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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 뒤흔든 환율전쟁사] ‘무역 갈등-경기 침체’ 낳은 첨예한 대립 

 

금본위제 폐기 이후 각국 통화가치에 주목… 대공황 직후 충돌부터 미중 갈등까지 미국이 주도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주요국의 통화가치는 금에 묶여 있었다. 금이라는 공통의 가치 척도가 존재했기 때문에 국가 간 교역이나 자본 이동에 환율과 관련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본위제는 경제에 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경기가 나쁠 때 중앙은행이 돈을 푸는 요즘의 상식은 금본위제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웠다. 화폐와 바꿔 교환할 수 있는 금을 보유해야 유동성을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세계 경제는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다. 물가가 기조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은 돈이 귀할 때 나타나는 경제 현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금본위제는 소멸됐다. 인류가 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면서 경기 침체의 기간은 단축됐다. 경기가 나쁠 때는 원 없이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돈이 많이 풀려 발생한 인플레이션이라는 대가를 치루기도 했지만 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험했던 양적완화는 무제한적인 유동성 공급의 대표적 사례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1971년 ‘닉슨쇼크’는 금태환제 중단이 핵심으로 알려져 있지만 수입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닉슨쇼크는 국제 경제 흐름을 바꿔놓았다.
금본위제 폐지 이후 대두된 문제는 환율이다. 인류가 금의 족쇄에서는 벗어났지만 서로 다른 국가의 통화가치를 조정해주는 공통의 잣대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통화 간 교환비율, 즉 환율을 인위적으로 바꾸면 교역과 자본 거래에서 뚜렷한 우위를 누릴 수 있기에 금본위제 폐기 이후의 자본주의는 환율과 관련된 갈등과 투쟁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다.

환율 전쟁에는 늘 미국이 개입했다. 절대적 권위를 가졌던 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달러는 지난 100여 년간 기축 통화의 지위를 놓치지 않았다. 환율 전쟁은 여러 외피를 쓰고 나타났지만 기본적으로는 달러 가치와 관련된 갈등이었다. 최초의 환율 전쟁은 대공황 직후였던 1930년대에 시작됐다.

1차 환율전쟁 | 대공황 직후의 보호무역주의: 1929년 주식시장의 붕괴로 시작된 대공황은 신생국 미국이 직면한 최대의 시련이었다. 무기력했던 후버 대통령을 누르고 백악관에 입성한 루즈벨트 행정부는 불황 타개를 위한 대책으로 금본위제에 손을 댄다. 1933년 미국은 대내적으로 금본위제를 중단한다. 달러의 금태환이 중단됐고, 미국 국민들은 보유 중인 금을 온스당 20.6달러에 국가에 팔도록 의무화했다. 미국 국민들의 금 보유는 원천적으로 금지됐다. 금을 가지고 있으면 처벌을 받았다. 1913년에 만들어진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는 금에 구애받지 않고 경제에 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다.


미국은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는 금본위제를 유지했다. 당시 미국의 화폐제도는 금환본위제였던 셈이다. 대외적으로 금본위제를 고수했지만 금과 달러의 교환비율은 손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이외의 많은 나라가 금본위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1931년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 스웨덴, 일본이 금본위제를 포기하면서 자국 통화에 대해 사실상의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미국도 이에 대응해 1934년에 정화정비법을 만들어 온스당 20.6달러였던 금 가격을 35달러로 올렸다. 달러를 일시에 69%나 평가절하시키면서 미국도 본격적으로 환율 전쟁에 참전했다. 프랑스와 벨기에 등도 1936년에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경쟁적으로 자국 통화가치를 절하시키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못됐다. 이런 각자도생 식의 자국 이기주의는 2차 세계대전으로 폭발하게 된다.




2차 환율전쟁 | 브레튼우즈 체제 일방적으로 파기한 미국: 2차 세계대전의 승자는 미국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중국 등도 전쟁을 일으킨 독일·이탈리아·일본 중심의 추축국에 맞서 승리했지만 국토가 철저히 파괴된 이들에게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세계 통화 질서도 미국의 입맛에 맞게 재편됐다. 독일과 일본의 패배가 확실시되던 1944년 미국은 44개국의 대표를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초대한다.


▎1985년 플라자합의를 마치고 카메라 앞에 선 G5 재무장관들. 왼쪽부터 서독의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프랑스의 피에르 베레고부아,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자크 드 라로 지에르 IMF 총재, 영국의 나이절 로슨, 일본의 다케시타 노보루.
브레튼우즈 회의에서는 장기 성장을 위한 자금 지원 목적의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국제수지의 일시적 불균형이 발생할 때 유동성을 공급해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설립이 결정됐고, 국제 환율질서도 새롭게 만들어졌다. 달러의 가치를 금에 고정시키고, 미국 이외 국가의 통화는 달러에 연계시키는 환율제도가 등장한 것이다. 미국은 달러를 금 1온스당 35달러에 고정시키고, 이를 기준으로 IMF 가맹국들은 달러에 대한 자국 통화의 환율을 고정시킨 후 1% 이내에서 변동을 허용하는 사실상의 고정환율제도였다. 미국은 다른 나라가 달러를 가져와 금과 교환을 요구하면 이에 응해야 했다.

1934년 미국이 정했던 금 1온스당 35달러가 그대로 기준으로 사용됐다. 브레튼우즈 회의를 기점으로 국제 통화의 패권은 영국 파운드에서 미국 달러로 완전히 넘어갔다. 당시 영국 대표로 참석했던 경제학자 케인스(J.M.Keynes)는 달러 패권에 대항하기 위해 세계 화페인 방코르(Bancor) 창설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미국의 주장이 관철됐다. 이미 미국이 압도적인 세계 최강국이 됐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은 구대륙인 유라시아를 황폐화시켰지만, 미국은 태평양 전쟁 초기 하와이가 공격을 받았을 뿐 본토는 멀쩡했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의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고, 이를 기반으로 금을 사들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전 세계에서 유통되던 금의 80%가 미국 재무부 금고에 쌓여 있었다. 금에 가치를 고정시킬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었다.

금에 달러가, 다른 국가의 통화가치가 달러에 고정돼 있었던 브레튼우즈 체제는 매우 안정적인 체제였다. 환율 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거의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브레튼우즈 체제가 제대로 유지되려면 미국이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국제수지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했다. 국제수지 적자가 커지면서 금이 미국 밖으로 유출될 경우 달러의 금태환성이 위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권위는 미국에 막대한 금이 쌓여 있어야 유지될 수 있었다.


기축통화국으로서 미국이 담당해야 할 두번째 의무는 안정적인 물가 유지였다. 만일 미국이 돈을 많이 풀어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는 인플레이션이 생길 경우 금의 실질가격은 상승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발생해도 금 1온스당 35달러라는 명목 교환비율이 바뀌지는 않는다. 달러를 주고 미국으로부터 금을 받아온 국가들이 이를 시장에서 실질가격으로 매각하면 차익을 얻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고정환율제가 유지될 수 없다.

1960년대 후반부터 브레튼우즈 체제는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안정적인 국제수지와 물가 관리라는 두 축이 한꺼번에 흔들렸기 때문이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지속적인 흑자 기조를 유지해오던 미국의 경상수지는 1968년 적자로 반전되기 시작했다. 국내 저축 부족은 경상수지 적자로 귀결됐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 국방비 지출이 크게 늘어났고, 북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을 지향했던 존슨 행정부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프로그램 탓에 재정 지출이 크게 늘었다. 여기에 정부 지출 확대에 따른 통화증발로 물가상승률이 치솟기 시작했다. 인플레이션으로 미국 달러의 실질가치는 하락했고, 국제 상품시장에서 금 가격은 달러당 60달러대로 치솟았다.

같은 서방 진영이었지만 미국과 각을 세우고 있었던 드골의 프랑스는 무역수지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를 계속 금으로 바꿔갔다. 35달러를 주고 받아온 금 1온스를 국제 상품시장에서 60달러에 팔 수 있었으니 브레튼우즈 체제가 지속되기는 어려웠다. 미국에서 금은 계속 유출됐고, 미국이 교환해줄 금이 부족하다는 흉흉한 소문이 국제 금융가에 떠돌았다.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저녁 닉슨 대통령이 TV 카메라 앞에 섰다. 인기 드라마였던 서부극 보난자(Bonanza) 방송을 일시 중단하고 긴급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달러의 금태환 중단과 수입품에 대한 10%의 관세 부가가 발표의 요지였다. 2차 대전 이후 부동의 원톱이었던 미국 경제의 쇠락과 함께 브레튼우제 체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제 통화가 금에 묶였던 세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와 함께 고정환율의 세상도 사라졌고, 세계 경제는 환율 급변과 반복적인 외환위기의 발생이라는 격랑에 휘말리게 된다.

3차 환율전쟁 | 일본과 서독을 때린 플라자합의: 미국 달러화는 닉슨쇼크 이후 지속적으로 약세를 나타냈다.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직전 357엔에 고정돼 있었던 엔·달러 환율은 1978년 177엔으로 하락한다. 달러는 엔화에 대해 50%의 평가절하를 기록했다. 엔을 비롯해 독일 마르크, 영국 파운드 등 선진국 통화 전반에 대한 교환비율인 달러 인덱스는 같은 기간 동안 27% 하락했다. 달러는 경쟁 통화에 대해 두드러진 약세를 나타냈고, 이는 미국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 개선에 일조했다.


▎2013년 버냉키 미 연준 의장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 시사 발언 이후 미국 금리와 달러 가치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지난 1월 미 애틀랜타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에 참석한 제롬 파월 현 의장, 재닛 옐런, 벤 버냉키 전 의장. /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달러 약세 기조는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일단락됐다. 70년대 후반 미국은 극심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두 차례 오일 쇼크를 겪으면서 비용 측면에서의 인플레 압박이 커졌다. 또 노동조합의 임금 인상 요구와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했던 케인스 경제학의 유산은 재정 지출을 높은 수준에서 유지하게 했다. 모두 물가를 끌어올리는 요인이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의 시대에 연방준비제도의 수장에 오른 이는 2m 키의 거한 폴 볼커였다.

폴 볼커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억제하기 위해 연방기금 금리를 20%로 인상했다. 이자를 많이 받을 수 있는 통화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폴 볼커의 고금리 정책은 70년대 내내 이어졌던 달러 약세를 종식시켰고 달러는 강세로 반전된다. 이런 흐름이 85년까지 이어졌다.

달러 가치는 상승했지만 미국 경제에 대한 우려는 점점 커졌다. 미국 경제는 경상수지와 재정수지가 동시에 악화되는 쌍둥이 적자로 신음하고 있었다. 경상수지 적자는 미국 기업의 근본적인 경쟁력 약화에서 비롯됐다. 일본과 서독 등 2차 대전 전범국가들이 패전의 트라우마를 딛고 70년대 중반 이후 약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 기업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였다. 소니의 워크맨 신화는 ‘떠오르는 일본’의 상징이었다. 재정수지 적자는 레이건 행정부의 공세적인 대외정책에 기인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주의 경제학을 신봉했지만, 소련을 겨냥한 군사비 지출은 아끼지 않았다. 과도한 군비 지출은 80년대 중반 미국 재정수지 적자 확대로 귀결됐다.

80년대 중반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수지 적자 규모는 당시 기준 사상 최대였다. 미국은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브레튼우즈 체제를 폐기한 닉슨 쇼크가 일방적인 선언이었다면,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국가를 지정해 압박했다. 85년 9월 미국은 서방 선진 5개국의 재무장관 회의를 소집한다. 이 회의가 열린 장소가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이고, 회동은 역사적인 플라자합의를 낳았다.

플라자합의의 골자는 미국에서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가장 컸던 일본 엔화와 제2 흑자국이었던 서독 마르크화를 달러 대비 절상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압박에 일본과 독일이 순순히 응한 이유는 당시가 동서냉전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어느 국가라도 자본주의 블럭의 버팀목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플라자합의는 일본과 독일의 수출에 큰 타격을 줬다. 특히 일본 엔화는 플라자합의 이후 2년여 동안 달러화에 대해 50%나 절상(엔·달러 환율 243엔→121엔)됐다. 일본의 수출은 플라자합의 이듬해인 1986년부터 마이너스(전 년 대비)로 반전되기 시작했다.

1987년 미국은 또 한번의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낸다. 프랑스 루브르에서 서방 6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모였다. 루브르합의는 미국에 대해 충분히 성의를 보인 일본과 서독의 통화가치 절상을 중단하는 대신 각국이 내수를 부양해 미국의 무역 역조 완화를 도모하자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루브르합의를 충실히 이행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과도한 내수 부양이 엄청난 자산 가격 버블로 이어져 90년대 시작된 ‘잃어버린 20년’을 불러온 단초가 됐기 때문이다. 이미 수출에 타격을 받은 터라 일본은 적극적인 내수 부양에 착수한다. 일본은행은 공정할인율을 공격적으로 인하했고 대출 규제도 매우 느슨하게 적용했다. 80년대 후반 일본인들은 주택가격보다 더 많은 대출을 은행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은행들이 주택매입가격 외에 취득세까지 대출해줬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저금리로 빌린 자금을 주식시장에 투자하는 이른바 ‘자이테크(재테크)’ 열풍에 휩싸였다. 이런 투자 붐 때문에 89년 겨울의 정점에서 일본 니케이225지수의 주가수익비율(PER)은 70배로 치솟았다. 지속되기 힘든 버블이었고,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올랐던 자산 버블의 붕괴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도 80년대 환율 전쟁의 유탄을 맞았다. 80년대 환율 전쟁의 1라운드에서 미국이 겨냥한 주된 타깃이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가장 컸던 일본과 독일이었다면, 환율 전쟁 2라운드에는 세컨티어 무역수지 흑자국이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1987년 강력한 통상 규제 법안인 ‘수퍼 301조’를 발의한 데 이어, 1988년에는 한국과 대만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했다. 한국 원화는 80년대 후반 달러에 대해 25%나 절상(원·달러 환율 895원→667원)됐고, 여기서 비롯된 수출 부진은 90년대 초까지 이어진 경기 침체의 시발점이 됐다.

4차 환율전쟁 | 양적완화 국면에서 미국과 신흥국 대립: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공격적인 금융완화 정책을 폈다. 제로금리 정책도 모자라 양적완화라는 비정상적인 통화정책을 썼다. 양적완화는 돈을 무제한적으로 풀어도 통화의 신뢰가 유지될 수 있는 기축통화국이나 준기축통화국이나 쓸 수 있는 정책이다. 닉슨 쇼크 이전 시대처럼 금에 묶여 통화가치의 보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달러와 엔, 유로 정도는 관습적으로 국제 거래의 기준이 되는 통화로 자리 잡았다. 선진국이 유동성을 풀 때 세계 경제는 대체로 평화롭다. 어느 나라나 국제 거래를 위해서는 (준)기축 통화가 필요한데, 미국이 금리를 낮추거나 양적완화를 하면 달러를 구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이지머니(easy money)’로서의 달러를 덥석 물었다가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서 달러 가치가 높아지는 국면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이다.


8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그랬다. 70년대의 유가 급등은 중동 산유국들을 벼락부자로 만들었다. 산유국들은 원유를 팔아서 생긴 달러를 미국 은행에 예치했다. 미국 은행들은 산유국들이 맡긴 막대한 저축을 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다 중남미 국가로의 대출 확대에서 활로를 찾았다. 미국 은행들로부터 관대한 조건의 대출을 받았을 때 중남미 국가들은 쾌재를 불렀지만 70년대 후반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폴 볼커 연준 의장이 고금리 정책을 쓰자 큰 낭패를 봤다. 20%로 오른 미국 정책금리는 달러 가치를 상승시켰는데, 이런 강달러는 달러 빚을 낸 중남미 국가들의 실질 상환부담을 급격하게 높였다. 중남미 국가들은 82년 브라질을 시작으로 줄줄이 외채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도 달러 유동성의 급격한 확대에 대한 경계심이 있었다. 80년대에 어려움을 겪은 브라질이 대표로 나섰다. 기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은 2010년 G20 회의에서 선진국의 양적완화에 따른 유동성 공급 확대는 시차를 두고 신흥국 경제의 안정성을 해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만테가의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다. 브라질이 대상이 됐다는 점이 비극이었지만 말이다. 미국의 양적완화 국면에서 이지머니 달러를 쉽게 받아들인 신흥국들은 미국의 통화정책 정상화 논의가 본격화됐던 2013년 이후 극심한 외화 유동성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2013년 당시 연준 의장 버냉키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 시사 발언 이후 미국 금리와 달러 가치는 상승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경상수지 적자국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브라질 헤알화도 큰 폭의 평가 절하라는 후유증을 경험했다.

5차 환율전쟁 | 현 재진행형인 미국과 중국의 갈등: 양적완화 국면에서 많은 외화를 받아들인 국가는 브라질만이 아니었다. 중국도 막대한 규모의 외화부채를 지게됐다. 특히 중국 기업들의 외화 부채 증가 속도는 매우 빨랐다. 국제결제은행에 따르면 중국 기업들의 외화부채는 미국의 양적완화가 시작된 2009년부터 2016년까지 연평균 17.5%나 증가했다. 이렇게 급증한 중국 기업들의 외화표시 부채는 미국과 적대적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현 상황에서 중국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나타나고 있는 미중 갈등은 환율전쟁에만 국한되지 않지만, 환율을 둘러싼 이견도 양국 간 갈등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다. 외견상 미국의 요구는 80년대 플라자합의 국면과 비슷하다. 미국은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가장 큰 중국 위안화의 평가 절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요구에 대한 반응은 일본과 중국이 전혀 다르다. 중국은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이 걸어간 길을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 듯하다. 환율 주권을 미국에 쉽게 내준 후 수출에서 입은 타격을 만회하기 위해 시행했던 내수 부양책이 과도한 버블로 귀결됐다는 문제 의식이다.

중국의 아킬레스건은 과도한 외화표시 부채다. 위안화 약세 유도는 중국 수출에는 도움이 되지만 외화표시 부채 규모가 큰 중국 기업에는 치명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민 은행은 8월에 위안·달러 환율을 7위안대로 고시하면서 포치(破七)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위안화 절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미국을 자극하는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7위안대의 위안·달러 환율 유지가 인민은행의 본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금까지 인민은행은 위안화가 7위안대로 올라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왔기 때문이다. 중국 기업들의 외화 표시 부채에 대한 고려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2015~16년 중국 경제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면서 위안화 약세가 나타날 때 인민은행은 위안·달러 환율을 7위안 이하에서 유지하기 위해 외환시장 개입을 단행했다. 당시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3조9000억 달러에서 3조 달러로 빠르게 감소했다. 위안화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달러 매도 개입의 결과였다.

미중 갈등은 미국에 유리한 형국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외화표시 부채 규모가 크다는 핸디캡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의 입지이다. 과거 환율전쟁은 미국 경제의 취약함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렇지만 최근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미국 경제도 순환적 경기 하강의 리스크에 노출돼 있기는 하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상화가 가장 빨리 이뤄진 국가는 미국이다. 과거 환율전쟁의 타깃이 됐던 국가들과는 달리 중국은 고분고분하지 않지만, 상대방을 압박할 수 있는 미국의 내구력도 과거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봐야 할 듯하다.

-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1499호 (2019.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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