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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플루이드 시대의 생존경영 전략] 사업 재편, 디지털 플랫폼 확보에 사활 

 

한정연 기자 hanjeongyeon@joongang.co.kr
EY한영 산업연구원 “거래비용 없이 생산자-소비자 연결되는 세상”

기업의 영원한 화두는 생존이다. 살아남기 위해 변화하고, 미래를 예측하려고 애쓴다. 글로벌 대기업의 생존률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 1990년 포춘 500대 기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글로벌 기업 중에서 2016년에도 여전히 500위권에 이름을 남긴 기업은 95개에 불과했다. 81%가 생존하지 못했거나 경쟁에서 밀려났다. 2018년 포춘 500대 기업 리스트는 디지털 혁신을 추진했던 대표적인 기업의 이름으로 도배돼 있다. 특히 애플, 아마존,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기업은 대규모 전통 기업보다 매출은 작지만 최상위권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추락은 한순간이다. 지난해 매출 기준 4위, 수익 기준 세계 1위를 기록한 애플조차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애플이 2019년 1분기 예상 실적을 하향 조정하자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애플 위기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기업들은 늘 자문한다. “다음은 누구 차례인가?”

패스트 팔로워를 위한 시장은 없다

글로벌 회계법인인 EY의 산업 트렌드 분석 조직인 EYQ는 기업들의 이런 물음에 [초디지털 시대 수퍼플루이드 경영전략]이란 책으로 답한다. 변준영 EY한영산업연구원장은 “수퍼플루이드는 기술 발전으로 중간 거래 단계가 소멸하고, 신공유경제가 부상하는 초디지털 시대 산업계의 퍄괴적 혁신에 대한 고찰”이라고 말했다. 물리학 용어인 ‘수퍼플루이드’는 움직이는 동안 마찰이 전혀 없어 영원히 회전할 수 있는 초유체다. 경영 용어로서의 수퍼플루이드는 생산자와 판매자가 거래비용 없이 직접 연결되는 새로운 세상이다. 수퍼플루이드 환경이 일반화되면 중개나 유통 수수료가 모두 사라져 거래비용이 제로(0)가 된다. 이런 가운데 정보는 더 투명하게 공개돼 전통적인 시장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던 산업 간 경계는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산업 내 중간 과정, 즉 산업 내 밸류체인은 최소화되거나 사라진다. EY의 한국법인인 EY한영 산업 연구원은 여기에 더해 수퍼플루이드 시대 한국 기업의 생존 전략으로 ▶기존 사업의 신속한 재편 ▶디지털 기반 신사업 진출 ▶플랫폼 기반 제품의 서비스화 ▶디지털 운영을 꼽았다.

수퍼플루이드 시대를 초래하는 원인은 4차 산업혁명과 신공유경제다. 그렇기 때문에 수퍼플루이드는 그간 개별적으로 언급돼 오던 빅데이터·사물인터넷·인공지능과 같은 개념을 관통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수퍼플루이드 시장을 만드는 것은 블록체인(blockchain)과 이를 기반으로 한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 디지털 기술이다. 예컨대 사물인터넷으로 수집한 엄청난 양의 실시간 데이터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구매자의 행동을 예측해서 판매자와 바로 연결시킨다. 여기서 거래비용은 사라지고, 전통 산업은 무너지며, 플랫폼 기업의 사업 수익 독식 현상이 나타난다. 기존 시장과 확연히 구분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수퍼플루이드 시대에서는 최초 시장 진입자가 플랫폼을 통해 단기간에 시장 전체를 장악한다. 에어비앤비·우버·카카오톡처럼 선두 업체가 시장을 독점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수퍼플루이드 시장에서 늦은 출발은 선두 업체와의 더 큰 격차를 의미한다. 경쟁에서 살아남아도 수익은 현저하게 낮다. 따라서 수퍼플루이드 시대에서 시장 선두기업을 모방하는 패스트팔로어 전략은 실패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아직 미성숙 시장, 선두 업체가 없는 시장에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빠르게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 효과적이다([수퍼플루이드 경영전략] 중).”

기존 시장과 확연히 구분되는 현상은 5가지다. 첫째, 전통적인 밸류체인이 붕괴된다. 둘째, 구글·페이스북·아마존 등 인터넷 플랫폼 기업의 전방위 사업 독식 현상이 강화된다. 셋째, 이종사업자나 스타트업과의 무한 경쟁이 시작된다. 넷째, ‘발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로서의 성공은 더 이상 없다. 오직 우월한 선도자(first mover)만이 생존한다. 다섯째, 전통적 산업의 강자들이 무너지는 ‘신 코닥 모멘트(Neo Kodak Moment)’ 현상이 나타난다. ‘코닥 모멘트(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소중한 시간)’는 1990년대 전 세계 5대 브랜드 중 하나였던 필름 카메라 기업 코닥의 성공을 상징하는 용어다. 코닥은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했지만 코닥 모멘트에 집착해 빠르게 변화하지 못하고 결국 파산했다.

수수료 제로에 도전하는 스타트업들


그럼 어떤 기업이 수퍼플루이드 시대에 떠오르고 있을까? 카셰어링 업체인 우버일까? 이 책은 이스라엘의 블록체인 기반 카셰어링 업체 ‘라주즈(LaZooz)’를 꼽는다. 우버는 운전자가 거래수수료를 20%가량 내야 하지만, 라주즈는 소비자에게 부과되는 거래수수료가 제로이며, 자체 암호화폐로 운전자와 사용자 간 거래가 이뤄지는 거래비용 제로 기업이다. 택시에서 우버, 라주즈로 진화하는 과정은 가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 낮은 가격, 사용편리성이 소비자들을 자연스럽게 새로운 서비스로 움직이게 하고 있다.

2008년 설립된 핀테크 기업 ‘베터먼트’도 좋은 예다. 로보어드바이저리의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이 회사는 자산관리를 요청한 사람에게 로보어드바이저리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고객의 성향, 투자 목적, 기간 등에 따라 개인화된 투자 포트폴리오를 제공한다. 수수료는 기존 자산관리 서비스 수수료의 4분의 1에 불과한 0.25%다. 베터먼트는 2017년 기준 3억 달러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이처럼 생산자와 소비자가 중개자 없이 직접 연결되는 시장이 가능하다면 물건과 서비스에 대한 비용만 지불하면 된다. 생산자는 더 높은 수익을 낼 수 있고, 소비자는 더 저렴하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수퍼플루이드 시대에서는 고객도 변한다. 미래 소비자들은 더 적게 소유하려고 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경험에는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프리랜서의 확장된 개념인 ‘긱이코노미(Gig Economy)’가 보편화 되고, 메가시티가 늘어나면서 소비자들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직접 소유하는 것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책은 주장한다. 공유경제 플랫폼이 늘어날수록 긱이코노미의 영향력 또한 확대될 것이다. 수퍼플루이드 시대라는 명칭은 이제서야 나왔지만, 내용은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1474호 (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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