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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먼 중동평화] 트럼프는 왜 이스라엘 편을 들었을까 

 

유대인 정착촌은 국제법에 어긋난다던 미국, 41년 만에 입장 뒤집어… 표심 잡기 위한 ‘정치쇼’ 비판

▎사진:AP=연합뉴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월 28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위한 중동평화 방안을 제시했지만 이스라엘과 더불어 한쪽 당사자인 팔레스타인 측의 강력한 반발로 시행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앞으로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어떻게 되고 중동지역은 평화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영국의 BBC와 일간 가디언, 독일의 국제방송인 도이체벨레(DW), AP·AFP·로이터 등 다양한 국제 뉴스원을 참고해 중동평화 방안을 분석하고 향후 사태 전개를 예측해본다.

먼저 평화안을 따져보자. 트럼프의 구상은 요르단강 서안의 이스라엘 정착촌에 대해 이스라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팔레스타인이 남은 지역과 가자지구 등에서 독립국가를 건설하도록 했다. 팔레스타인 국가는 동예루살렘의 일부를 수도로 삼도록 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앞으로 4년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국가 건설 협상을 하는 동안 요르단강 서안에 더는 새 정착촌을 건설하지 않도록 했다. 트럼프는 팔레스타인이 국가를 건설하고 해외에 대사관을 개설하는 데 500억 달러의 국제 금융을 제공하기로 했다. 아울러 서로 연결되지 않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도로와 교량, 터널로 연결하기로 했다. 이스라엘 땅인 서부 네게브 사막의 일부에 산업단지와 농장을 건설해 팔레스타인 측에 제공하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마무드 아바스 수반 없이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와 나란히 발표한 중동평화 구상은 대놓고 이스라엘을 편들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있는 이스라엘 정착촌에 대한 이스라엘 주권을 인정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정착촌은 이스라엘 점령 정책의 상징이며, 팔레스타인인이겐 수모와 영토 잠식, 주권유린의 증거다. 요르단강 서안은 가자지구와 함께 1947년 유엔 결의로 팔레스타인 국가가 들어서기로 예정된 지역이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직후 발발한 제1차 중동 전쟁(이스라엘 독립전쟁)에서 요르단강 서안은 요르단이,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점령했다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 때 이스라엘이 대승하면서 이곳을 점령했다.

이스라엘군 장교 출신으로 영국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의 전쟁학 교수로 [6일 전쟁 50년의 점령]의 저자인 아론 브레크먼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첫째 군사력과 물리력, 둘째 각종 인허가권을 비롯한 법과 행정 규제, 셋째 토지와 물과 같은 자원의 통제라는 강압 통치를 무기로 점령을 계속했다. 이스라엘 국민도 아니고 자신들을 지켜줄 나라도 없는 상태에서 점령 당국으로부터 탄압받고 희생된 팔레스타인 주민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이스라엘은 물론 서구에 대한 아랍인의 불신과 분노를 낳았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정착촌을 늘려왔다. 가자지구에서는 주민들의 시위와 총격 등으로 2000년 8월 유대인 정착촌을 모두 철수했지만 펠라스타인 자치지구인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에는 약 70만 명의 이스라엘인 정착촌을 건설해 거주하고 있다.

트럼프, 재선 앞두고 미국 기존 노선 뒤집어

주목할 점은 정착촌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다. 미국은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인 1978년 제정한 법률을 바탕으로 정착촌은 국제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마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요르단강 서안의 유대인 정착촌이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더 이상 간주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시 폼페이오 장관은 미국의 입장을 41년 만에 뒤집으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할 중동평화방안의 근거를 만들어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 방안을 준비해왔다는 이야기다. 트럼프의 방안에 팔레스타인 당국은 펄쩍 뛰었다. 가자지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무장정파 하마스는 물론 아바스 자치정부 수반이 이끄는 정당인 파타도 트럼프의 중동평화 구상을 거부했다.

트럼프의 중동평화 구상 발표에도 팔레스타인 분쟁은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에겐 도움이 될 수 있다. 네타냐후는 현재 정치적으로 사면초가 상태다. 우선 두 차례의 총선으로도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의석을 얻은 정당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세 번째 선거를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 이스라엘 검찰은 ‘살아있는 권력’인 네타냐후를 부패 혐의로 수사하고 있다. 트럼프가 들고 온 중동평화 구상은 이런 네타냐후를 상황을 반전시킬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팔레스타인이 거부하고 시위와 폭력으로 맞설 경우 이스라엘과 중동 정세는 불안해지겠지만 네탸냐후는 오히려 강경 유권자의 표를 모을 수 있다. 오는 11월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하는 트럼프로서도 이미지와 유대인 표와 정치자금 흡수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어차피 중동평화 구상 자체가 평화정착을 위한 진심을 담았다기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과 일정을 감안한 ‘정치쇼’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팔레스타인 분쟁의 근원을 살펴보자. 팔레스타인 분쟁은 유대인들이 1948년 영국 위임통치령이던 요르단강 서쪽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땅을 잃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대항하면서 시작됐다. 요르단강 동쪽의 트란스요르단과 서쪽의 시스요르단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전까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영토였으나 튀르크의 패전으로 영국에 넘어갔다. 트란스요르단에선 과거 메카를 지배하다 1차대전 중 영국에 협력했던 하심 가문이 1946년 요르단 왕국을 세워 독립했다. 요르단강 동쪽에서 지중해까지를 이르는 시스요르단은 팔레스타인으로도 불렸는데 1947년 11월 29일 유엔총회 결의안 제181호로 이 지역의 아랍인 국가(팔레스타인)과 유대인 국가(이스라엘),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분할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결국 1945년 3월 22일 알렉산드리아 의정서를 바탕으로 발족한 아랍연맹의 지원을 받은 팔레스타인 해방군은 유대인 민병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했다.

오슬로 합의에도 불구, 관계 삐걱 추가 협상 난항


결국 유대인들은 1948년 5월 14일(유대 헤브루 달력 기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집트·시리아·요르단 등 주변 아랍 국가들은 일제 공격으로 응답했다. 이스라엘 독립전쟁, 또는 제1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무력충돌이다. 이스라엘은 1956년 영국·프랑스 주도의 수에즈동란(제2차 중동전쟁)을 거쳐 1967년 6일전쟁(제3차 중동전쟁)에선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 6일간 요르단강 서안지역과 가자지구, 동예루살렘 등 팔레스타인 몫의 땅은 물론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까지 점령했다. 1973년 소련의 최신무기로 무장한 아랍의 보복 기습공격으로 욤 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이 벌어져 한때 밀렸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팔레스타인 측은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1929~2004년, 1996~2004년 의장)이 이끄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서구를 상대로 항공기 납치, 총기 난사 등 테러를 계속 벌였다.

힘만으론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에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에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고 평화조약을 맺은 다음 수교했다. 1987년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1차 인티파타(반이스라엘 민중봉기)를 일으키면서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계기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가 유대인이 쏜 총을 맞고 숨진 사건이었다. 범인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으며 그가 자유의 봄이 된 그날 이스라엘 군인들이 아이들에게 발포해 5명이 숨졌다. 그런 상황에서 그해 12월 8일 가자지구 난민촌의 청년들이 이스라엘 군용 트럭에 치어 숨지는 사건이 터지면서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항쟁은 5년간 계속됐고 수많은 아랍 국가와 아랍인이 연대했다.

인타파타 운동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이라크가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 등 친미 중동국가와 나토 회원국을 포함한 다국적군을 결성해 1991년까지 이라크전을 치렀다. 당시 이라크를 지지했던 PLO는 그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각국에 나가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주민이 대거 추방되면서 해외 송금이 끊겨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다. PLO는 생존을 위해 1991년부터 이스라엘과 협상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타협의 필요성을 느낀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과 대화에 들어갔다. 협상은 미국의 중재로 이뤄졌으며 1993년 9월 이스라엘과 PLO는 ‘2국가 공존’을 틀로 하는 오슬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PLO는 유대국가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해 5년간 잠정적으로 자치를 허용하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1994년 5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운영에 들어가고 그해 7월 아라파트가 자치지역으로 돌아오면서 인티파타는 끝났다. 이는 2013년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 선언으로 이어졌다. 오슬로 합의의 공로로 PLO의 아라파트 의장과 당시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1922~1955년, 1974~77년, 1992~95년 총리)와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1923~2016년, 1977, 1984~86년, 1995~96년 총리, 2007~14년 대통령 재임)은 199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1994년엔 요르단과 평화조약을 맺고 수교했다. 이로써 이스라엘과 육상으로 국경을 맞댄 네 나라 중에서 레바논과 시리아를 제외한 두 나라와 평화조약을 맺고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나라 사이 국경을 육상으로 통과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추가 협상은 계속 난항을 겪었다. 5년간의 한시 자치가 종결된 1999년까지도 최종 해결은 이뤄지지 않았다. 자치 시한은 2000년 9월까지 연장돼 협상을 계속하던 양측은 미국의 중재로 2000년 7월 미국의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 마주 앉았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에후트 바라크 총리와 무릎을 맞댔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수립될 팔레스타인 국가의 비무장과 유대인 정착촌을 이스라엘 주권 아래에 두는 방안을 내놨다. 아라파트는 이를 거부했으며 협상은 결렬됐다. 이번에 트럼프가 내놓은 방안도 2000년에 아라파트가 거부한 방안에 몇 가지를 보탰을 뿐 큰 맥락에선 대동소이하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1970~1990년대에 걸쳐 정착촌 건설을 지지해온 강경파 정치인 아리엘 샤론(1928~2014년, 2001~2006년 총리)은 팔레스타인 측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샤론은 2000년 9월 당시 야당이던 리쿠드당 대표로서 경찰 1000명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인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과 알아크사(Al-Aqsa Mosque) 모스크가 있는 성전산(Temple Mointain)에 올랐다. 성전산은 동예루살렘에 속하는데 이슬람 성지인 바위의 돔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있는 만큼 이스라엘 군경은 출입을 삼가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샤론이 이를 무시하면서 점령지 팔레스타인 주민의 분노와 봉기를 유발했다. 자살공격을 포함해 격렬하게 진행된 2차 인티파타는 2005년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2국가 체제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정착촌 건설을 계속했고,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을 장벽으로 휘감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계속 고통을 받았고, 명예로운 국가 창설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중동 산유국들 실리 챙기려 트럼프 손 들어줘


▎사진:연합뉴스
주목해야 할 또 다른 포인트는 이번 트럼프의 중동평화 구상이 나온 뒤 중동권에서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아랍에미리트·바레인·오만이 트럼프 구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사실이다. 중동 산유국인 이들 나라는 그동안 이스라엘을 비판해오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꾸준히 원조를 제공해온 ‘물주’다. 이들은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팔 분쟁으로 이스라엘과 수교도 곤란하고, 국내정치에도 부담이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나라들이 이번에 트럼프의 손을 들어준 것은 팔레스타인 분쟁 피로증을 상당히 느끼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아울러 트러프와 쿠슈너의 끈질긴 설득에 일단 트럼프의 방안을 인정하고 평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대가로 미국이 어떤 선물을 줄 것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지역 맹주의 하나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이즈 알사우드 왕세자는 ‘비전2030’이라는 국가 개조계획을 발표하고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핵심은 사우디아라비아 서북쪽 티란 해협 인근에 거대한 신도시를 건설해 21세기형 관광·레저·교통·환경·에너지 핵심 도시로 키우는 프로젝트다. 이를 위해선 이스라엘과 안보·기술·경제 협력이 시급하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지난 1월 2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5주년을 앞두고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본부를 둔 ‘무슬림 세계연맹’의 무함마드빈 압둘카림 알이사 사무총장이 28개국의 무슬림 지도자 62명과 함께 미국 유대인위원회(AJC)의 대이비드 해리스 최고경영자와 함께 아우슈비츠를 찾아 함께 기도를 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그 직후 자국 국민의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양국 관계에 훈풍이 부는가 싶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스라엘 여권 지참자의 자국 방문을 계속 불허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중동에 뭔가 지각변동이 생길 것이란 희망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안보뿐 아니라 중동 국가들이 절실하게 원하는 과학기술과 경제 분야에서도 실력을 키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중동평화 방안이 당장은 큰 가치나 의미가 없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수정을 더해가면서 중동 평화를 위해 달려갈 수 있는 이정표는 될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ciimccp@joongang.co.kr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1520호 (20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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