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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24) 문제민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심신 건강 관리에 사진만큼 좋은 취미가 없죠” 

 

가난한 집 수재로 독학으로 사진 익혀… 버킷 리스트는 자서전 출간

▎사진:전민규 기자
“심신의 건강 관리에 사진만큼 좋은 취미가 없습니다. 여기저기 출사를 다니다 보면 많이 걸어야 하고 예술 활동이다 보니 정신 건강에도 좋죠. 시니어들의 취미 활동으로는 최고예요.” 팔순을 바라보는 문제민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는 “더욱이 디지털 카메라가 나온 덕에 누구나 큰 돈 들이지 않고도 사진을 즐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세계에서 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국민일 겁니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좋아져 이제 어디를 가나 남녀노소 할 거 없이 폰을 들이대죠.” 그가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독학할 당시엔 필름 값에 현상·인화비용으로 돈이 꽤 들었다. 박봉에 빚을 내 100만원짜리 렌즈를 사들이고는 아내에게 10만원짜리 중고 렌즈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부인은 알고도 속아 주었다고 한다. 사진이 좋은 취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카메라를 접한 건 중학교 시절 남산에 올랐을 때였다. 나들이 온 아주머니들이 카메라를 건네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처음 만져보는 카메라. 설명하는 대로 난생 처음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가 지금도 그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는 공무원 출신이다. 17년 전인 2002년 법무부에서 부이사관으로 정년퇴직했다. 법무부장관 표창을 받았고 우수 공무원으로 뽑혀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퇴직 후 홍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고교 졸업 후 말단인 7급 공무원으로 시작했다. 교도소, 소년원 근무를 거쳐 인천, 강릉, 청주의 보호관찰소장을 지냈다. 뒤늦게 1980년대에 5년제였던 한국방송통신대를 나와 40대에 초등교육학사가 됐다. 제때 대학을 못 간 건 고2 때 걸린 폐결핵 때문이었다. 고3 내내 앓았다. 다행히 보건소 의사를 잘 만나 2년 만에 완치됐지만 대학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폐결핵으로 죽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군대도 못 갈 줄 알았는데 신체검사에 합격해 병역의 의무도 무사히 마쳤다.

투병 전 그는 가난한 집 수재였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전교 1등을 했고 3학년 땐 전라북도 웅변대회에 나가 1등상을 탔다. 도시락을 못 싸갈 만큼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서울대 사범대 진학이 목표인 교사 지망생이었다. 성적이 좋아 수업료를 면제해 주는 특대생으로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허울뿐이었다. 중 2 때 아버지가 장사를 하던 서울에 올라와 야간 중학교에 다니면서 고학을 했다. 서울 시내 다방을 돌며 케이스에 든 은단과 LP 레코드판 빽판(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불법으로 복제돼 유통되던 음반)을 팔았고 시장통에서 장사도 했다.

폐결핵 걸려 좌절된 교사의 꿈

교사를 꿈꾼 건 초등학교 시절 가끔 그에게 도시락을 내민 5~6학년 담임교사 강동희 선생님의 영향이었다. “일부러 도시락을 두 개 싸오셨어요. 나도 장차 커서 저런 선생님이 되겠다고 마음먹었죠. 병고 탓에 그 꿈에서 멀어졌죠.” 가슴에 묻어두었던 교사의 꿈을 그는 사진 강사로 강단에 서 이뤘다. 정년퇴직 후 한달가량 집에서 쉬었을 때의 일이다. 40여 년 공직에 있었는데 만나자는 사람도,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우울했다. 퇴직한 남편 탓에 마음 놓고 외출을 못하는 아내도 힘들어 했다. 방에만 있다 보니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카락을 줍다 집에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청주대 평생교육원에서 디지털카메라반 강의를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아내가 더 반겼다. 이듬해엔 양천구청 평생교육센터의 요청으로 초급반, 중급반, 사진작품연구반을 만들어 17년째 디지털카메라 강의를 하고 있다. 양천구 디지털사진가협회장도 지냈다. “요즘은 집사람이 건강을 위해 이제 그만 나다니라고 하는데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활동을 하겠다고 합니다. 퇴직 후에도 밖으로 나가야 돼요. 풍경 사진을 찍으면 산으로 들로 나가야 하고, 외국으로 출사 여행도 다닙니다.”

교육자가 꿈이었던 그가 교육 쪽 일을 권해 함께 사는 아들도 학원을 한다. “며느리도 사진 잘 찍고 강의도 한다고 나더러 최고의 시아버지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에게서 디지털 카메라를 배운 제자는 3000여 명에 이른다. 대부분 시니어들이다. 이들 중엔 전국의 유명 사진작품 공모전에서 대상, 금상, 은상을 받은 사람이 여럿 있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진작가도 다수 나왔다. 출사 여행도 많이 다녔다. 한겨울 수강자 서른 명과 전북 무주의 덕유산으로 출사를 떠났을 때의 일이다. 영하 20도의 추위에 산에 올라 설경을 찍는데 수강자 한 사람이 눈구덩이에 빠졌다.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큰일이 날 뻔했다. 중국 네이멍구자치구의 바단지린사막으로 열다섯 명이 출사를 갔을 땐 오아시스를 만나 서로 물싸움을 하는 추억을 남겼다. 바단지린의 오아시스는 나무가 우거진 곳이 아니었다. 물도 사람이 사는 집에서 펌프로 끌어올려 조금씩 나오는 것이었다.

그의 사진 강의는 재미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노하우는 칭찬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습니까? 나의 작은 격려가 수강자들에게 큰 희망과 자신감을 갖게 하더라고요. 감사 인사를 받다 보니 나도 어려움을 이기고 강의를 지속하게 됩니다.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는 제자들을 보는 것 자체가 행복이죠.”

공무원 시절 비행 청소년과 그 부모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할 때도 칭찬이 주무기였다. “호통을 치거나 질책을 하기보다 진심을 담아 장점을 칭찬하면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는 문제 청소년 뒤에는 대부분 문제적 부모들이 있다고 말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더라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아이들을 대해야 그 나이에 있을 수 있는 탈선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사진을 본격적으로 독학하게 된 것도 소년원에 근무할 때였다. 말단 공무원 시절 전직시험을 치러 입직 1년 만에 교도소에서 소년원으로 옮겼는데 과장이 사진 업무를 맡겼다. 소년원 아이들의 증명사진을 찍어 소년원 내 암실에서 현상까지 해야 했다. 알아보니 소년원에 있는 400~500명의 원생 중 의외로 사진에 대해 잘 아는 아이들이 많았다. 교학상장이라고 이들을 가르치면서 이들에게서 배운 셈이다.

문 이사는 사진작가협회에서 4년째 교육전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1990년 이래 이 협회의 정회원으로 활동 중인데 2003년 이래 전국사진강좌 담임강사로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는 다수의 사진작가협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단체로 전국적으로 약 1만3000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그는 예비 회원들을 대상으로 소정의 교육을 실시하고 해당 과정을 이수한 사람을 회원으로 등록시키는 일을 한다.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 기관장으로 퇴직


▎사진:전민규 기자
그는 환경처 주최 전국사진작품공모전(1993년) 금상을 비롯해 다수의 사진공모전에 참가해 40여 회 입상 및 입선을 했다. [디지털 사진과 함께하는 삶, 건강한 삶], [비행 방지를 위한 자녀 지도법] 등 다섯 권의 책도 냈다. 그중 [자녀들의 비행원인과 예방대책]은 일본책을 번역한 것이다. 일본어도 일본책으로 사진을 공부하느라 독학을 했다. 명동의 외국 책방을 뒤져 찾은 일본책을 읽느라 4~5년 일어 공부를 하다 보니 법무부 산하 소년원 근무자 중 일어를 가장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친 김에 한국외국어대에서 6개월간 일어 단기 연수를 받은 후 시험을 치러 일본 법무성으로 6개월 업무 연수를 떠났다. 일본의 보호관찰제도를 연구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일과 후면 도쿄의 책방을 뒤졌다. 국내에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기 전 디카에 관한 책을 사들였다. 이렇게 사서 읽은 책들이 나중에 그의 사진 강의안의 소스가 됐다.

2012년에 낸 [디지털 사진과 함께하는 삶, 건강한 삶]은 칠순을 맞아 제자들이 찍은 풍경 사진 500점도 함께 수록한 사진집이다. 그가 개설한 인터넷 카페 ‘디지털 사진과 제비콩’에 제자들이 올린 사진이다. 그는 이들 사진에 꾸준히 댓글 품평을 달았고 이 댓글도 사진집에 그대로 실었다. 220여 명의 제자들과 출판기념회도 열었다. 제비콩은 그가 사용하는 닉네임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제민이라는 이름에서 제비를 연상해 붙여준 별명이다. 2002년 개설한 카페 ‘디지털 사진과 제비콩’ 회원은 무려 1161명이다. “풍경 사진은 구도의 비중이 70%입니다. 수평·수직 등 구도법이 한 서른 가지 되는데 회화 쪽에서 수백 년에 걸쳐 축적한 경험을 원용한 것이죠.”

그는 가로·세로를 각각 3등분해 하늘, 산, 건물 등의 풍경 요소를 배치하는 황금분할법을 활용하면 스마트폰으로도 풍경 사진을 무난히 찍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인물 사진을 찍을 땐 아래서 위 방향으로 찍어야 얼굴은 작고 다리는 길어 보인다고 귀띔했다. “꽃을 찍을 땐 배경을 단순화해야 합니다. 이런 사진을 제대로 찍으려면 스마트폰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때로는 수강자들에게 폰으로 찍지 말라고까지 합니다.”

사진이 좋은 점은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익히려면 9개월은 투자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디지털 카메라를 살 때도 6개월쯤 사진을 공부한 후 자기 취향에 맞는 걸 고르는 게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가 보유한 스웨덴산 하셀블라드는 2000만원짜리다.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가져갔던 명품 브랜드다.

그는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 동기동창 50명가량을 찾아내 동창회를 만든 후 초대 회장을 지냈다. 바쁜 공무원 생활 하랴 출사 다니랴 자주 못 만나던 친구들과 활발하게 교류한다. “그 시절 공부를 잘 못했지만 성공한 친구도 있고 공부를 좀 했기에 공무원이나 교사가 된 친구들도 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잘된 친구가 부럽진 않습니다.”

공무원 연금 외에도 강의료 수입이 꽤 되는 그로서는 부러울 이유가 없다. 전국구 강사인 그는 울산, 대구, 전주 등에도 사진 강의를 하러 다닌다. 강의료가 후한 건 아니지만 그는 수강자들에게 돈을 잘 쓰는 편이다. “곳간에서 인심 나는 격이죠. 그래서인지 수강자들 사이에서 기분파로 통합니다.”

좌우명은 ‘먼저 사람이 되어라’

공무원 시절 이래 좌우명은 ‘먼저 사람이 되어라’이다. “모름지기 인사성이 밝고 친구 사이에도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남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지 말아야죠. 자기 주장만 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꼰대 소리를 듣지 않는 지름길이죠. 나는 보호관찰관 시절 상담을 할 때도 80%는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지시적 상담은 별 효과 없어요. 경청을 하면 상담을 받는 피상담자가 마음을 열고 얘기하다 문제의 해결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요.” 그런 그도 자식 교육은 맘대로 되지 않더라고 말했다. “큰아들이 고3 때 나더러 그러더군요. 아버지는 법무부에서 이름난 상담가라면서 왜 자식 상담은 그렇게 못하나요? 자식은 칭찬 요법도 잘 안 통하고 희한하게도 별로 칭찬을 하고 싶지도 않더라고요.”

그의 버킷 리스트는 자서전이다. “이제 내 인생에 더 추가할 것도 없으니 자손들을 위해 기록을 남겨 보려고요. 참 파란만장하게 살았습니다. 일관성과 끈기로 버텼죠. 돌이켜보면 세월이 화살 같아요.”

1505호 (201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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