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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4) 서희, 협상의 정석] 송과 전면전 앞둔 거란의 속내 간파 

 

고려 묶어 위협 해소하려는 전략 읽어… 상대 카드에서 핵심 구별한 안목 탁월

▎일러스트 : 김회룡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외교 업적이라고 불리는 서희(徐熙)의 담판. 하지만 그 내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거란의 대군을 이끌고 온 소손녕(蕭遜寧)을 논쟁으로 이겨 물러가게 했다는 것, 강동 6주(압록강과 청천강 사이 지역)를 고려의 영토로 얻어냈다는 것 정도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항복을 받아내겠다며 쳐들어 온 적국의 총사령관이 상대국 외교관의 설득에 정벌을 포기하고 영토까지 할양해주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희의 활약은 과장된 이야기일까? 그것은 아니다. 서희는 외교 담판의 교과서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다. 오히려 우리가 서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993년(성종 12년)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휘몰아 고려를 침공했다(80만 대군은 과장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며 6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소손녕은 봉산군에 주둔한 고려군을 격파한 후 고려 조정에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요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경계를 침범하였으니 토벌하는 것이다.” “요나라가 사방을 통일하였는 데도 아직 귀부하지 않은 자들이 있어 소탕하고자 하니 지체하지 말고 속히 항복하라.” 고려가 거란의 영역을 침범하였고 신하가 되어 조공도 바치지 않으니 징벌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소손녕의 요구에 고려 조정은 크게 당황했다. 임금 성종은 부랴부랴 사신을 보내 강화협상을 제의했는데 소손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거느리고 온 군사는 80만에 이른다. 항복하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 없앨 것이니 고려의 임금과 신하는 속히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어라.” “너희 나라가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천벌을 내리러 온 것이다. 만약 화친하고 싶다면 속히 항복하라.”

거란의 위협에 성종 “땅 내주고 화친하자”

소손녕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고려 조정은 벌벌 떨었다. 그리고는 거란에 무조건 항복하자는 쪽과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내어주고 화친을 청하자는 쪽으로 갈라졌다. 성종은 후자였는데, 거란이 고구려의 영토를 거론하며 협박하니 땅을 주어 달래자는 것이었다. 성종은 서경을 정리하겠다며 비축한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은 것은 대동강에 던져버려 적이 차지할 수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혼란한 상황을 잠재운 것이 다름 아닌 서희였다. 처음 소손녕의 메시지가 왔을 때부터 서희는 “저들과 화친을 추진할 수 있을 듯합니다”라며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이때에도 그는 “지금 거란의 군세가 크고 성대한 것만 보고 서경 이북의 땅을 베어 주겠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못 됩니다. 그렇게 따지면 삼각산(한양) 이북 또한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그것도 저들이 요구한다면 내어주시겠습니까?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바라건대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일전을 겨루게 한 뒤 그때 가서 화친을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한다.

서희는 대체 무엇을 보고 화친이 가능하다고 말한 것일까? 그리고 화친을 하겠다면서 왜 먼저 일전을 겨루자고 말하는 것일까? 서희가 보기에 거란이 정말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계속 침공을 이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사신을 보내 귀부니 뭐니 하며 고려의 반응을 떠볼 이유가 없다. 거란이 강경한 메시지를 내놓으면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무언가 다른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거란의 상황은 고려와 전면전을 벌일 형편이 못됐다. 거란이 천하를 통일했다는 소손녕의 말은 허풍. 거란은 송나라와 대치중이었다. 송나라가 아무리 문약하다고는 하나 당시는 송 태종이 통치하던 전성기로 거란이 함부로 할 수 없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거란의 군주가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자 송나라는 거란의 연운16주를 탈환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벌이는 중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거란이 고려와 전쟁을 벌인다? 국교 체결을 위해 송나라를 방문하는 등 중원의 정세를 직접 목도한 바 있던 서희로서는 어림없는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거란은 송나라와의 본격적인 대결을 앞두고 후방에 있는 고려의 위협을 해소하고 싶은 것이고, 그것도 가급적 외교적으로 해결을 도모하리라는 것이 서희의 견해였다.

다만 그가 거란과 일전을 겨룬 후 그때 가서 화친을 논의하자고 말한 것은 담판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봉산 전투에서 고려군이 패한 직후다. 거란으로서는 전혀 아쉬울 것이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고려의 역량을 결집시켜 전투에서 승리한 후 협상에 나서자는 것이다. 고려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 고려와 계속 전투를 벌이면 거란의 손실 또한 크다는 것을 보여줘야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희의 주장에 따라 고려는 거란과 온 힘을 다해 맞섰고 두 번째 전투 안융진에서는 거란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자 소손녕은 더 이상 진군하지 않은 채 항복을 독촉하기만 했다. 서희의 예상대로 싸울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서희는 협상대표를 자원하여 소손녕의 진영으로 향한다.

강동 6주 점유 권리 인정받아


▎경기도 여주군 신북면에 있는 서희의 묘.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부터 기 싸움을 벌였다. 소손녕이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는 마땅히 뜰에서 나에게 절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요구하자 서희는 “그것은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나 행하는 예법이다. 양국의 대신들이 만난 지금 어찌 그와 같이 하겠는가?”라며 거부했다. 소손녕이 계속 고집하자 서희는 아예 숙소로 돌아가 버린다. 외교 담판에서 기 싸움은 일부러 극단적인 상황을 유도하는 것으로 판의 흐름을 자신의 의도대로 끌고 가기 위한 행위다. 위기국면을 조성해 상대방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기 싸움은 일종의 치킨게임으로 먼저 물러나는 쪽이 지는 것인데 그렇다고 무조건 버틸 수도 없는 일이다. 상대방이 처해있는 상황과 속내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함부로 싸웠다가는 자칫 파국이 초래될 수 있다. 서희는 지금 아쉬운 쪽은 거란이라는 정확한 분석 아래 언제든지 판을 깰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결국 소손녕은 자신의 요구를 철회하게 된다.

하지만 기 싸움에서 밀렸다는 생각에서였을까? 담판장에 앉은 소손녕은 강경한 목소리로 서희에게 요구했다. “그대들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어찌 그대들이 침범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그대들은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 그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떼어 바치고 (요나라의) 조정에 들어온다면 무사할 것이다.”

요점은 두 가지다. 고구려 땅을 누가 차지하는 것이 옳은가, 즉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가 누구인가를 따지는 것. 다음으로 송나라와 단교하고 자신들과 손을 잡으라는 것. 여기에 대해 서희의 반박이 이어졌다. “귀국의 말은 틀렸다. 우리가 바로 고구려의 후예다. 그래서 국호도 고려라 하고 도읍도 평양에 한 것이 아닌가? 당신들의 논리대로라면 귀국의 동경도 우리의 영토가 되어야 하니 어찌 우리가 귀국을 침범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소손녕이 제기한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 이어갔다. “압록강 안팎도 본래 우리의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지역을 점거하고 있다. 때문에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왕래하기가 더 곤란한 실정이다. 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탓이다. 만약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거기에 성보(城堡)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감히 (요나라를) 찾아가지 않겠는가?”

사실 거란이 고구려를 운운하며 영토문제를 제일 먼저 내세운 것은 전략적인 측면이 컸다. 거란에게 이 문제는 잘 되면 좋고 아니라도 그만이다. 고려가 자신들의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수준이면 충분했다. 그럼에도 짐짓 강한 어조로 이의를 제기한 것은 두 번째 문제에 대한 고려의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송나라와 단절하고 자신들과 국교를 맺는다면 생색을 내며 넘어가 줄 요량이었던 것이다. 서희는 이러한 거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처음부터 두 번째 사안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서희는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탓”으로 “만약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한다면…(중략)… 어찌 감히 조빙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인데, 거란의 요구를 받아들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확답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절묘하다. 이와 같은 서희의 대응은 크게 세 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첫째, 거란에게 철군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시기를 못 박진 않았지만 어쨌든 사대를 약속했고 사태의 책임도 여진에게 있다고 밝혔으니 거란군이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둘째, 여진을 마음껏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여진은 거란과 고려 사이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여진에 대해 군사행동에 나설 경우 자칫 거란을 침입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서희가 거란에 대한 사대는 여진을 내쫓고 그 지역을 고려가 수복해야 가능하다고 조건을 내걸었고, 고려의 귀부가 필요한 거란으로서는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이른바 강동 6주가 이 지역이다. 흔히 이 때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강동 6주를 돌려받았다고 말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 지역을 점유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은 것이지 거란이 자신들의 영토를 할양해 준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서희의 대응은 고려 내부의 혼란을 줄였다. 만약 서희가 거란에게 사대하겠다고 곧바로 약속했다면 고려 조정은 친송-친요, 합의 반대-합의 찬성으로 갈라져 거센 회오리가 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희가 핵심 문제에 대한 결정을 유보하면서도 고려에 유리한 협상결과를 얻어낸 덕분에 고려는 차분히 이 문제를 검토할 시간을 벌었고, 얼마 후 성종은 고려 내부의 합의된 결론을 토대로 거란에 수교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

발 빠른 대응으로 고려 내부 혼란 줄여

요컨대 서희의 사례는 외교담판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상대방이 진짜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상대방이 내놓은 카드에서 핵심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구별해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내가 양보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최대한 피해를 줄이고, 상대방으로부터 양보 받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한 유리한 시점에, 당당함과 치밀한 논리로 임해야 하는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95호 (2019.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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