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10대 재벌 자산총액이 GDP의 80%?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한양대 특임교수)
한 달 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해외에서 강연한 내용이 경제학자 사이에 화젯거리이다. 김 위원장은 3월 12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제23회 국제경쟁정책 워크숍’에서 기조강연 원고를 배포했다. 여기서 김 위원장은 “한국 30대 재벌집단의 자산총액이 한국 전체의 국내총생산(GDP)보다 커질 정도로 경제력 집중이 심화되고 있다” “상위 10대 재벌의 자산총액이 GDP의 80%에 달해도 이들이 직접 고용한 사람은 94만 명(3.5%)에 불과하다”며 재벌을 비판했다고 한다.

이에 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위 당국자가 해외에서 국내 대기업과 기업인을 대놓고 비판하는 게 적절했는가에 대한 평가이다. 기업인은 물론, 넓은 의미에서는 세금을 내는 기업 법인(法人)도 국민에 속한다. 그 세금으로 녹을 받는 국가 공무원이 해외 출장까지 가서 국민을 비난하는 것은 아무래도 경우가 아닐 것이다. 과거에 필자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교수와 해외 세미나를 몇 차례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시민단체 교수는 한국의 실상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재벌의 폐해를 부각, 설명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학자보다는 시민단체 운동가이니 그때는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고위 공무원이 국익의 큰 그림을 보지 않고 시민단체 운동가처럼 처신하는 것은 자리와 역할의 부조화 문제가 심각하다.

또 다른 논란은 연설문에서 인용한 통계의 적절성, 객관성에 관한 것이다. 통계 수치는 단순해서 기억하기 쉽고 영향력이 세다. 백마디 말보다 통계 하나가 사람의 인식과 판단 과정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필자는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더 낫다는 뜻의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에 이어서 ‘백문이 불여일수(百文不如一數)’라는 말을 종종 쓰고는 한다. 백마디 문장보다 숫자 하나의 영향력이 더 세다는 뜻이다. 효과가 큰 만큼 우리는 일상적 대화에서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통계를 자주 인용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통계를 오·남용하거나 오염된 통계를 오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경제력 집중이 대표적 사례이다. 경제력 집중 통계는 어떻게 측정해야 좋다는 이론이나 국제 기준이 딱히 없다. 해외 선진국은 우리와 달리 경제력 집중 방지 목적의 규제를 하지 않고 소비자후생과 직결되는 시장 독과점 폐해 시정과 공정경쟁 촉진에 정책의 주안점을 둔다. 다시 말해 경제력 집중 억제 시책은 21세기 세계화 시대와 동떨어진 한국판 갈라파고스 정책이다. 이런 이유로 경제력 집중 통계는 다른 나라 사용례를 찾아보기 어렵고 우리나라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그중에 언론 매체에서 흔하게 쓰는 통계가 김 위원장의 경우에서처럼 10대 재벌 또는 30대 재벌의 자산총액 합계를 GDP로 나눈 값이다.

그러나 GDP 기준 통계를 경제력 집중의 척도로 쓰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틀린 방법론이다. 자산총액은 공장·기계·토지·부채 등의 자산이 과거부터 누적된 결과를 현시점에서 평가한 저량 변수(stock variable)이다. GDP는 한 해 동안 국내에서 생산된 부가가치의 합이며, 유량 변수(flow variable)이다. 개인의 경우도 지금까지 평생 모은 재산은 저량 변수, 지난 한 해의 소득은 유량 변수이다. 개념과 성격이 다른 두 변수를 비교한 통계를 규제 목적의 기준치로 활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GDP 기준 자산총액으로 경제력 집중을 계산, 재단하는 것을 지양해야 하건만 경제학자인 김 위원장이 이를 적극 사용하면서 비판을 자초한 셈이다.

GDP 기준 통계는 실상을 왜곡 과장하는 오염지표라는 점에서 또 다른 한계가 있다. GDP 기준 30대 재벌의 자산 총액을 시계열로 측정하면 2001년 약 49%에서 2012년에는 105%로 두 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김 위원장이 ‘30대 재벌의 자산총액이 GDP보다 커질 정도로 경제력 집중이 심화되었다’고 한 것도 여기에 기초한다. 김 위원장의 이 말을 듣고 워크숍에 참석한 유럽 공무원과 학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국은 이상한 나라? 아니면 한국 정부의 ‘경제 IQ’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까?

일반적으로 성숙경제에서는 자산가치가 GDP 증가율(경제성장률)보다 빠르게 증가한다. 개인도 소득 증가가 정체되는 연령대에서는 총재산이 더 빠르게 증가한다. 소득은 없는데 주택 가격이 올라서 재산세 내기가 버겁다는 하우스푸어가 그런 경우이다. 소득 대비 재산 비중이 커지면 하우스 푸어의 재산 집중도가 심화되었다고 봐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피하려면 자산집중도는 GDP가 아니라 국가 자산 총계(국부) 또는 전체 기업의 자산총계와 비교해서 계산해야 한다. 그렇게 다시 해보면 국부 기준 30대 재벌 자산 비중은 15%, 한국은행 자산총계 기준으로는 36%이다(2012년 통계 기준). GDP 기준의 오염된 통계와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무려 69%∼90% 포인트나 차이가 난다.

만약 베오그라드 워크숍에 스위스 또는 네덜란드 경쟁당국 공무원이 참석했다면 김 위원장의 GDP 기준 통계 설명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은근 궁금하다. 왜냐하면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이들 나라의 경제력 집중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2년 기준으로 로얄 더치 셸(Royal Dutch Shell)은 네덜란드 GDP 대비 매출액 비중만도 60%가 넘는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글렌코 인터내셔널(Glencore International) 매출액은 스위스 GDP의 34%에 이른다. 삼성그룹의 GDP 대비 매출액 비중은 약 23%로 그들보다 낮다. 그래도 네덜란드나 스위스에서는 경제력 집중을 규제한다거나 또는 규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없다.

통계는 국격이다. 정부가 생산, 활용하는 통계는 나라의 지적 역량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정부가 오염된 통계로 사실을 과장하는 것은 국격을 훼손하고 여론을 부추겨 규제 권력을 강화하려는 태도와 진배없다. 경제력 집중을 말하려면 계산이 어려워도 올바른 통계에 기초해야 한다. 이보다 더 바람직한 근본 대안은 경제력 규제의 목적을 집중 방지에서 남용 방지로 바꾸는 것이다. 집중 방지와 남용 방지는 사전 규제와 사후 규제, 당연 위법과 합리 원칙, 1종 오류와 2종 오류 등 차이 면에서 본질과 기능이 다른 규제이다. 선진국이 우리와 달리 집중보다 남용을 규제하는 이유는 대기업 규율, 경쟁 촉진, 소비자 보호에 이 편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부연하면 경제력 집중 방지는 우리나라 헌법정신과도 배치된다. 공정거래법 제1조는 ‘… 시장지배적 지위의 남용과 과도한 경제력의 집중을 방지’를 목적으로 하지만 우리 헌법 제119조 2항은 ‘…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 방지’를 명시하고 있다. 집중 방지와 남용 방지의 차이를 이해한다면 공정거래법의 헌법 불일치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사실이 지난 30년 동안 방치돼 있을까?

1479호 (201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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