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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출 임박한 ‘체험형 뷰티숍’ 원조 세포라] 판도 바꿀 태풍 될까 찻잔 속 태풍에 그칠까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포화상태 국내 뷰티숍 시장에 뒤늦게 진입… 홍콩에선 토종 브랜드에 밀려 철수 ‘굴욕’

▎사우디아라비아의 세포라 매장에서 한 여성이 메이크업 서비스를 받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세계적인 화장품 편집숍 ‘세포라(Sephora)’가 한국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프랑스 명품 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가 운영하는 세포라는 ‘체험형 뷰티숍’의 원조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백화점 화장품 브랜드를 한데 모아 판매하고, 고객들이 이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1969년 설립 이후 1997년 루이비통모에헤네시가 세포라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이듬해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성공 신화를 써내려 갔다. 현재 미국·프랑스·이탈리아·중국·싱가포르 등 세계 33개국에 유명 쇼핑 거리에서 2300여 개 매장을 운영하는 ‘뷰티계 공룡’이다. 국내에서도 자리잡은 헬스앤뷰티(H&B) 매장 역시 세포라식 체험형 뷰티숍 방식을 표방한다.

한국에는 아직 매장이 없지만 국내 소비자들에게 해외 여행 필수 코스로 꼽힐 만큼 인지도가 높다. 해외 직구 역시 활발하다. 이런 관심 덕에 세포라의 한국 시장 진출 가능성은 수년 전부터 제기돼왔다. 일각에서는 두산·신세계 등 국내 유통 기업과 손잡고 국내에 진출한다는 소문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세포라 측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르다. 지난해 6월 한국지사에서 근무할 인사 관리자 채용 공고를 내면서 2019년 3분기 한국 시장에 진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때부터 국내 뷰티 업계에서도 세포라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한국지사와 관련한 채용을 이어가며 한국 진출을 위한 의지를 보였다. 지난해 11월 이커머스 경력직 채용 공고를, 올해 1월 한국지사의 마케팅 임원 채용 공고를 잇따라 올렸다.

세포라가 본격적인 한국 진출을 앞두고 자문을 구하기 위해 접촉한 대한화장품산업연구원에 따르면 10월 경 매장 두 곳을 오픈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화장품산업연구원은 정부와 국내 민간 기업들이 함께 만든 연구 단체다. 연구원 관계자는 “(세포라는)기존 국내 뷰티숍 시장이 고급화 전략보다는 10~20대의 진입장벽이 쉽도록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에 집중한 점에 주목했다”며 “글로벌 인지도를 활용해 국내에 아직 진출하지 않은 해외 럭셔리 브랜드를 도입하고, 매장 역시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꾸밀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유력한 입지는 서울 강남대로다. 강남대로는 하루 유동인구가 25만 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 상권답게 이미 대규모 체험형 뷰티숍이 즐비한 곳이다. 신세계백화점의 ‘시코르’,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움 라이브’가 대표적이다. 이곳에 세포라가 들어선다면 국내 업체와의 전면전이 불가피하다. 세포라는 오프라인 매장뿐 아니라 온라인 판매에도 집중하는 ‘옴니 채널’ 전략을 펼칠 계획이다. 국내 뷰티숍 브랜드가 대부분 오프라인 채널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에 따른 결과다.

세포라의 한국 진출설이 불거질 때마다 관심이 모아졌던 것 중 하나가 국내에서의 파트너로 어떤 기업을 선택할지 여부였다. 앞서 수많은 해외 H&B 브랜드가 국내 유통 기업과 손잡고 한국 시장에 진출해 백화점이나 마트 입점 등에서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방식이 성공적인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2006년 GS리테일과 함께 합작 법인을 설립해 국내 시장에 진출한 홍콩 왓슨스가 대표적이다. 왓슨스는 전 세계 1만개가 넘는 매장을 보유한 세계적인 H&B 전문 브랜드다. 그러나 수년 동안 사업 부진을 면치 못하고 지난해 국내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신세계 역시 2017년 영국 1위 H&B 회사 ‘월그린 부츠 얼라이언스(WBA)’와 손잡고 국내에 ‘부츠’ 매장을 열었다. 부츠 역시 국내에서 많은 마니아층을 확보한 브랜드였다. 한때 국내 H&B 시장의 판도를 바꿀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지만 왓슨스와 마찬가지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한 뷰티 업계 관계자는 “유통망 확보 측면에서는 (국내 업체와 손잡는 것이)유리한 점이 있지만 매장 구성이나 판매 전략 등 여러 측면에서 이견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서로 간 이견을 조율하는 데 시간을 쏟느라 정작 중요한 사업 확장에 힘을 못 받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포라는 앞서 합작법인을 설립한 다른 업체를 의식한 듯 한국지사를 설립해 자력으로 유통망을 확보, 국내에 진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뷰티 공룡’이 한국 시장 진출에 본격 시동을 걸면서 H&B 시장에 지각변동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세포라가 한국 진출에 속도를 내는 까닭은 K-뷰티가 각광받으면서 국내 화장품 시장이 규모나 마케팅 측면에서 매력적인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브랜드숍 중심의 화장품 소비 트렌드가 편집숍 형태로 변하고 있다는 점도 주요 이유로 꼽힌다. 실제로 국내 H&B 시장 규모는 지난 2017년 1조7000억원으로 2010년(2000억원) 대비 750% 신장했다. 화장품 시장 규모로는 세계 9위를 차지한다. 관련 업계에서는 지난해 2조원의 문턱을 넘어 2025년에는 4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내다봤다. 아울러 화장품 주요 소비층인 20~30대 여성이 해외 여행이나 직구를 통해 이미 세포라라는 브랜드를 알고 있다는 점도 한국 시장 안착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부진 겪은 합작사 전례 삼아 단독 지사 설립


반면 세포라의 성공 여부를 두고 업계 반응은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올리브영·롭스·랄라블라·시코르 등 국산 화장품 편집매장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세포라의 진출이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그간 세포라가 한국 시장에 빠르게 들어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도 토종 뷰티숍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H&B 매장 수는 전국 1400여 개에 달한다. 이와 별개로 신세계가 2016년 ‘한국판 세포라’를 지향하며 선보인 시코르도 최근 20번째 매장을 열며 전국 주요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세포라가 한국 시장에 일찍 진출했다면 주도권을 잡았을 수도 있는데 현재로선 경쟁사가 많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국내 업체들은 그간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미 지역별·연령별로 차별화된 매장을 선보이는데, 이를 세포라의 인지도만으로 무너뜨리긴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악에는 홍콩처럼 오프라인 매장은 철수하고 온라인으로만 운영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세포라는 2008년 홍콩의 최대 상권 중 하나로 꼽히는 몽콕 지역에 매장을 열었지만 흥행에 실패, 2010년 철수를 결정했다. 이미 홍콩에 화장품 편집숍이 많은 상황이어서 세포라가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 홍콩 세포라는 현재 온라인 몰만 운영 중이다. 양지혜 메리츠종금증권 애널리스트는 “세포라가 오프라인 위주로 상권을 확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며 “국내 업체가 상대적으로 등한시한 온라인 위주의 전략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1474호 (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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