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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처럼 서성이는 ‘가스라이팅’ 

 

영화 ‘스타 탄생(A Star Is Born)’과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로 명성을 떨친 할리우드 영화감독 조지 쿠커(George Cukor)는 1944년에 내놓은 영화 ‘가스등(Gaslight)’으로 또한번 시선을 끌었다. 아내의 재산을 노리는 남편과 심리적 공포에 말려든 부인의 모습을 그린 스릴러물이다. 무대가 안개 속 런던이어서 극적 효과를 더해준다.

이 영화에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유래한다.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함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하고 그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여 결국 그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상황은 1938년 영국 런던의 연극무대에서 초연된 ‘가스등’에서 처음 등장했다. 연극 속 남편은 집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만들고는 부인이 집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아내를 탓한다. 이에 아내는 조금씩 자신의 현실 인지능력을 의심하면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점차 남편에게 의존하게 된다.

30년대 연극의 인기에 힘입어 1948년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면서 프랑스 배우 샤를르 보와이에Charles Boyer)를 남편 그레고리 역에, 스웨덴 출신의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을 아내 폴라 역으로 캐스팅해 대박이 났다. 이 영화로 제2회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제17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작품상을 거머쥔 겹경사의 고전 명작이다.

정상급 오페라 가수인 엘리스가 자신의 집에서 살해되면서 스토리는 전개된다. 경찰은 범인을 잡는 데 실패했고, 유일한 상속녀로 집을 물려받은 조카 폴라는 이탈리아로 성악 수업을 떠난다. 그녀는 거기서 젊고 잘 생긴 청년과 사랑에 빠져 공부를 중도 포기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물론 남자는 재산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10년 만에 런던으로 돌아와 재산을 물려받은 앨리스의 집에서 두 사람은 신혼의 단꿈을 꾼다. 그러나 남편 그레고리는 갖가지 구실을 붙여서 폴라의 외출을 막고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몰아간다. 그레고리는 가면을 쓴 보석 도둑이었고, 앨리스의 살인범이었으며 그녀가 지니고 있던 값진 보석을 가로채기 위해 폴라에게 접근했다.

남편은 폴라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하면서 교묘한 속임수를 써 불안한 심리상태로 몰고 간다. 밤마다 방 안의 가스등이 희미해지고 다락방에서 소음이 들리자 폴라는 이 사실을 남편에게 말하지만, 오히려 폴라를 미쳤다고 몰아세운다. 폴라의 신고를 받은 경시청 수사관이 가스등과 발걸음 소리의 미스터리를 추적해 그레고리의 정체를 밝혀낸다는 줄거리이다.

부인 : 서랍 속에 브로치가 있을 거예요.
남편 : 서랍에? 없는데~
부인 : 분명히 내가 거기 넣어 뒀어요.
남편 : 혹시 나를 의심하는 거야? 안 되겠어. 아무래도 당신 정신병원에 가 요양이라도 해야겠군,


아내가 수리를 맡기려던 브로치는 이미 남편이 빼돌렸고, 남편은 멀쩡한 아내를 정신이상으로 몰아가고 있다. 영화 속에서 남편이 일부러 가스등 불빛은 어둡게 한 후 부인이 이를 지적하면 “당신 돌았어”하는 식으로 부인의 정신 상태를 스스로 의심하게 해 바보로 만든다. 결국 아내는 남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된다. 이처럼 상황을 조작해 남에게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게 하고, 판단력을 잃게 하여 정신세계를 황폐화하는 경우가 있다.

영화와 연극에서 비롯된 ‘가스라이팅’은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심리학적 용어. 일련의 상황을 조작해 타인이 현실감을 잃게 하여 결국 정신적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의 작가이자 미국 정신분석 심리치료사인 로빈 스턴(Robin Stern)은 영화 가스등의 제목을 인용해 ‘가스등 효과(Gaslight Effect)’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최근 우리 정치권에서도 가스라이팅 물의가 있어 실망을 안겨줬다. ‘매우 촉망받는 인물’로 한 정당의 인재영입 대상에 오른 20대 청년이 미투 논란에 휘말리면서 자진 사퇴를 해야만 했다. 그의 여자 친구였다고 밝힌 한 여인이 “그가 여성혐오의 가스라이팅으로 자신을 괴롭혀왔다”고 폭로한 것이다. 사실 여부는 차츰 밝혀지겠지만, 그 사회적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가스등 효과(Gaslight Effect)’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는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설사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이를 인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되레 가해자를 두둔하기도 하는데, 이는 가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기 때문이다. 결국 피해자는 가해자가 자신을 조종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함정에 빠져, 작은 실수를 문제삼아 비난하는 상대에게 끌려다니게 된다.

가스라이팅에 피해를 보는 대상은 주로 배우자나 자식이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집단따돌림이나 학교폭력에 의해 힘이 약한 학생들이 고통을 겪는다. 직장 내 괴롭힘(Gaslighting at work)도 흔한 가스라이팅이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퇴사했다는 40대 남자는 선배로부터 “일을 이 정도밖에 못 하느냐”는 꾸지람을 너무 자주 들어 ‘내가 진짜 무능한 거 아냐’ 하는 자책감으로 우울증에 빠져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악용된다. 툭하면 “너는 사회성이 부족하다”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무조건 복종하게 한다. 자신이 주위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적이 없음에도 인간관계가 좋지 않다며 평가 절하하는 식인데, 지배자와 경쟁자들이 자주 써먹는다.

한 마디로 주변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해 상대방의 자아를 무력화시키는 현상이 가스라이팅이다. 여러 인간관계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편이지만 일종의 정신적 세뇌인만큼 피해자가 알아채기도 쉽지 않은 폭력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연인 관계에서 나타난다. 평등해야 할 연인 사이가 주종관계로 변질하는 경우다. 연인관계에서의 언사가 “너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나를 사랑하는데 네가 이 정도도 못 해줘” 따위의 유형이면 일단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가스라이팅 피해를 볼 경우 가해자의 압박 때문에 주변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 은밀히 이루어지는 가스라이팅은 형사상의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혹시 당신도 지금 직장이나 남녀 관계에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 정영수 칼럼니스트(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1525호 (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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