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스타트업 투자 늘리는 금융권] 정부 ‘혁신금융’ 외침에 자본시장 돈 풀려 

 

시중은행 스타트업에 초기 투자, 저리 대출, 사업 지원… 증권·자산운용사는 벤처캐피털과 협업

▎문재인 대통령이 3월 21일 오전 서울 을지로 기업은행 본점에서 ‘혁신금융 비전’을 선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시중은행과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 금융회사들이 혁신·중소·벤처기업 투자와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스타트업 관련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동시에 기술금융과 동산담보대출 규모를 늘리는 방식이다. 기업의 자금조달을 돕는 한편 시장이 침체된 상황에서 새로운 투자처를 발굴하려는 노력으로 분석된다. 정부가 벤처기업 성장을 위한 정책을 내놓고 있어 관련된 움직임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은행권 앞다퉈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 내놔

은행권은 기존에는 부동산담보 중심의 대출 지원이 많았지만 점차 직·간접 투자를 늘려가는 추세다. 우수한 기술을 보유한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을 발굴해 소액 직접투자에 나서기 위해서다. 신한금융그룹은 3월 25일 국내 창업·벤처·중소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신한혁신금융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14개 그룹사와 110여 개 본부부서 임직원 2000여 명이 참여하며, 핵심 과제는 기업대출 체계 혁신, 혁신기업 투자 확대, 혁신성장 플랫폼 구축 등이다. 특히 혁신기업 투자에 신한금융 GIB(그룹&글로벌IB) 부문을 중심으로 5년 간 2조1000억원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KB금융그룹은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 ‘KB스타터스’를 운영한다. KB스타터스 선정을 주관하는 ‘KB이노베이션허브’는 지난해 말까지 누적 기준 제휴 79건, KB금융 계열사 투자 134억원을 연계했다. 우리은행은 지난해 말 투자은행(IB)그룹 내 ‘혁신성장금융팀’을 신설했다. 투자한 기업이 기업공개(IPO)까지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앞으로 3년 간 3조원 규모의 혁신성장펀드도 조성한다. IBK기업은행은 창업·벤처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플랫폼 ‘IBK창공’을 운영한다. 창업기업이 성공적인 사업모델을 구축할 수 있도록 무료로 최대 5000만원의 초기 투자, 저금리 대출, 컨설팅, IR, 판로 개척, 사무공간 제공 등을 지원한다.

KEB하나은행은 자사 핀테크 육성센터인 ‘1Q 애자일 랩’에서 사무공간 제공을 비롯해 하나금융 현업 부서들과의 사업화 협업, 경영 및 세무컨설팅, 외부 전문가 상담을 지원하고 직접 투자도 한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 스타트업에게 올해 3월 기준 34억3000만원을 투자했다. NH농협은행은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을 보유한 33개 기업을 선정해 엑셀러레이팅과 직접 투자를 병행 중이다. 아주IB투자와 혁신 스타트업 전용투자 자금 ‘NH-아주 디지털혁신 펀드’를 200억원 규모로 조성한다. NH디지털 챌린저플러스는 초기 자본 투자, 홍보·법률·재무 분야 등의 컨설팅과 멘토링을 지원하는 스타트업 맞춤형 성장단계 지원 프로그램이다.

증권사·자산운용사도 초기 기업 투자 상품 확대

증권사도 속속 벤처투자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벤처캐피털(VC)과 협업, 프라이빗에쿼티(PE) 설립 등 자기자본 투자 및 위탁 운용에 적극 나서고 있다. 외부 자금을 위탁 운용하는 형태로 성장단계 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동시에 계열사 등의 출자를 통해 증권사의 부족한 자본력을 채울 수 있는 방식이다. BNK투자증권도 올해 초 325억원 규모 동남권일자리 창출1호 펀드 결성을 마치고 운용에 들어갔다. 한화투자증권은 지난해부터 모태펀드 출자사업에 단독 위탁운용사로 이름을 올리며 투자를 개시했다. 키움증권도 자회사 키움PE를 통해 코스닥스케일업펀드 결성에 나서는 등 벤처기업·성장기업 등 비상장 기업에 대한 투자에 한창이다.

자산운용사들도 초기 기업 투자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기존에도 비상장 초기 기업 투자에 전문성을 갖춘 운용사가 있었지만, 최근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스타트업 투자에 진출하는 운용사가 늘고 있는 추세다. 부동산 투자가 전문인 이지스자산운용도 은행권청년창업재단 디캠프와 손잡고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전문사모 자산운용사인 밸류시스템자산운용은 그간 메자닌(Mezzanine)을 중심으로 투자했지만 투자 영역 확대를 위해 2017년부터 벤처캐피털 설립을 준비, 지난해 하반기 ‘에이벤처스’를 설립했다.

한편, 창업 관련 기관에서도 금융권 등 다양한 외부 기관을 끌어들이는 방안에 역점을 두면서 자본시장과 벤처·스타트업 사이의 정보 비대칭성이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가령 디캠프는 매달 개최하는 스타트업의 자기소개 무대인 디데이를 지난해부터 이지스자산운용 같은 민간자금과 공동주관으로 개최하고 있다. 지난 3월 20일엔 세계은행그룹 산하 국제금융공사(IFC·International Finance Corporation)와 함께 데모데이를 공동 개최했다.

벤처 업계에서는 정부가 정책적으로 벤처기업 투자 규모를 확대하려는 의지가 커서 스타트업에 투자하려는 금융사가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 정부가 관계부처 합동으로 3월 6일 내놓은 ‘제2 벤처 붐 확산 전략’은 벤처·창업을 혁신 성장의 핵심 과제로 정해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정부 의지가 담겨있다. 정부는 이런 불씨를 확산하기 위해 ‘창업→투자→성장→회수·재투자’의 성장단계를 강화하고 스타트업에 친화적인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민간자본이 스타트업 시장에 흘러갈 수 있도록 제도 개선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이어 금융위원회가 3월 21일 발표한 ‘혁신금융 추진 방향’은 대규모 모험자본 육성과 코스닥·코넥스 시장 활성화, 자본 시장 세제 개편 등 자본시장 역할 확대를 골자를 한다. 모험자본으로 성장자금을 조달한 혁신·벤처기업의 도약을 위해 코스닥·코넥스 시장 문턱도 낮췄다. 또 앞서 정부는 공모·거래소 상장 후 비상장기업에 투자하는 BDC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BDC는 기업공개(IPO)를 통해 조달한 자금으로 비상장기업, 신생 벤처기업, 코넥스 기업에 투자하는 특수목적회사(SPC)다. 증권사와 자산운용사가 운용할 수 있게 규정돼 있다.

비상장 기업에 투자하는 BDC 도입

실리콘밸리은행 기능도 도입한다. 벤처투자자(VC)와 협업을 통해 신뢰도 높은 벤처투자자에게 투자 받은 스타트업에 대출 등 금융 지원을 하는 것이다. 정부는 우선 벤처캐피털과 스타트업 업계 간 협업채널을 마련해 기업은행의 스케일업 지원 기능을 강화할 방침이다. 또 1000억원 규모의 성장 유망 적자기업 특례보증을 시범 운영하고, 지식재산권(IP) 금융을 활성화해 IP 펀드를 2배로 늘리고 IP 담보 범위도 확대하기로 했다. 이들 스타트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돕기 위해 ‘해외 VC 글로벌 펀드’를 3000억원 규모로 추가 조성하고, 올해 국내 스타트업 20곳이 글로벌 기업을 통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길도 넓힌다. 엔젤투자자의 투자 지분을 전문적으로 매입하는 ‘엔젤세컨더리 전용펀드’를 앞으로 4년 간 2000억원 규모로 조성한다. 또 벤처캐피털의 엔젤투자자 보유 지분 인수 때 양도차익을 비과세해 간접적으로 엔젤투자자의 신속한 회수와 재투자를 유도할 계획이다. 정태준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기존 가계금융·부동산담보 중심의 금융업을 미래성장성·자본시장 중심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며 “범금융권 자금 공급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증시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박스기사] 김홍일 디캠프 센터장 - 벤처·스타트업 투자펀드 만기 장기화 필수


▎김홍일 디캠프 센터장. / 사진:디캠프
금융 업계를 비롯한 민간의 벤처·스타트업 투자 확대에 대해 전문가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김홍일 디캠프 센터장은 “최근 스타트업 관련 자본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관련 제도가 개선되면서 시장의 관심이 커졌다”며 “앞으로 이런 자금을 효율적으로 투자·운용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센터장은 금융업과 벤처·스타트업 양쪽의 배경 지식이 풍부한 전문가다. 산업은행을 통해 금융업에 발을 들인 후 미국 리먼브러더스, 일본 노무라증권 등 글로벌 금융회사·자산운용회사에서 경험을 쌓았다. 2012년에는 자산운용사인 아이디어브릿지를 세워 국내 최초의 특허 펀드를 내놓기도 했다. 이후 IBK자산운용 부사장과 우체국금융개발원장을 역임하면서도 초기 기업 및 중견·중소 기업 특허자산 유동화 상품 개발에 힘을 썼다.

최근 금융 업계의 벤처·스타트업 투자가 늘어난 배경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은 정부정책에 큰 영향을 받고 있기도 하다. 민간 주도 벤처캐피털 시장이 한정되어 있는 국내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기존에는 대형 금융회사가 자산 운용의 관점에서 스타트업 투자를 통해서는 리스크 대비 투자자본수익률(ROI)이 나오지 않는 구조였으나, 최근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 규모가 전반적으로 커지면서 금융회사에서도 어느 정도 운용 가능한 투자 포트폴리오 규모를 갖출 수 있게 됐다. 또 과거에는 스타트업 투자가 유동성이 매우 낮다고 인식했다. 유동성이 낮다는 것은 결국 가격 산정에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최근에는 세컨더리 마켓의 활성화와 함께 한국거래소가 스타트업 친화적인 제도를 지속적으로 도입함에 따라 IPO를 통한 회수의 가능성도 과거보다 커졌다. 다만, 지금도 많은 금융회사가 스타트업 투자를 대체투자 파트에서 진행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아직까지 스타트업 투자를 전통적인 금융상품으로 보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민간투자가 확대됐다지만 여전히 정부 자금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민간주도의 시장이 부실하니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시장 마중물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무조건 나쁘다고도 볼 수 없다. 다만, 투자자 보호와 수익이라는 금융시장의 목적과 산업진흥과 관리라는 정부 재정 배분의 목적이 상충하는 일이 곧잘 발생하고 있다. 시장의 건전성 관점에서 보면 운용사는 제약 없이 독립성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운용해서 운용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우수한 성과를 내는 운용사가 살아남는 시장이 돼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운용사는 우수한 기업에 투자할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우수한 기업만 시장에서 살아남는 결과로 이어진다. 우수한 운용사와 우수한 기업이 결국에는 살아남는 시장논리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국내에는 정부 정책자금이 시장에 많이 풀리다 보니 이런 시장논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면이 있다.”

투자자금이 늘어나더라도 이를 효율적으로 투자할 기술금융역량이 국내 금융권에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전문 인력이 열쇠인데 최근 흐름은 긍정적이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인력이 벤처캐피털 업계에 많이 몰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보인다. 기존에는 주로 금융 배경을 가진 인력들이 벤처캐피털 역할을 했다면, 최근에는 다양한 영역에서 전문성을 가진 인력들이 벤처캐피털 업계로 진입하고 있다. 정책적인 부분에서도 BDC가 연내 도입될 예정이다. 한편, 디캠프 같은 초기 스타트업 육성기관과의 협력도 의미 있는 대안이다. 디캠프는 매월 디데이라는 초기 기업 경연대회를 매월 개최하고 있다. 벤처캐피털 대표 및 엔지니어 백그라운드의 심사위원들이 심사에 참여하고 있다.”

벤처·스타트업의 성장과 건전한 민간투자 확대를 위한 과제를 꼽는다면.

“현재 국내에 정책자금이 많이 풀려 벤처캐피털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이들이 민간 출자자를 찾지 못해 투자조합 결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정책자금의 펀드 출자 비율을 서서히 줄이고 이 자리에 민간기업이 들어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에서 스타트업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투자·M&A를 할 만큼의 우수한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 또 벤처캐피털의 조성 금액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펀드의 만기 장기화가 가장 시급한 문제다. 같은 규모라도 펀드 듀레이션이 더욱 길면 운용 벤처사 입장에서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쉬워진다.”

함승민 기자 sham@joongang.co.kr

1481호 (2019.04.29)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