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CEO들이여, 단체여행을 떠나보라 

 

이상호 참좋은여행 대표

은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자 그대로 풀어보면 숨길 ‘은(隱)’에 물러날 ‘퇴(退)’, 조용히 물러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은퇴의 한자 풀이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숨길 ‘은’은 사전을 찾아보면 ‘가엾어 하다’ ‘근심하다’라는 쓰임새가 나온다. 물러날 ‘퇴’는 ‘겸양(謙讓)하다’ ‘움츠리다’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억지로 엮어보면 가엾게 움츠린 모습? 어째 느낌이 좋지 않다.

7년 전에 삼성생명과 서울대가 공동으로 연구 개발해 ‘은퇴준비지수’라는 개념을 내놓은 바 있다. 사람들이 은퇴 이후의 삶을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있는지 수치화 한 것인데, 평가 기준이 ‘여가, 일, 가족과 친구, 주거, 마음의 안정, 재무, 건강’ 등 7개 항목이다. 항목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마음의 안정’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남성은, 특히 CEO 출신이라면 은퇴 직후 급격하게 멘털이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꽤 오랫동안 남들로부터 ‘챙김’을 받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회사의 대표라는 상징적인 자리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여러 의전을 받게 된다. 회사와 관련된 모든 모임에 그의 좌석은 가장 좋은 곳에 마련되어 있을 것이며, 어떤 행사에 가더라도 그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최적의 동선이 구비되게 마련이다. 갓난아기처럼 모든 것을 챙겨 받던 그가 일순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보통사람이 된다는 것은 마치 강보에 싸여 버려진 아기와 같은 처지가 된다는 이야기다. 말할 수 없는 허전함과 소외감은 때로는 타인에 대한 분노로 변하기도 하고, 좀 더 지나면 자괴감으로까지 발전한다. 위험하다. 은퇴의 또 다른 뜻으로 글머리에 예를 든 ‘가엾게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 은퇴준비지수의 항목 ‘마음의 안정’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배려 받던 자리에서 남을 배려하는 위치로 돌아가는 것, 이를 얼마나 슬기롭게 해낼 수 있는가 여부가 CEO의 은퇴 후 남은 생을 좌우한다.

이제서 본론을 슬며시 꺼내본다. 패키지여행을 한번 떠나시라. 여행사 대표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은퇴 이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가장 좋은 예행연습은 단체여행을 경험하는 것이다. 시선과 몸을 낮추어 남을 배려해 보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비단 은퇴를 준비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현직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CEO라 할지라도 이런 훈련은 필요하다. 여행을 간다면 너무 비싼 상품은 피하고 가성비를 강조한 열흘 이상의 장거리 여행을 권한다. 단체여행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좋은 것을 양보할 줄 아는 미덕을 배우게 된다. 버스 맨 앞자리는 가이드와 인솔자 자리, 그 다음으로 좋은 자리는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거나 몸이 불편한 분이 앉는 자리다. 내 자리는 뒤쪽 어느 한 구석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식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성과 노인들, 약자가 먼저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나는 그 다음이다. 둘째, 생각과 처지가 전혀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처음 버스를 탔을 때 견딜 수 없이 어색하던 사람들이 놀랍게도 딱 3일만 지나면 친구가 된다. 눈인사만 주고받다가 친화력 있는 누군가(대부분 50~60대 여성) 먼저 말을 건네는 순간 물꼬가 트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10년은 알고 지낸 이웃사촌처럼 친해진다. 그 사소한 대화 속에서 깨닫고 배우는 것이 의외로 많다. 셋째, 인내할 줄 아는 법을 배우게 된다. 여행 일정이, 가이드가, 현지의 날씨가 모두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 끼어들고 싶은 상황도 단체여행이기 때문에 참고 넘어가게 된다. 인내의 끝은 ‘참기 잘했다’는 안도감이다.

1475호 (201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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