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경제 갉아먹는 ‘대기업 규제 프레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생각하지 말라고 했으니 코끼리를 의식적으로 지우고 싶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머릿속에는 오히려 코끼리만 떠다닌다. 프레임 이론을 정립한 미국의 인지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라고 정의한다. 어떤 대상에 이런 정신적 구조물, 즉 프레임을 일단 씌우고 나면 디테일은 무시되고 선과 악의 이분법만 남게 된다. 그래서 정치인들에겐 프레임은 강력한 무기다.

‘규제’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일정 선을 넘나드는 ‘탐욕’스런 행위자가 있을 테고 이를 막으려는 ‘정의’로운 규제자가 떠오를 것이다. 이제 ‘대기업 규제’를 생각해보자. 몇 가지 사건이 연상되면서 ‘대기업’은 탐욕과 부패, 기득권, 편법승계 등을 자행하는 집단이 되고 이를 막는 ‘규제’는 정의가 된다. ‘크면 나쁘다’는 인식이 공고화될 것 같다. 이게 프레임이다.

이런 프레임이 성공적으로 정착되어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대기업집단규제란 것이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자산 등의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 도달하는 기업에만 적용되는 규제수가 47개 법령에 걸쳐 총 188개에 달한다. 가히 전방위 규제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 입장에서도 대기업은 되고 싶지 않다. 중소기업일 때 받았던 수많은 혜택을 버려가면서 스스로 규제해 달라고 나설 기업인이 어디 있을까. 적지 않은 기업이 시간이 지나도 어른이 되기보다는 여전히 어린이로 남고 싶어 하는 ‘피터팬 증후군’에 빠진 배경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대기업 비중은 크지 않다. 우리나라 기업 1만개 중 대기업은 9개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대기업 비중은 전체 기업의 0.0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34개국 중 33위로 최하위권이다. 1위는 스위스(0.82%)이고, 미국(0.62%)·뉴질랜드(0.50%)·독일(0.48%) 등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스위스의 국내총생산(GDP)은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이지만, 대기업 비중은 9배나 큰 수준이다. 우리 대기업은 국가경제 규모에 비해 턱없이 작다.

그런데 국내에선 대기업이더라도 막상 세계를 무대로 하면 중소기업이 되어 버린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은 매출액을 기준으로 글로벌 500대 기업 순위를 해마다 발표한다. 올해 국내 기업 중에서는 삼성전자가 15위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지난해 기준 2216억 달러로 직원 수가 31만 명이다. 세계 1위는 미국의 월마트다. 매출액이 5144억 달러이고 국내외 근로자는 220만 명이나 된다. 삼성전자보다 매출액은 약 2.3배, 직원 수는 7배 많은 수준이다. 월마트와 동종 업종으로 국내 최대 유통기업인 롯데쇼핑은 지난해와 올해 500위 안에 들지 못했다. 다른 대기업도 비교해 보자. 올해 처음 500위 진입에 성공한 LG화학의 매출액과 근로자 수는 화학 업종 세계 1위 듀퐁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국내 업종별 1, 2위 기업이니 그나마 이 정도 격차지 다른 국내 대기업들은 훨씬 격차가 큰 게 현실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규제 강도가 높은 금융업은 어떠한가? 국내 1위 KB금융그룹은 세계 1위 중국공상은행의 매출액의 5분의 1, 근로자 수는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2000년에만 해도 글로벌 500대 기업에 한국은 12개, 중국은 9개가 각각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올해 한국은 16개사, 중국은 무려 119개사(대만 포함 129개사)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졌다. LG화학(매출 256억 달러, 근로자 3만4000명), 듀퐁(860억달러, 9만8000명), KB금융그룹(290억 달러, 2만7000명), 중국공상은행(1690억 달러, 45만 명). 한국 대기업수가 제자리걸음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기업이 성장할 여유나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대기업 차별 규제도 모자라 규제는 계속 더해지고 있다. 법인세 인상도 가세하고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법인세를 인하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법인세를 인상하고 있다. 거기에 최저임금의 급속한 인상, 주52시간제 등 노동비용 부담이 커지고 있다. 글로벌 대기업들이 신성장동력에 투자를 하며 새로운 사업을 확장해나가는 동안 우리 대기업들은 규제의 족쇄에 묶여 있다. 설상가상으로 밖으로는 사상 초유의 무역전쟁이 진행 중이다.

최근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극일’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포춘 500대 기업에 든 일본 기업이 52개인데, 우리가 그 숫자를 넘어서는 게 진정한 극일이 아닐까 싶다. 1960년대 초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 소니 전광판이 처음 걸리고 2000년대 초반까지 소니는 타임스퀘어의 주인공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타임스퀘어에서도 가장 비싼 자리에 삼성의 신제품 쇼가 펼쳐진다. 뉴욕뿐만이 아니다.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나 파리의 콩코드광장 등 유럽 랜드마크에는 물론,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가면 공항에서부터 눈 닿는 곳마다 우리 대기업이 있다. 한일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지금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도 삼성전자의 ‘갤럭시 쇼케이스’를 볼 수 있다. 외국에 나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는 헷갈려 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우리 대기업들의 이름을 대면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최고급 호텔에 가면 TV와 에어콘 등 전자제품은 영락없이 삼성과 LG 제품이다. 대기업들이 곧 대한민국의 브랜드 이미지인 셈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대기업은 나쁘다고들 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시장을 갉아먹고,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10대 기업의 지난해 매출 3분의 2는 해외에서 나왔다. 삼성전자는 해외 매출 비중이 90%에 가깝다. 주요 기업의 해외 매출 비중은 계속 커지는 추세다. 그렇게 해외 매출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법인세를 낸다. 지난해 10대 기업의 법인세는 정부의 일자리 예산과 맞먹는 19조원이나 됐다. 일자리 예산을 아무리 투입해도 양질의 일자리를 충분하게 만들지 못한다.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좋은 일자리는 결국 대기업이 많이 만들어낸다.

다시 코끼리를 생각해보자. 이제 ‘대기업 규제’라고 하면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양질의 일자리, 국부창출 등의 기회를 빼앗아가는 나쁜 이미지가 떠올라야 한다. 세계 무대에서 뛰는 류현진, 손흥민, BTS는 응원하면서, 왜 월드 클래스로 성장할 수 있는 대기업들은 끌어내리려는 걸까. ‘프레임 전쟁’ 속에서 한국 경제가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두렵다.

-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

1504호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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