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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합 시대 더욱 각광받는 ‘매뉴비스’] 물건 파는 서비스 회사, 서비스 파는 제조 회사 

 

함승민 기자 sham@joongang.co.kr
자동차 기업은 구독서비스, 검색 포털은 스피커 판매… 제조와 서비스 융합으로 무수한 사업모델 나올 듯

▎2018년 9월 열린 아마존 ‘에코’ 행사.
#1. 100년 넘게 제조업의 대표 주자 격으로 자리매김해온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에서 최근 제조업 모델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차량을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업에 속속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GM은 차량용 에어비앤비 ‘메이븐(Maven)’, BMW는 자동차 공유 플랫폼 ‘드라이브 나우(DriveNow)’, 메르세데스 벤츠의 모기업인 다임러도 자동차 공유 서비스 ‘크루브(Croove)’를 선보였다. 도요타 아키오 도요타 사장은 아예 회사의 미래에 대해 ‘자동차 생산 업체’가 아니라 ‘이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단순히 자동차를 만들어 파는 것에서 벗어나 자동차와 이용자, 주행환경이 생산하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사업 모델을 지향하겠다는 것이다.

#2. 2014년 11월 아마존이 ‘에코’라는 스마트 스피커를 처음 선보인 후 스마트 스피커는 최근 가장 주목 받는 디지털 기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아마존 에코, 구글 홈, 알리바바 지니를 비롯해 국내에선 SK텔레콤의 누구, 카카오의 카카오미니 등 요즘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 속속 진출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가 스마트 스피커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전통 제조 업체는 드물다. 대부분 ICT 기반의 플랫폼 업체다. 검색 포털, 전자상거래, 통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각자가 가진 서비스 역량을 접목시켜 스마트 스피커를 팔고 있다.

제품의 서비스화서비스의 제품화


글로벌 산업계에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매뉴비스(Manuvice, Manufacture+Service) 모델이 늘고 있다. 기존에 제조업 기반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던 기업이 서비스업으로 사업을 확장하거나, 서비스 기업이 제조업에 뛰어들면서 만들어진 제품과 서비스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를 말한다. 제조업 관점에서 제품의 기능을 서비스화해서 자원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제품의 서비스화(Servitization)와 반대로 서비스 강화를 위해 제품을 부가하거나, 서비스 제공업자가 관련 제품을 출시하는 서비스의 제품화(Productization)를 포괄하는 의미다.

제조와 서비스를 결합하는 모델은 낯선 개념이 아니다. 이미 1990년대 후반 경영계의 화두로 떠오른 바 있다. 당시 미국의 GE와 IBM이 변화를 선도했다. GE는 1995년부터 일명 ‘프로덕트 서비스’ 전략을 도입하면서 ‘제조도 하는 서비스기업’을 표방했다. 가전, 항공기 엔진의 제조 기업에서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변화를 시도하며 생산하는 제품과 관련한 유지·관리, 컨설팅 등 솔루션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컴퓨터 하드웨어 분야의 강자였던 IBM은 개인용 컴퓨터 등 수익성이 낮은 일부 제조업 분야를 포기한 대신 컴퓨팅 관련 컨설팅, 소프트웨어·솔루션 분야로 완전히 전환하면서 성과를 거뒀다. 지금도 두 회사 매출의 절반가량은 서비스 분야에서 나온다.

매뉴비스의 초기 형태는 이미 우리 생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수기·프린터 렌털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정수기 업체와 프린터 업체들은 기존의 판매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렌털 서비스로 매달 고정수익을 내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결국 정수기와 프린터 제조업은 제품보다는 서비스가 주도하는 산업이 됐다. 검색 서비스 업체인 구글이 자사의 검색서비스와 연동되는 스마트폰 단말기인 픽셀을 출시하거나 서적 판매 서비스 업체인 아마존닷컴이 전자책 리더인 킨들을 통해 제품 시장에 진출한 사례도 있다. 애플은 ‘아이팟+아이튠즈’에 이어 ‘아이폰+앱스토어’ 모델로 제품과 서비스를 통합해 자사 고객의 충성도를 높이는 효과를 냈다.

매뉴비스는 제품과 서비스를 묶음으로 제공하는 과정에서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창원 한양대학교 경영대학교 교수는 “과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서비스로 올리는 수입이 새로운 제품을 판매하는 것보다 10배에서 20배가량 높다고 추정됐다”면서 “이런 접근을 통해 판매량은 줄었어도 서비스로 안정적인 수입을 얻는 데 성공한 기업 사례도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초기 매뉴비스 기업들은 기존의 제조업에서 벗어나 부가가치가 높은 새로운 제조 영역으로 진출하거나 제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서비스업으로 업무 영역을 확대하는 방안으로 삼았다.

제품 자체의 경쟁우위 또는 차별성 확보가 점점 어려워짐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하이테크 제품마저 단기간에 범용화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차별화된 비즈니스 모델의 개발이 필요해진 것이다. 또 기존 제품의 시장이 위축되자 새로운 수익원 확보를 위해 제조·서비스 융합 전략을 선택하기도 한다. 가령 2015년 차량 판매 시장은 2300조 달러, 운송 시장은 5400조 달러로 나타났다. 이미 자동차 시장에서 차량 판매보다 운송 시장의 범위가 커졌으며, 앞으로 이런 차이는 더욱 커질 것으로 분석된다. 전통적인 제조업 기반의 자동차 업체가 서비스 시장으로 뛰어드는 이유다.

소비 패턴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고객이 과거에는 제품 자체의 속성을 중시했지만 오늘날은 고객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제품의 효용을 증대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원하고 있다. 고객들은 이전처럼 제품은 이쪽에서 구입하고 서비스는 별도로 제공 받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한다. 또 ‘소유’보다는 ‘이용’에 가치를 두는 경향도 강해졌다. 이에 따라 최근의 매뉴비스는 온라인 플랫폼, 공유경제, 구독경제 등과 결합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포르셰와 소형차 브랜드 ‘미니(MINI)’, 현대차 등이 구독형 자동차 구매 서비스를 선보이고, 애플이 3월 25일부터 자사 스마트 기기로 동영상 스트리밍(애플TV 플러스), 뉴스(애플뉴스 플러스), 게임(애플 아케이드)을 제공하는 구독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 그 예다.

사물인터넷·인공지능·빅데이터 기술의 진화


▎현대차 차량 구독 프로그램 ‘현대 셀렉션’.
사물인터넷(IoT)이나 인공지능(AI), 클라우드 등 첨단 기술의 진보도 이런 추세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들 기술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사업 모델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가령 정수기에 사물인터넷을 장착하면 정수기 필터 교체나 청소 시기를 감지할 수 있어 이를 고객과 정수기 회사에 자동으로 알려주는 식으로 정수기 유지·관리 비용을 낮출 수도 있다. 또 고객들이 찬물과 더운물 가운데 어느 것을 어느 시간대에 더 많이 사용하는지 등을 데이터로 축적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거나 맞춤형 제품을 생산할 때 쓰일 수 있다. 정수기 회사뿐 아니라 정수기 부품 회사와 정수기 유통회사들의 데이터까지 디지털화해서 서로 연결하면 부가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선진국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업 모델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독일의 엘리베이터 생산 업체인 티센크루프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고 지능형 빅데이터를 활용해 엘리베이터 오작동을 사전에 점검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인건비를 대폭 줄이고 신규 고객을 확보했다. 미국의 중장비 회사 캐터필러는 중장비에 센서를 부착해 부품의 실시간 마모 정도나 교체 시기를 알려주고 위성·인터넷과 결합해 장비 추적, 예방 보수 일정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내놨다. 이장균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앞으로 제조와 서비스의 융합은 각종 첨단 기술과 데이터를 결합해서 나오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모델이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생존과 경제 성장을 위해 매뉴비스 모델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산업연구원은 ‘4차 산업혁명을 고려한 중장기 산업구조 전망’ 보고서에서 2015년부터 2025년까지 제조·서비스 융합이 가속화한다면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기존 전망치 2.7%보다 높은 2.85%가 가능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대로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의 융합을 가속화하는 4차 산업혁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저성장이 고착화될 수 있다. 개별 기업의 생존과도 직결된다. 과거 한국 MP3 플레이어 제조 업체들이 참신한 디자인과 높은 제품 경쟁력을 기반으로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유지했다. 그러나 제품과 서비스를 결합한 애플 아이팟의 등장으로 국내 업체는 급격히 추락하고 말았다. 이런 사례가 반복돼선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 제조·서비스 융합이 저조하고 생태계는 취약한 상태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제조업의 서비스 생산유발계수는 0.23으로 프랑스(0.52)·미국(0.41)·독일(0.40)·일본(0.40)은 물론 중국(0.29)과 멕시코(0.25)에도 뒤처진다. 연구원은 “산업고도화의 주요 경로 중 하나는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 융·복합을 통한 신사업 창출인데 실상은 국내 제조업과 지식집약사업서비스 간 연계가 원활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정수기 사례에서 보듯이 한국은 소비자를 상대로 하는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 제조업 영역에서는 그나마 최근 트렌드를 비교적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 간 거래인 B2B 영역에서는 둔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수직적인 하청 구조와 업체 간 협력의 기피, 그리고 기존 업체의 기득권 저항이 심하기 때문이다. 기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기업들은 자신들이 표적으로 하는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프로세스를 조직하고 자원을 배분하며 역량을 구축해왔기 때문에 이런 시도를 거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제조 업체의 저조한 융합서비스 활용률과 인식 부족으로 시장이 협소하고 관련 산업의 통계도 마련되지 않아 정책대상을 명확히 할 수 없어 집중 지원이 어려운 부분도 있다.

국내 제조업의 서비스 생산유발계수 낮아

전문가들은 융합서비스 주체가 R&D 기획 단계에서 시장 수요를 반영해 기술사업화 성과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대학과 기업이 연계된 수요 맞춤형 인력양성 프로그램, 프로젝트 연계형 석박사 제도 확대 등을 제안했다. 이와 함께 제조·서비스 융합 분야에 대한 특수 통계 분류 체계를 구축해 정책 대상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것도 과제로 제시했다. 산업연구원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연계성이 낮아 융·복합을 통한 산업구조 고도화와 신산업 창출이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제조업과 서비스업 두 부문의 융합적 가치사슬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도연 오픈타이드코리아 전무는 ‘제조업 패러다임의 변화’ 보고서에서 “제품-서비스 통합이라는 새로운 전략적 차별화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업 내 비즈니스 전략이 확고해야 하고 의사결정의 신속 명확성, 경영진의 명확한 약속도 필요하다”며 “이런 접근과 전략을 모든 제조기업들이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고 다양한 비즈니스와 대학 및 연구기관과 같은 외부의 아이디어가 개방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장균 수석연구원은 “매출구조로 보면 GE나 IBM 같은 글로벌 기업은 제조와 서비스업을 구분하기 어렵다”며 “우리 산업정책도 제조 또는 서비스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통합적인 산업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1484호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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