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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인간과 조직 사이(4) 왜 묵묵히 일하는 사람은 묻힐까?] 여우와는 살아도 곰과는 못 산다 

 

어떤 성과 올리냐보다 어떻게 기억되냐가 중요… 능력이 있다면 드러내야

▎사진:© gettyimagesbank
생각만 해도 속이 쓰리다. 분명 열심히 했고 성과도 나쁘지 않았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고과가 이 모양이니 보너스도 쥐꼬리만 하다. 근데 1년 늦게 입사한 박과장은 아닌 것 같다. 얼굴에 날마다 웃음꽃이 핀다. 분명 고과를 잘 받은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인사 이동 때문에 살얼음판 같은 이 시절에 어떻게 저런 웃음꽃을 날마다 피울 수 있단 말인가. 진짜 그런가 싶어 “잘 받았어?” 했더니 “나쁘지 않네요”라고 한다. 안 하던 겸손까지 떠는 걸 보니 확실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마음 한 켠으로 밀어버리고 싶은데 속이 말을 듣지 않는다. 생각할수록 쓰리다 못해 꼬인다. 내가 지금 시기하는 건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위에 있는 저 분들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 같다.

“와, 오늘 넥타이 색깔 죽입니다”

나와 달리 박과장은 외향적이다. 여기저기 쑤시고 돌아다니기도 잘 하고, 마음에 없는 말로 팀장 기분도 곧잘 맞춘다. 팀장도 그게 지나가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성격 하나는 좋다”고 웃어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은근 슬쩍 자기 자랑을 끼워 넣는 건 또 어떤가. 세상에, 어떻게 저런 얼굴 두꺼운 짓을! 나는 깨났다 죽어도 못 한다.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는다. 이뿐인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상무님이나 사장님을 만나면 보통 어색해지게 마련인데 그는 다르다. 넉살 좋게 “와, 오늘 넥타이 색깔 죽입니다” 같은 뻔한 멘트를 자연스레 날린다. 이거야 말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상투적인 아부 아닌가.

근데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 돌아온다. 그 분들이 반색한다. 그래서일까. 회사에서 오다 가다 만나는 사장님과 상무님은 나를 소 닭 보듯 한다. 나는 그 분들에게 영화에 나오는 ‘지나가는 사람 7’쯤 되는 엑스트라일 것이다. 물론 박과장에게는 반대다. 애정 어린 한마디에 어깨까지 툭툭 쳐준다.

뭐 성격 때문에 손해 보는 게 한두 번인가. 하지만 고과까지 이렇게 나오니 서운함이 부아가 되어 솟아오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분명 박과장보다 하는 일도 많고, 객관적인 성과도 나은데 왜 박과장을 높게 쳐주는가 말이다. 나서지 않고 표현하지 않는다고 무능력하다는 건가? 그나저나 이러다 진급에서 밀리는 거 아냐? 이런저런 생각이 뒷통수를 툭 치면 속에 쌓인 불안감에 불이 확 붙는 것 같다. 3년 전이었던가. 옆 부서에서 후배 과장이 선배를 제치고 팀장으로 승진하는 바람에 그 선배는 사표를 내야 했다. 나도 그러는 거 아냐? 평소 잘 지내는 다른 팀 이 과장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원래 상사들이 그렇잖아”라고 한다. 남들 일일 때는 귓등으로 들었는데 내 일이 되니 답답해진다. 왜 윗사람들은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몰라줄까? 사람 구별하는 눈이 그렇게도 없을까? 왜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묻혀야 하는가 말이다.

왜 그럴까? 조직은 왜 묵묵히 일하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까? 제법 높이가 있는 산을 올라 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헉헉거리며 올라갈 때는 그렇게 선명하게 잘 보이던 주변의 것들이 높이 올라갈수록 보이지 않는다. 앞은 탁 트이고 멀리 볼 수 있지만 아래쪽은 갈수록 보이지 않는다. 올라온 길조차도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피라미드 같은 조직도 마찬가지다. 아래에 있을 때는 그렇게 잘 보이던 것들이 막상 위에 올라서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독립 공간을 갖게 되는 임원 이상이 되면 “딱 올라서는 순간,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많다. 발 밑으로 구름이 좌악 깔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전 세계 어느 역사에서나 아부꾼과 간신이 등장하는 게 이 때문이다. 이걸 간파한 이들이 나서 위 아래를 연결하는 통로를 장악한다.

올라서는 순간,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성과 맞부딪쳐야 한다. 새로운 시장, 새로운 사업,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내야 한다. 전후좌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이뿐인가. 이런저런 문제들 또한 기다렸다는 듯 발등에 떨어진다.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으면 아래를 볼 틈이 없다. 탁월한 리더들이 현장을 자주 가는 건 현장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직접 가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기에 의도적으로 구름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올라갈수록 시야는 넓어지지만 아래를 보는 시력은 상당히 떨어진다.

크고 높은 집을 짓는 목수일수록 자신을 보조하는 사람을 두는 건 필요한 도구나 자재를 즉시 손에 쥐기 위함이다. 높은 그들도 마찬가지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발등에 떨어지면 여기에 필요한 능력을 당장 찾아야 한다. 그들에게 ‘나중’은 없다. ‘지금’이 중요하다. 하루하루가 전투인데 전투에 ‘나중’이 어디 있겠는가. 이럴 때 손을 들고 나서는 사람을 써야 할까, 아니면 잠자코 있는 직원들에게 일일이 의사와 능력을 물은 다음 써야 할까? 망치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톱이라 할지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품질이 그다지 좋지 않은 망치라도 내 손에 있는 망치가 훌륭한 톱보다 낫다. ‘제가 바로 그 망치입니다’라고 나서는 사람을 쓰게 된다.

더구나 우리 인간은 보이는 걸 보는 성향이 강하다. 만약 우리가 세상 모든 걸 일일이 보고 판단해야 한다면 우리 뇌는 과부하에 걸려 날마다 골치가 아프고 머리가 터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 뇌는 웬만한 건 거른다. 중요한 게 아니라면 애써 찾아 보는 대신 보이는 걸 보고, 본 대로 판단한다. 일은 많고 시간이 부족하다면 더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했는데 괜찮은 성과가 나오면 그때부터는 본 걸 믿게 된다. 결국 보는 것이 믿는 것이 된다. 높은 분들의 눈에 들면 승승장구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데, 그들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나에게 상냥하고, 나를 기분 좋게 해주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진다. 마음에 들면 하나라도 더 잘해주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들도 마찬가지다. 지위와 역할에 앞서 감정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이다. 일에 지쳐 있고 사람에 지쳐 있을 때는 더 그렇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직원들만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더 원한다. 면죄부를 주자는 게 아니라 한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묵묵하게 일하는 사람을 알아봐 주고 그들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건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외향적인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일과 역할을 주고, 내성적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완전한 인간이 없듯 완전한 리더도 없다. 좋은 리더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리더도 있게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리더들이 생각보다 많지만 그렇다고 그들만 탓하고 있을 수는 없다. 올 겨울 예상치 못한 추위가 왔다고 ‘세상이 왜 이래?’라고 하는 것보다 그런 추위에 적응하는 게 얼어 죽지 않는 법이다.

이 세상의 꽃들은 제각기 다르다. 어떤 꽃은 화려하고 어떤 꽃은 향기가 강하다. 알다시피 꽃은 식물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피는 게 아니다. 짝짓기를 해야 하는데 움직일 수 없으니 벌과 나비 같은 중매쟁이를 불러들여 이들로 하여금 짝짓기를 대행하게끔 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그래서 꽃들은 대체로 화려하다. 그래야 중매쟁이들의 눈에 띌 것이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게 아닌가. 아무리 맛있는 꿀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해도 벌과 나비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갖가지 색깔과 모양으로 자신을 알려야 한다. ‘여기 맛있는 꿀이 있으니 이리로 오라’고 온몸으로 불러야 한다. 물론 색깔만이 전부는 아니다.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할수록 좋다. 동남아시아에 가면 누군가는 없어서 못 먹고, 누군가는 있어도 못 먹는다는 과일이 있다. 천국의 맛, 지옥의 냄새로 유명한 두리안이다. 두리안은 왜 그렇게 냄새가 지독할까?

두리안은 열대지역의 왕박쥐를 중매쟁이로 쓰는데, 왕박쥐는 낮에 활동하지 않고 밤에 활동한다. 그래서 모든 걸 이 고객에게 맞춘다. 캄캄한 어둠은 색깔을 다 감춰버리기에 아찔한 향기로 왕박쥐를 부른다. 향기는 시야가 막히고 어둠에 싸인 빽빽한 밀림에서 색깔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이 세상의 꽃들도 무작정 알아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려서 찾아오게 한다.

묵묵히 일한다고 알아주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는 게 필요하다. 일을 잘 하는 것과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앞의 것은 사실이고, 뒤의 것은 인식이지만, 연구에 따르면 인식이 사실을 이긴다. 인식이 믿음이 되면 말할 것도 없다.

디자인이나 포장이 좋으면 제품이 좋다고 여기고, 첫인상이 성품이나 실력보다 먼저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처럼, 어떤 성과를 올리느냐보다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불합리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어떤 일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한다고 기억되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 ‘마케팅은 제품의 싸움이 아니라 인식의 싸움’이라고 하는 게 이 때문이다.

능력이 있다면 드러내야 한다. 묵묵히 조용히 살아가는 게 정답은 아니다. 위에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주어진 일만 잘 한다고 전부가 아니고, 내 일만 잘한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묵묵히 일한다’고 하는 게 상사에게는 묵묵부답이 될 수 있다. 여우하고는 살아도 곰하고는 못 산다는 말은 상사들에게는 언제나 진리다. 문제는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이들에게는 이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필요하다.

자기도 모르는 표정으로 ‘점수’ 까먹어


▎누구나 나에게 상냥하고, 나를 기분 좋게 해주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진다. 마음에 들면 하나라도 더 잘해주려는 마음이 생긴다. 상사도 마찬가지다. / 사진:gettyimagesbank
묵묵히 일하고 있는데 “무슨 일 있어?” “뭐 안 좋은 일 있어?”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일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나의 표정이 내 의도와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다. 묵묵히는 누군가에게는 차갑고 뚱하게 비쳐질 수 있다.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을 상대에게 전할 수 있다. 상사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그런 표정이 자신에게 못마땅해 하거나 불만이 있는 것처럼 전해질 수 있다. 그저 내 일을 하고 있을 뿐이고 가식적이지 않을 뿐인데 상대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이런 표정은 아무 감정이 없는 중성적인 표정일 뿐이다. 하지만 오해를 부를 수 있다면 고치는 게 좋다. 표정이야말로 첫인상을 결정 짓는 제 1요인 아닌가. 자기도 모르는 표정으로 평소에 ‘점수’를 까먹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부드러운 표정은 호감을 불러오지만 무표정한 묵묵히는 호감을 달아나게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 보고 활짝 웃은 다음, 그 모습을 하루 내내 간직하며 얼굴에 웃음을 담는 연습을 세 달 정도만 하면 미소가 얼굴에 깃든다. 다른 방법은 좀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작심(作心)이 필요한 일이다.

브라이언 리틀이라는 사람이 있다. 미국 하버드 대 심리학과 교수를 지낸 그는 학생들에게 재미있게 가르치는 교수로 이름이 높다. 땅딸하고 다부진 몸에서 나오는 바리톤 음성으로 자신이 서 있는 곳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노래를 부르고, 영화배우 로빈 윌리엄스와 아인슈타인을 섞은 듯한 모습으로 사람을 웃기는 유머를 구사한다. 당연히 수강생이 넘쳐난다. 교수를 그만둔 후에도 마찬가지다. 기립박수도 흔하다. 누구나 인정하는 ‘엔터테이너 교수’다. 그렇다고 ‘마냥 노는 교수’는 아니다. 대학 교육 부문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3M교육장학금을 받은 적도 있다(Susan Cain, Quiet 2012).

재미 있는 건 그가 사람 만나는 걸 질색한다는 것이다. 평소 그는 사람이 거의 없는 캐나다의 외딴 숲에서 아내와 함께 산다.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는다. 어쩌다 도시로 나와 파티에 참석할 일이 있어도 금방 나오고 마는 아주 내향적인 사람이다. 강의는 재미 있게 하지만 사람 만나는 것에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사람을 피하기 위해 심지어 화장실에 들어가 있기까지 한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런 재미 있는 강의를 할까?

내향적인 성격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심리학을 좋아하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 이런 자신의 핵심 프로젝트, 그러니까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위해 그에 맞는 행동을 치밀하게 기획한다. 마치 영화배우가 왕을 연기하고 진짜 형사처럼 하듯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이 ‘엔터테인먼트 교수’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아니, 그 시간에는 진짜 엔터테인먼트 교수가 된다. 그런 다음 ‘핵심 프로젝트’가 끝나면 자신의 성향으로 돌아간다. 숲으로 들어가 은둔자가 된다. 배우가 영화가 끝나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직장인에게는 직장이 무대

배우에게 영화가 무대이듯 직장인에게는 직장이 무대다. 무대에서는 무대에 필요한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에서 사장님을 만났을 때 나를 알리는 한마디 정도는 준비할 필요가 있다. 대본을 쓰고 대사를 연습하듯 그렇게 한 다음, 마음 한 켠에 저장해두는 것이다. 언제든 쓸 수 있게 말이다.

물론 그것이 아부나 빈 말보다 유머나 센스 있는 말이고, 은근 슬쩍 하는 자기 자랑보다 뭔가 의미 있는 내용이라면 저 높은 곳에서 빛 줄기 같은 눈길이 내려올 것이다. 리틀 교수처럼 자신의 핵심 프로젝트를 하듯이 그렇게 한다면 더 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근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렇다! 앞에서 말한 옆 부서 이 과장처럼 말한다면, 세상이 원래 그렇다.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1465호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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