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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13) 대마도주와 계해약조 맺은 조선의 이예] 오랜 지식·경험으로 전문성·업무 연속성 갖춰 

 

대마도 재정·군사상태, 주요 인물 가족상황까지 파악... 정보전에서도 탁월한 능력 발휘

▎사진:김회룡
1443년 조선은 대마도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했다. 대마도가 통교(通交)를 허락해달라고 간청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조선이 갑의 위치에서 을인 대마도에게 시혜를 베푼 것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조선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왜구의 침입을 저지하고, 왜구에게 붙잡혀간 조선인 포로를 귀환시키며, 조선에 입경하는 왜인들의 수를 적절한 수준에서 통제해야 하는 삼중의 과제를 안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대마도의 도움이 필요했다.

먼저 왜구의 침입 문제를 살펴보자. 대마도를 근거지로 하는 왜구가 한반도의 해안지방을 노략질한 역사는 오래됐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한번에 500여 척의 왜선이 쳐들어오는 등 규모가 커졌고, 남해안뿐 아니라 충청도·황해도까지 북상하는 등 침략 범위도 확대됐다. 이에 1419년(세종 1년) 조선은 상왕 태종의 명령에 따라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다. 수세적인 방어에서 벗어나 선제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화근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왜구 대응에서 대마도 도움 긴요

이 같은 정벌은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왜선 129척을 불태우고 수많은 포로들을 구출했다. 대마도주의 공식적인 항복을 받지 못했고 작전 실패로 조선 병사 180명이 전사하는 등의 한계도 있었지만 언제든 대마도를 응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과시함으로써 왜구를 움츠려들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을 계속 심어주지 못한다면 공포는 머지않아 사그라지게 마련이다. 하물며 정기적으로 정벌에 나설 수도 없는 노릇. 조선은 대마도주를 통해 왜구를 단속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왜구에게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을 돌려받는 것, 이를 ‘피로인(被擄人) 쇄환(刷還)’이라고 불렀는데, 이 사안 역시 대마도의 통치자 대마도주의 협조를 받아야 가능했다.

따라서 조선은 무역의 기회를 확대해달라는(대마도는 곡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특히 쌀에 대한 요청이 많았다) 대마도주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부산에는 조선과 무역을 하겠다며 건너와 체류하고 있는 왜인이 평균 1000여 명에 달했고 세종 재위 중반기에 이르면 3000명에 육박하기도 했다. 이는 경제적으로도 조선에 큰 부담이었을 뿐 아니라 치안상으로도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제로 이들을 추방하거나 입국을 금지하게 되면 왜구들과 같이 군사적 변란을 일으킬 확률이 높았다. 왜구 단속, 피로인 쇄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마도주에게 당근을 줘야 하는 상황과도 충돌한다.

이때 조선의 고민을 해결한 인물이 이예(李藝, 1373~1445)다. 원래 경상도 울주 고을의 아전이었던 이예는 상관인 지울 주군사 이은이 왜군에게 납치되어 대마도로 끌려가자 자진해 뒤따라가서 갖은 노력 끝에 이은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공으로 신분이 상승되고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이예는 13차례(40여 차례로 알려져 있지만 분명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13번)에 걸쳐 대일본 외교사절로 활동했다. 태종 1년 보빙사로 대마도에 건너가 피로인 50명을 쇄환해온 이래 태종과 세종 대에 걸쳐 모두 667명의 피로인을 구출한다. 왜구의 단속을 엄중하게 요구하고 왜의 정보를 수집하며 무역 관련 협상도 담당했다.

이러한 역할은 그가 당상관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는데 문인(文引)제도를 정착시키는 일도 맡았다. 문인이란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도항증명서로 요즘으로 말하면 비자에 해당한다. 조선은 대마도주가 발행한 문인을 가지고 와야지만 교역을 허락함으로써 대마도주에게 무역에 관한 통제권을 부여해주었다. 이 통제권은 예외 적용 대상이 많긴 했지만 대마도뿐 아니라 일본 전체에 해당한다. 대마도주의 자국 내 위상을 강화시켜준 것이다. 그리고 1443년, 앞서 소개한 계해약조에서는 대마도주가 연간 50척의 세견선(歲遣船, 무역선)을 보낼 수 있도록 허가해주었다. 무역량을 제한한 것이기는 하지만 무역을 정례화하고 또 그 권리를 대마도주에게 몰아줌으로써 대마도주의 이익을 충족시켜주었다. 대신 조선은 ▶조선을 침입한 왜구를 체포해오고 ▶피로인을 쇄환하며 ▶대마도주가 자체적으로 대마도내 왜구를 엄중 단속하는 결과를 얻어낸다. 이후 왜구의 침략은 현저하게 감소했는데 바로 계해약조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이예는 대마도로 직접 건너가 대마도주와 담판, 협상을 성공시킨 핵심 주역이었다.

안타깝게도 이예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담판을 벌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예가 어떻게 담판을 성공시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추정해볼 수 있다. 우선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전문성이다. 이예는 하급 관리 시절부터 당상관에 오를 때까지 대일본 외교 업무를 담당했다. 13차례에 걸쳐 대마도, 혹은 일본 본토로 직접 건너가 외교 최일선에서 활동한 바 있다. 조선에서 중국 사신이나 일본 사신으로 두번 이상가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음을 생각할 때 업무 연속성, 전문성이라는 측면에서 남다른 역량을 구축했을 것이다. 이는 세종이 이예를 대마도로 파견하며 “이 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을 보낼 수가 없어서 그대를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하지 말라”(세종 8년 2월 12일)라고 당부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이예 또한 “신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섬에 출입하여 이 섬의 사람과 사정을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신이 가면 저 섬의 사람들이 기꺼이 만나볼 것이며 누가 감히 사실을 숨기겠습니까?” (세종25년 6월 22일)라고 말한다.

관직생활 내내 대일외교 담당

이와 같은 오랜 경험과 지식 축적을 바탕으로 이예는 정보전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예컨대 규슈에서 내전이 발발하자마자 이 소식을 신속히 입수했는데, 방대하고 촘촘한 휴민트를 가동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마도에 대해서는 재정 및 군사상태, 주요 인물들의 가족상황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흔히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는가? 상대편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담판에 나섰으니 실패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무릇 담판의 결과는 담판장에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빈틈없는 준비가 전제되어야 한다. 책임자를 비롯하여 실무자들의 전문성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런데 담당자가 자주 바뀌게 되면 해당 사안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상대방과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신뢰를 구축하는 일도 불가능해진다. 어떤 협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담당자가 바뀌고, 협상 내용 또한 리셋되는 일은 오늘날 통상·외교에서도 드물지가 않다. 그러니 직급이 올라갔다고 해서, 이 업무를 맡은 지 몇 년이 지났다고 해서 다른 부서로 보낼 것이 아니다. 관직생활 내내 대일 외교를 전담함으로써 훌륭한 성과를 낸 이예처럼, 해당 업무의 최고의 전문성을 갖출 수 있도록 육성해야 한다. 그런 전문가를 담판에 내보낼 수 있다면 담판의 결과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14호 (2019.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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