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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음원 사재기의 본질] 밤 10시, 의심스런 음원차트 실시간 급상승 

 

수천명이 특정 음악 반복해 듣는 기현상... 과열, 부정 조장하는 실시간 차트 폐지해야

파장은 거셌다. 아이돌 그룹 블락비 멤버 박경의 한마디에 가요계가 들썩거렸다. 그는 지난해 11월 자신의 소셜미디어네트워크서비스(SNS)에 “바이브처럼 송하예처럼 임재현처럼 전상근처럼 장덕철처럼 황인욱처럼 사재기 좀 하고 싶다”라는 글을 올렸다. 거론한 가수들이 사재기로 실시간 음원차트 상위권에 든 것 같다고 빈정댄 것이다.

사재기에 대한 의혹의 시선은 이미 널리 퍼져 있음에도 항상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경의 글이 광범위한 공론화에 물꼬를 틀었다. 얼마 뒤 성시경, 인디밴드 술탄오브더디스코가 음원 사재기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래퍼 마미손은 음원 사재기를 했다고 생각하는 가수를 비판한 노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를 발표했다.

실시간 차트 입성은 무명가수의 신분상승 기회

사재기는 바이럴 마케팅과 불과분의 관계다. 음원 사재기 의혹을 받는 가수들은 하나같이 바이럴 마케팅만 했을 뿐이라고 얘기한다. 이와 함께 꼼수나 불법 행위는 결코 없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늘 이런 식이다. 과연 그럴까?

정확히 말하면 가수가 홍보에 활용하는 SNS 계정은 바이럴 마케팅에 특화된 ‘스텔스 마케팅’이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비행기의 이름을 딴 명칭이 귀띔하듯 소비자가 광고임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천연덕스럽게 상품을 홍보하는 것을 일컫는다. 노래에 대한 스텔스 마케팅을 전문으로 하는 계정은 ‘너에게만 들려주는 음악’, ‘요즘 핫하다는 노래 동영상’ 이렇게 대중이 솔깃해할 간판을 달아 네티즌을 끌어모은다. ‘정말 좋은데 소속사가 일을 제대로 못해서 묻힌 노래’, ‘요즘 뜨는 중’, ‘역대급 명곡’ 등의 호들갑스럽고 과장된 표현으로 청취를 유도하기도 한다.

여기서 수상한 점이 발견된다. 사재기로 의심되는 노래들은 꼭 오후 9시, 10시를 넘긴 심야에 실시간 차트에서 상승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음악 청취 인구가 대체로 감소하는 시간대다. 다른 가수들은 보통 이맘 때 하향 곡선을 그린다. 완전히 상반되는 패턴이다.

의심 받는 가수들은 홍보를 하는 SNS 계정이 밤에 노래를 소개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변론한다.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말이다. 아무리 구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고 한들, 구독자가 계정 운영자의 말을 충성스럽게 따랐다고 한들 수백, 수천 명이 일제히 동일한 시간에 한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일은 흔치 않다. 스마트폰 수백 대를 두고 특정 음악을 계속해서 돌리는 특수한 작업에 의심의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수들은 왜 이런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실시간 차트 상위권에 진입하려고 하는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인지도가 높을수록 활동의 기회가 늘어나는 연예계 생리를 꼽을 수 있다. 지상파, 케이블을 불문하고 음악방송은 죄다 아이돌 그룹이나 유명 기획사에 속한 가수가 꿰찬다. 소속사의 힘이 약하거나 혼자서 홍보까지 책임져야 하는 무명의 가수에게 방송 출연은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일단 실시간 차트 상위권에 올라서 소문을 타게 되면 방송 출연 요청이 자동으로 들어온다. 대학교 축제, 지역 축제 등의 행사 섭외도 잇따른다.

안타깝게도 실시간 차트는 모든 가수를 품는 은혜로운 낙원이 아니다. 이곳은 딱 100팀만 받는다. 숫자가 한정돼 있으니 연일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더구나 수많은 팬을 보유한 아이돌 그룹, 혹은 중견 뮤지션, 시청률 높은 드라마 OST,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아니면 발붙이기가 매우 어렵다. 이러한 까닭에 입신양명에 뜻을 둔 가수들은 사재기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조작을 통해 100위 안에만 진입하고 나면 추진력이 붙는다. 싱글 발표의 보편화로 음반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터라 일일이 노래를 찾아 듣기가 쉽지 않은 음악팬들은 실시간 차트로 음악을 감상하며 트렌드를 파악한다. 실시간 차트가 지금 인기를 끄는 노래를 추려 놓은 리스트이니 음원사이트 이용자는 이를 ‘다수의 평균 취향’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특히 신선한 느낌이 나면서도 여러 사람이 듣기에 무난한 배경음악이 필요한 영업장에서는 실시간 차트에 있는 노래를 영업시간 내내 틀어 놓는다. 이제는 기계가 아닌 진짜 사람이 순위 상승에 힘을 보태 주는 것이다.

사재기 논란이 거듭돼 온 탓에 존재조차 몰랐던 무명 가수의 노래가 갑자기 실시간 차트에서 치고 올라오면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하지만 괜찮다. 가수에게는 안티팬도 잠재적 고객이며, 비난도 자산이다. 이런저런 말이 많아서 한번 들어 봤는데 자기 기호에 맞아서 즐겨 듣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차피 어떤 음악인이든, 어떤 작품이든 대중의 호불호는 갈린다. 대형 가수들에 무력하게 밀리느니 주목받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한 가수는 부정과 손을 잡는다.

디지털 음원사이트 ‘빅3’, 음원 유통 겸해

현재 디지털 음원 시장에는 사재기를 부추기는 요인이 하나 더 존재한다. 국내 음원 서비스 플랫폼 중 이른바 ‘빅3’로 통하는 멜론, 벅스, 지니뮤직은 음원 유통도 겸하고 있다. 이 음원사이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자사에서 유통하는 음반을 메인 화면에 먼저 배치하곤 한다. 또한 해당 음원사이트의 전용 플레이어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서 최신 음악 카테고리를 열람했을 때 다른 신곡이 여럿 출시됐음에도 자사에서 유통하는 음악이 여전히 상단에 위치한다. 이 관행 역시 대형 유통망과 계약하지 못한 아티스트한테는 또 다른 장벽이다. 하루 수십에서 100편 넘는 음반이 쏟아져 나오는 복잡한 시장에서 음원사이트가 마련해 둔 진열대에 놓이지 않으면 사실상 관심을 받을 수 없다. 여기에서 발생한 패배감이 그릇된 방법에 눈을 돌리게 한다.

최근 크게 불거진 사재기 문제는 가요계 전반 상황과 디지털 시장의 폐해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아이돌 가수를 우대하는 기형적 쏠림 현상, 비주류 가수가 설 수 있는 무대의 부족이 음원 시장에서 빛을 보려는 난민을 양산했다. 젊은 세대의 유행에 민감한 보편적 습성은 실시간 차트의 위상을 더욱 막강하게 해 줬다. 이로써 무명 가수들이 실시간 차트에 집착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게 됐다.

미심쩍은 실시간 차트 진입 작품이 많아지면서 가요계가 부쩍 혼탁해졌다. 음악팬의 불신은 날로 퍼지고 있다.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신의 음악을 알아줄 것이라 믿으며 지조를 지키는 뮤지션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이러한 피해를 속히 줄이기 위해서는 과열된 경쟁과 부정행위를 조장하는 실시간 차트를 폐지해야 한다. 작금의 국면은 음원사이트에 바람직하고 용기 있는 결정을 요구하고 있다.

- 한동윤 대중음악평론가

1520호 (20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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