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김준태의 세기의 담판(7) 주희의 동기, 진량의 결과] 행위자의 내면 VS 행위의 결과 

 

가치 판단 기준 달라 역사인식도 평행선… 서로 비판했지만 교류 이어가며 존중

▎일러스트:김회룡
이번에 소개할 담판 사례는 지난번과는 결이 다르다. 정치가나 외교관들의 담판이 아니라 학자들의 담판이다. 단기간에 결판을 낸 것이 아니라 5년여에 걸쳐 이루어졌고, 두 번 만나 격렬하게 토론하긴 했지만 대부분 서신을 통해서 진행됐다. 그러면 학술 논쟁이지 담판이 아니지 않으냐고? ‘담판(談判)’이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서 유래한 단어다. 오늘의 이야기야말로 담판의 본래면목인 것이다.

중국 남송(南宋) 시대에 태어나 성리학을 집대성하고 조선 유학자들에게 ‘주자(朱子)’로 추앙받았던 주희(朱熹)는 정치에서 행위자의 ‘동기’를 중시했다. 치열한 자기수양을 통해 도덕적 인격을 갖춘 통치자가 인(仁)과 덕(德)의 동기를 가지고 정치를 펼치게 되면, 그 도덕성이 사회 전체로 감화되면서 모든 일이 자연스레 잘 풀려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치자가 아무리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서의 성공까지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더욱이 정치는 선과 악이 혼재하는 공간이고 국익을 위해서는 비도덕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 당장 나라가 위태롭고 백성이 죽게 생겼는데 통치자의 동기가 옳은지 아닌지를 따지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만나서 토론하고 서신 논쟁도

이에 주희와 동시대 학자였던 진량(陳亮)은 ‘결과’를 강조한다. ‘사공(事功)’, 일이 구체적인 효과를 거두고 성공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나라와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면, 통치자의 동기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진량은 결과 자체에 덕이 깃드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가 좋다면 그 과정에 일부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용인할 수 있다고 본다. 결과와 상관없이 동기가 올발라야 하고, 과정, 방법, 수단이 모두 도리에 어긋나선 안 된다는 주희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대립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두 사람은 1182년 조우한다. 주희의 절친한 친구이자 진량의 고향 선배였던 여조겸이 양쪽을 오가며 한번 만나보라고 권유했지만 성사되지 못하다가, 여조겸이 죽고 주희가 그의 무덤을 참배하러 가는 길에 이웃에 살던 진량을 방문한 것이다. 뒤이어 진량이 답방해 열흘간 함께 머무르면서 두 사람은 심도 있는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주희가 진량을 만나기 전부터 진량의 결과주의 학설을 강하게 비판한 점, 만남 이후 5년에 걸쳐 ‘동기-결과’의 문제를 가지고 서신 논쟁을 벌인 점 등을 볼 때, 두 사람의 만남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한 담판이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결과를 중시하는 진량과 동기를 강조하는 주희의 학술 담판은 애초부터 합의점을 찾기 힘든 것이었다. 가치 판단의 기준을 행위자의 내면적 동기에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행위의 결과에 두어야 하는가는 의무론과 공리주의 등, 서양철학에서도 수천년 동안 평행선을 달려온 주장이다. 더욱이 주희와 진량은 진리에 대한 개념 설정부터 서로 달랐다. 주희가 진리란 사서오경(四書五經)과 같은 옛 성현들의 말씀 속에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면, 진량은 성현의 말씀이 시대현실에 맞게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시대가 어떻게 변화하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건 경전에 담겨 있는 진리를 그대로 실현하고 그 진리에 맞게 세상을 바꿔가야 한다는 것이 주희의 입장이라면 경전의 가르침을 현실에 맞게 변통해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 진량의 견해다. 주희가 ‘동기’를 강조한 것은 이처럼 무조건적인 도덕률이자 당위법칙으로서의 진리를 중시했기 때문이고, 진량이 ‘결과’에 방점을 찍은 것은 상대주의적인 진리관을 토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와 같이 전제가 서로 다르다 보니 두 사람의 역사 인식에도 차이가 생겨났다. 대표적인 것이 당 태종에 대한 입장차이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당 태종은 중국이 낳은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힌다. 각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어 당나라의 번영을 이끌었으며, 신하들과 올바른 정치에 대해 토론한 저술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남겼다. 그런데 주희와 진량은 이 당 태종에 대한 평가에서 정반대의 입장에 선다. “태종의 마음은 어느 한 생각도 욕망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중략)…그가 국가를 건국하고 대대로 물려주었다고 해서 이것만 가지고 천리의 올바름을 얻었다고 평가한다면, 이는 성공과 실패의 결과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됩니다. 마치 사냥꾼이 새를 많이 잡은 것에 대해서 자랑할 뿐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교활한 사냥법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당 태종은) 폭력을 금지하고 난리를 진압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공적은 결코 가릴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본령이 위대하고 드넓었기 때문입니다.”

순서대로 주희가 진량에게, 진량이 주희에게 한 말이다. 진량은 결과주의의 입장에서 당 태종이 천하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풍요로운 세상을 가져왔으니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이에 반해 주희는 당 태종의 동기가 사악하기 때문에 그의 정치 또한 옳게 평가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주희가 보기에 당 태종은 권력을 잡기 위해서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친형과 친동생을 죽인 사람이다. 외형적인 결과물이 ‘우연히’ 성공을 거둔 듯 보일지라도 이는 사사로운 욕심에서 출발한 것이므로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두 사람은 도덕적 동기가 중요한가, 세상에 보탬이 되는 결과가 중요한가를 두고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화제로 논쟁했다. 물론 결론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리도 치열하게 싸운 것일까? 진량은 당대의 현실이 답답했다. 금나라에 눌려 국력은 쪼그라들고 백성들의 삶은 고단하며 간신들이 조정을 더럽히고 있는 그 때에, 실질적인 대책 없이 그저 황제에게 마음을 수양할 것만 강조하는 유학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공리(功利)를 추구한다는 비판을 들으면서까지 결과를 중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량의 주장은 이익과 효용을 앞세워 도덕원칙을 무너뜨리고,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을 용인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 주희의 판단이다. 주희가 “기괴하다” “두렵다” “개탄스럽다” 는 말들까지 사용하며 진량을 공격한 것은 그래서였다.

약해진 국력에 조정 어지럽히는 간신 판치는 현실

그런데 이색적인 것은 이 주제에 대한 담판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상대방을 매우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서로에 대한 설득을 포기했음에도, 두 사람은 교류를 계속했다는 점이다. 진량의 동료들이 주희를 공격하고, 주희의 제자들이 진량을 배척하는 가운데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격려했다. 이러한 관계는 진량이 죽었을 때 주희가 진량의 묘비문을 써준 것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더라도, 상대방의 주장을 끝내 용인할 수 없더라도 서로를 존중하는 것, 정치에서 동기와 결과를 조화시키는 문제 못지않게 우리가 새겨야 할 부분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01호 (2019.09.16)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