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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초 위기의 중형 조선사] 3년 새 수주 80% 넘게 급감 

 

선박 수주 필수조건인 선수금환급보증 발급 막혀… “결국 대형 조선사에도 악영향” 지적

▎경남 통영시에 있는 성동조선해양 작업장이 텅 비어 있다. / 사진:연합뉴스
국내 조선산업 허리 격인 중형 조선사의 항로가 안갯속이다. 국내 5대 중형 조선사인 성동조선해양·한진중공업·STX조선해양·대선조선·대한조선 모두 선박 수주가 마르면서 고사 위기에 처했다. 청산 위기에 몰렸던 성동조선이 4수 끝에 겨우 주인을 찾았지만,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HSG중공업·큐리어스 컨소시엄은 당분간 선박 건조 계획이 없다. 한진중공업은 특수선 전문사로 쪼그라들었고, STX조선과 대선조선은 유동성 위기에 몰렸다. 대한조선마저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해양 인수로 ‘홀로서기’를 앞두고 있어 위기는 심화할 전망이다.

중형 조선사 점유율 17.7%→3.4%


국내 중형 조선사에는 일감이 없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3분기 국내 중형 조선사들의 수주량은 12만 CGT(건조 난이도 등을 고려한 수정 환산톤수), 5척 규모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24.7% 줄었다. 일감을 따낸 곳은 3곳으로 대한조선이 아프라막스급 탱커 2척, STX조선해양이 MR탱커 2척, 대선조선이 연안여객선 1척을 수주했다. 올해 들어 3분기 누적 수주량은 17척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8척보다 더 줄었다. 3년 전인 2016년 120척과 비교하면 80% 이상 줄어든 수치다. 조선업이 활황이었던 2007년 세계 중형 선박 생산의 17.7%를 담당했던 한국 중형 조선업계 수주점유율 역시 지난 9월말 기준 3.4%로 떨어졌다.

국내 전체 조선업 대비 중형 조선업 비중도 줄었다. 지난해 중형 조선사들의 수주액은 전체 조선업의 4.5%에 그쳤다. 중형 선박 수주액 비중이 전체의 약 30% 수준(27.5%)까지 올라갔던 2007년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한국의 빅3 조선소가 세계 선박 시장에서 지난해 다시 수주량 1위를 기록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조선업에서도 양극화가 뚜렷해진 것이다. 국내 5대 중형 조선사 외 SPP조선, 한국야나세, 연수중공업, 마스텍중공업, 삼강S&C 등 중형 조선사들도 수주 ‘제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형 조선사의 위기는 선수금환급보증(RG) 미발급 탓이 크다는 분석이다. RG는 조선사가 선주로부터 선수금을 받기 위해 필요한 금융사 보증으로, 자본력이 약한 중형 조선사에는 선박 수주 계약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중형 조선사에 대한 RG 발급이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시중은행은 조선업 불황을 들어 사실상 RG 발급을 중단했고, 국책은행마저 제한적 RG 발급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STX조선이 수주한 선박 건조 계약 7건이 RG 미발급으로 취소되기도 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살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일을 따올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조선업 활력 제고 방안을 내놨지만 영세 업체를 지원하는 데 그쳤다. 중형 조선사 각각에 대한 신용평가 후 신용등급 A+ 조선사에 대해 최대 70억원 지원 방침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중형 조선사가 수주하는 탱커는 주로 재화중량톤수(DWT) 기준 5만DWT급으로 선가만 약 400억원 규모다. 통상적으로 일반 상선을 건조하는 조선소는 선가의 최소 40% 수준인 160억원가량 RG 발급을 받아야 수주할 수 있다. 70억원 RG 발급 지원으로는 중형 선박 1척 수주도 어렵다. 조선산업협회 한 관계자는 “정부는 전시행정만 지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국내 중소 조선 업계에는 신용등급 A+를 받을 수 있는 중형 조선사가 없다. 한진중공업은 완전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지난 1월 기업회생을 신청했다. 완전 자본잠식은 자본금을 모두 소진해 회사에 빚만 남은 상태를 뜻한다. 대선조선은 선박 건조 후 인도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협력사 결제대금 지급을 미루고 있다. STX조선도 조만간 산업은행에 자금 지원을 공식 요청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성동조선은 지난 3차 매각 무산 이후 올해 말까지 매각이 완료되지 않으면 청산 절차로 넘어간다는 변경 회생계획안을 인가받은 상태였다.

중국과 일본 조선 업계의 성장도 국내 중형 조선사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중국은 정부 차원의 강력한 금융 지원을 바탕으로, 일본은 아베 정부 출범 이후 엔저 정책을 무기로 한국의 빈자리를 빠르게 채우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중형 조선사 통폐합 등 큰 그림 없이 비핵심자산 매각과 감원 등 미봉책만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근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를 찾은 성동조선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성동조선은 신조 없이 블록 제작 위주로 운영될 전망이다. 성동조선은 야드 유지·관리에 필수적인 100여 명을 제외한 600여 명이 2017년부터 무급휴직 중이다.

지난 8월까지 꾸준히 거론됐던 중형 조선사 통폐합설도 사라졌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주채권은행을 맡고 있는 5개 중형 조선사를 중심으로 통합 중형 조선사 설립을 정부가 추진한다는 이야기였지만, 소문만 돌고 실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양종서 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해양 인수 사례를 보면 현대중공업이 합병 추진 과정부터 주도권을 쥐고 산업은행와 조율하며 문제를 풀어나갔지만, 중형 조선소 중에는 이런 역할을 할 재무상태를 지닌 업체가 없다”며 “RG 발급으로 일감을 갖추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조선 업계 전문가들은 조선업이 대표적인 노동집약 산업이라는 점에서 중형 조선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00% 주문 제작으로 이뤄지는 선박 건조에서 설계 자원이 머물 수 있는 토양을 중형 조선사가 마련하기 때문이다. 조선업계 한 전문가는 “연구개발(R&D)을 따로 하지 않는 중형 조선사 특성상 설계전문사가 붙을 수밖에 없고 설계전문사는 국내 조선업이 설계 전문인력을 유지하는 방안으로 꼽혀왔다”면서 “중형 조선사와 설계전문사가 줄면 노동집약 산업인 조선업에 인력이 남지 않을 뿐 아니라 유입도 감소해 기반 자체가 약해진다”고 했다.

중국과 일본에 산업 주도권을 내주지 않으려면 중형 조선사도 중요하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이 지난해 12월 내놓은 ‘중소 조선산업의 중요성과 발전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중형 조선사의 위기는 조선업 전체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은 “중형 조선산업은 우리나라 조선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좌우할 만큼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한국이 이를 포기하면 경쟁국은 중형 시장 장악에 그치지 않고 여기서 획득한 수익을 재투자해 고부가 대형 시장에 끊임없이 도전할 것이며 이미 그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컨트롤타워 설치 검토만

정부는 지난 1월부터 RG 발급을 위한 컨트롤타워 설치를 검토 중이다. 다만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에 RG 발급 심사위원회를 두고 금융당국이 RG 발급을 하도록 지원한다는 방침만 나온 데 그쳤다. 김영훈 교수는 “시중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 당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중형 조선사가 문을 잇따라 닫기 시작하자 RG 발급을 멈췄다”면서 “RG 발급 중단은 다시 중형 조선사가 일감을 잃는 악순환으로 이어져 2008년 27곳에 달했던 중형 조선사의 63%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보다 적극적인 중형 조선사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배동주 기자 bae.dongju@joongang.co.kr

1513호 (2019.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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