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키코 재앙, 치명적인 달콤한 유혹 

 

‘키코 재앙’은 어떤 세력이 “원화 절상(환율 하락)이 예상된다”며 “비정형 옵션거래인 키코에 가입해 환차손 위험을 피해야 한다”고 수출 기업을 부추기면서 비롯됐다. 그 사탕발림 속에는 두 가지 치명적 독이 숨겨져 있었다. ① 당시 외환 사정 이면을 들여다 보면 환율 급등 또는 급변동 위험이 내연하고 있었으며 ② ‘키코’ 구조는 수출 기업 환리스크를 회피하기보다는 오히려 떠안게 만드는 구조라는 점이다.

복잡한 금융 관련 정보와 어려운 금융지식을 거머쥔 금융회사와 수출에만 진력한 수출 기업이 벌인 머니 게임의 결과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키코 재앙이 한국 경제에 끼친 폐해는 상상 이상으로 컸고, 아직도 그 악영향이 크게 남아있다. 먼저, 유망 수출 기업 도산 사태는 우리나라 수출산업 경쟁력을 잠식했다. 다음, 중견기업 부실화로 산업 중추가 약해져 대기업 중심 산업구조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 경제는 경상수지 흑자와 외국인 투자자금 유입 확대로 외화보유액이 2001년 1028억 달러에서 2007년 2622억 달러로 두 배 반 정도로 늘어났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투자하기 위해 환전한 달러를 보관하다 보니 실상과 달리 겉으로는 외환보유액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은행이 3개월마다 발표하는 국제투자포지션(International Investment Position)을 보면, 실질 대외지급능력을 나타내는 순국제투자포지션(net IIP)은 기간 중 마이너스 578억 달러에서 마이너스 1874억 달러로 나라 빚이 늘어나고 있었다. 순국제투자포지션, 즉 순대외금융자산은 경상수지 누적에다 대외투자거래를 합한 결과로 마이너스 순대외금융자산. 즉 순대외금융부채가 늘어나면 대외지불능력 약화로 대내외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는 까닭에 환율 하락 위험은 물론 환율 변동성이 급격히 확대된다.

당시 원화가치가 오를 것 같은 잘못된 분위기에서, 실상을 아는 세력이 원화가치의 급락 또는 급변동을 예측하고 ‘키코 음모’를 기획했을 것이다. 수출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환율 변동 방향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수출 중견기업들이 덫에 걸려들었다. 금융회사들은 (겉으로만 보이는) 원화가치 평가 절상(환율 인하) 가능성에 따른 환차손을 피하라며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는 수출 기업들을 부추겨 키코에 가입하도록 유도했다.

키코 조건을 들여다 보면 수출 기업에 리스크 관리는 조금, 그 비용은 무한대인 불공정 게임이었음이 금방 알 수 있다. 기업은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비용을 들여 오히려 리스크를 떠안는 무모한 게임이었다. 상당수 기업 재무관리자들은 복잡한 옵션 구조 설명을 들어도 애매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환리스크 관리라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 또는 강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키코(KIKO)는 약정 상한·하한(barrier)을 넘어 환율이 변동할 경우 옵션이 발효(KI, Knock-In)되거나 소멸(KO, Knock-Out)되는 통화옵션 거래다. 수출 기업은 환율이 내려도 KO 하한 아래로 떨어지지 않아야 수출대금을 미리 정한 행사가격으로 팔 수 있어 환리스크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환율이 KO 하한 아래로 떨어질 경우 풋옵션이 소멸돼 환리스크에 그대로 노출된다. 환율이 올라도 KI 상한 아래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환율이 KI 상한 위로 한순간이라도 오르면 (은행에게) 콜옵션이 주어져 옵션 만기 때 수출 금액의 2배를 행사가격으로 은행에게 매도해야 하는 해괴한 조건을 붙였다. 실제 예로, KO 상한이 1100원이고 행사가격이 1000원인데 환율이 (1100원을 넘어) 1300원으로 오르고 수출 실적이 5000만 달러라면 기업은 300억원〔5000만원×2(1300만원-1000만원)〕의 손실이 나는 구조다. 환율이 오를수록 행사환율과 시장환율 격차가 벌어지고 수출액이 많을수록 기업은 치명적 손실을 봐야 하는 구조다.

키코는 이해하기 어려운 옵션 상품을 설계해 이를 일부러 현학적으로 설명해 “상품의 내용을 알듯 모를 듯해도 환리스크를 제거해준다는 사탕발림으로 얼떨결에 가입하도록 하는 상품이었다. 더구나 우리나라 외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측과 멋모르고 들떠 있는 측의 싸움이어서 승패가 미리 정해져 있었다. 키코 재앙은 왜곡된 외환시장 정보에 더해 난해한 금융지식을 가진 자와 안 가진 자의 승부가 예정된 대결이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이상세계가 아닌 현실세계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기란 불가능하다.

키코 사태는 정보 비대칭성(information asymmetry)을 넘어 가짜 정보(pseudo-information)를 이용한 사건, 즉 외환보유액의 허실과 복잡한 상품 설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업을 함정에 빠뜨린 재앙이다. 수출 기업들이 외환시장의 진실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는 장막 뒤에서 그 같은 사실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키코 상품 설계는 여우를 피해가라고 친절을 베푸는 척하면서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는 굴로 안내한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모럴해저드(Moral Hazerd) 한계를 넘어선 올가미라고 판단된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외지불능력 상황과 그 변동방향을 간파하고 있었다면 키코 상품 설계에 도사리고 있었던 무서운 함정을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키코 상품은 금융회사의 탐욕을 채우려는 전략 상품이지 수출 기업의 환리스크 관리를 돕기 위한 상품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감독당국이 키코 게임이 상황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불공정 게임이라는 사실을 일찍 간파하고 ‘소비자보호’에 나섰더라면 수출 역군들의 뼈아픈 침몰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크다. 언젠가 “키코는 고객의 기대이익과 기대손실이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설계돼 있다”며 “키코는 그 시간과 규모가 맞으면 정확하게 헤지가 되는 것”이라는 어떤 전문가의 국회 증언이 보도됐는데,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 국회의원들은 “기대이익과 기대손실” “시간과 규모”가 무엇을 뜻하는지 얼마나 이해했을까? 상황 판단이 어려운 수출 기업들에 한 키코 가입 권유도 그렇고 그렇지 않았을까?

‘키코 재앙’ 한가지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금융산업 경쟁력이 세계 최하위 수준이라는 세계경제포럼(WEF)의 평가가 틀리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금융 부문은 사람 사는 데 필요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실물 부문의 원활한 순환을 위해 존재한다. 금융회사는 어디까지나 금융소비자의 이익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 금융소비자가 금융회사 탐욕의 도구로 전락한다면 나라의 미래는 기약하기 어렵다. 분명한 사실은 그 당시 중견 수출 기업들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수출 경쟁력 약화도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었고, 고질적 경제력 집중 문제도 상당 부분 해소되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 신세철 경제칼럼니스트('불확실성 극복을 위한 금융투자' 저자)

1496호 (201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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