물가상승률이 20%를 넘은 적도 있지만, 일본 사회는 전체적으로 고용안정을 최우선시했다. 노동조합은 사회의 존속을 고려해 공격적인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경영자도 고용 안정을 확보하겠다는 암묵적인 사회계약이 존재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완만한 물가 하락의 요인 중 하나는 이런 사회계약의 반영으로 임금 비용이 억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경제의 저성장이라는 문제의 근원이 디플레이션에 있다는 인식이 강해진 것은 왜일까?

“1990년대 후반, 미국의 주류 경제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논의의 영향이 크다. 그 영향으로 일본의 논의도 바뀌었다. 또 한 가지는 디플레이션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내용이 애매했기 때문이다. 버블 붕괴 후 일본이 저성장에 빠져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을 가르키는 말로 ‘디플레이션’이 딱 들어맞았을 것이다. 반면 경제학자들에게 디플레이션이라는 말은 물가의 하락을 의미하며, 1930년대 대공황을 연상시켜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디플레이션에 대한 어려운 논의는 제쳐놓고, 중앙은행이 공격적인 금융정책을 실시해 통화를 늘리거나 대중의 심리를 자극해 인플레이션 기대를 불러일으킨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이해하기 쉬운’ 논의가 점차 지지를 얻게 됐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일본의 경험은 그런 논의처럼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은 이런 현상을 가장 먼저 경험한 나라로써 자신의 경험을 해외에 설명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일본의 경험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학계나 정책당국자들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경제의 최대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무엇보다도 경제나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는 특히 생산성 향상과 재정 건전화를 위한 노력이 가장 큰 과제다. 두 가지 모두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라는 점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낮은 생산성을 종종 지적하는데 사회가 ‘안전·안심·정확’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며 기업도 그에 응하고자 한 결과, GDP로 측정한 효율성이 저하하고 있다는 측면도 있다. 재정적자 문제의 주요 요인인 사회보장은 세대 간의 사회계약을 어떻게 새롭게 고쳐 쓸 것인가 하는 문제다. ‘구조개혁’이라는 말은 애매하기 때문에 그다지 남용하지 않는 편이 좋지만, 생산성 증가 측면이든 재정 건전화의 측면이든 ‘구조개혁’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하는 과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다음 위기가 있다면 어디서 시작될까?

“위기라는 것은 매번,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지금 많은 사람이 가장 우려하는 리스크 중 하나는 세게적인 채무 과잉이다. 특히 신흥국의 채무 증가는 걱정거리로, 그중에서도 달러표시 채권의 증가를 주시하고 있다. 채권 문제를 생각할 때는 전체 수준도 중요하지만 평균을 따지면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분포’의 시점도 중요하다. 국가·금융회사·기업·개인 중 어디든 과잉채무를 끌어안고 있는 주체에게 쇼크가 더해지면, 거기가 출발점이 되어 경제가 혼란에 빠진다. 정부 채무와 민간 채무의 균형 문제도 있다. 정부 채무가 늘어나면, 변제를 위해 증세나 세출 삭감을 피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어느정도 국민의 합의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세대·지역 간을 비롯해 포퓰리즘이나 사회의 분단현상이 거세진다면 합의 형성이 어려워진다.”

- 번역=김다혜

※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1949년생. 72년 도쿄대 경제학부 졸업, 일본은행 입사. 미국 시카고대학 대학원 유학, 일본은행 기획국 기획과장, 일본은행 이사 등을 거쳐 2008년 3월 일본은행 부총재, 같은 해 4월~2013년 3월까지 30대 일본은행 총재 역임. 2013년 9월 아오야마학원 대학원 특임교수, 2018년 9월부터 동대학 특별초빙교수로 재직 중

1462호 (201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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