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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왜 ‘위탁생산’에 집중할까] 시스템반도체·바이오 사업 모두 “대만 TSMC 잡아라” 

 

성장가능 시장서 생산 캐파 늘리는 전략… 높은 기술력으로 IP확보 딜레마 넘어야

▎삼성전자 화성 V1 라인 전경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2월 20일 화성사업장 내 EUV(극자외선) 공정 전용 라인인 ‘V1 라인’을 방문해 “시스템반도체 세계 1등을 향한 긴 여정의 첫 단추를 끼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미국에서 삼성전자가 퀄컴의 5G 모뎀칩 X60의 일부 물량 생산을 수주했다는 보도가 나온 다음 날이었다. X60은 삼성전자와 대만 TSMC(타이완반도체제조회사)가 나란히 수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TSMC는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는 회사로, 파운드리 시장 강화에 나선 삼성전자 DS(반도체) 사업부문이 ‘경쟁자’로 꼽는 회사다. 파운드리는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 ‘생산’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회사를 말한다. 공장을 갖지 않고 개발 및 설계에 집중하는 ‘팹리스’ 기업들의 반도체를 대신 생산한다.

파운드리 업계에서 가장 큰 회사인 TSMC는 ‘고객사와 경쟁하지 않는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다. TSMC가 파운드리 회사로 글로벌 최고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로 평가받는다. 2005년 파운드리 사업을 시작한 삼성전자에 TSMC의 이런 모토는 폐부를 찌르는 것이었다. 퀄컴 등 글로벌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회사)는 스마트폰·디스플레이를 생산하며 반도체의 설계·개발까지 하는 삼성전자에 일감을 주길 꺼렸다.

그런데 퀄컴이 최근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에 차세대 5G 모뎀칩 X60을 발주했다. 기존 파운드리 물량 발주가 TSMC에 몰려 있어 분산했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업계 일각에선 다른 해석도 나온다. 삼성이 자사 스마트폰에 퀄컴의 모바일 CPU를 사용하는 대신 퀄컴 핵심 반도체 파운드리 물량을 수주했다는 해석이다. 우연일 수 있지만, 퀄컴의 X60을 수주하기에 앞서 삼성전자에는 관련한 움직임이 있었다. 삼성은 지난 2월 20일 출시한 갤럭시 S20에 자사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인 엑시노스 탑재를 포기했다. 삼성은 기존 내수용 갤럭시 시리즈에 엑시노스를 탑재해왔는데, S20에서는 모두 퀄컴의 스냅드래곤을 탑재키로 한 것이다.

바이오 사업에도 반도체 전략 적용해 ‘CMO’ 규모 1위


▎삼성바이오로직스 3공장 전경
신빙성이 높은 이야기는 아니다. 삼성이 S20에 엑시노스 AP 탑재를 포기한 것은 스냅드래곤에 뒤처진다는 현실 인식이 뒷받침됐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향후 모델에선 다시 엑시노스를 탑재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 DS사업부가 현재 반도체 설계·개발보다 파운드리 경쟁력 강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을 봤을 때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추측이다. 삼성은 왜 반도체의 설계·개발보다 ‘위탁생산’인 파운드리에 집중하는 것일까. 답은 단순하다. 시스템 반도체 설계·개발보다 파운드리 사업을 통해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게 더욱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학회장인 박재근 한양대 교수(전자융합공학)는 “삼성전자에게 파운드리 확대는 숙명과도 같다”고 말했다. 시스템 반도체 분야 설계 역량이 부족한 삼성전자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파운드리뿐이기 때문이며, 파운드리 사업만으로도 성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글로벌 최고 경쟁력을 가진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역량과 시스템 반도체의 역량이 맞닿는 곳이 ‘생산’ 분야이기도 하다. 파운드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 기술과 설비인데,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 공정 기술과 설비를 그대로 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박 교수는 “파운드리에 집중하지 않으면 반도체 유휴 설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파운드리 사업을 통해 감가상각이 끝난 라인에서도 이익을 창출해낼 수 있다”며 “전 세계적으로 7나노미터 이하의 공정을 가진 곳이 TSMC와 삼성전자뿐인데, 팹리스 입장에선 TSMC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삼성전자에 발주를 늘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대만의 TSMC 잡기를 목표로 삼는 삼성 내 또 다른 회사가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다. 양은영 삼성바이오로직스 CDO(위탁개발서비스) 사업팀장은 지난 1월 12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바이오업계의 TSMC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삼성의 대표적인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시스템 반도체와 바이오 사업이 모두 ‘위탁생산 전문회사’인 TSMC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삼성의 바이오 분야 전략도 시스템 반도체 전략과 비슷하다. 삼성은 2011년 뒤늦게 바이오 분야에 진출했다. 바이오 산업은 확실히 성장하는 영역이지만 신약 개발을 통한 성공 가능성은 불확실하다. 삼성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얻은 교훈을 바이오 사업에도 그대로 도입했다. 신약 개발이 아니라 CMO(바이오 위탁생산) 사업에 진출해 바이오 생태계에서 영향력을 키운 것이다. CMO는 글로벌 제약사의 주문에 따라 정교한 공정으로 바이오 의약품을 대신 생산해 주는 비즈니스로, 바이오 업계의 ‘파운드리’라고 불린다. 단순한 위탁 생산이라고 볼 수 없다. 유전자 재조합 기술과 세포배양 기술 등 새로운 생물 공학 방식을 이용해야 하는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다.

삼성의 바이오 사업 전략은 먹혀들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2015년 세계 3위 규모의 생산시설을 확보하며 흑자 전환했고, 2018년엔 제3공장을 완공해 론자를 제치며 36만2000ℓ의 생산설비를 갖춘 최대 CMO기업으로 도약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성공요인은 바이오 산업에 파운드리의 노하우를 도입한 것이다. 고객사가 의뢰하면 초기 세포주 개발부터 임상 시료 생산, 임상 및 허가, 상업생산까지 모든 신약개발 과정을 원스톱으로 가동하는 사업구조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냈다. TSMC와 삼성전자 등 글로벌 파운드리 업체가 설계지원을 담당하는 ‘디자인 하우스’ 역할까지 수행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7016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바이오 업체로 자리매김했다.

파운드리 사업부 ‘별도법인’ 분리 목소리도


다만 ‘위탁생산’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한다. ‘고객사와 경쟁하지 않는다’는 TSMC의 전략은 파운드리 사업자의 한계이기도 하다. 파운드리와 CMO 사업은 당장 수익을 확보할 수 있더라도 전체 산업의 주도권을 쥐기는 어렵다. 시장 진입 업체가 늘어나고 생산설비 투자가 경쟁적으로 늘어난다면 치킨게임도 불가피해진다. 미래산업의 글로벌 주도권은 설계 및 개발 역량을 높여 지식재산권(IP)을 확보한 회사들이 쥐게 된다.

문제는 위탁생산과 설계·개발 사업을 동시에 전개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고객사와 경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삼성은 바이오 분야에 진출할 때부터 그룹 내 역할을 CMO 사업체인 삼성바이오로직스, 바이오시밀러·신약 개발을 담당하는 삼성바이오에피스로 이원화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미국 바이오젠의 합작법인이다. 별도법인을 만듦으로써 글로벌 빅 파마가 삼성바이오로직스에 CMO 발주를 망설일 요인을 줄인 셈이다.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는 상황이 복잡하다. 삼성전자는 2017년 LSI 사업부문에 속해있던 파운드리 사업을 별도로 분리했지만, 글로벌 팹리스들의 ‘기술 유출’ 우려는 여전하다. 이 때문에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처럼 파운드리 사업부를 별도의 법인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분사 역시 완전한 해답이 되진 못한다. 답은 결국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 것에 있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글로벌 팹리스와 직접적인 경쟁이 덜 한 영역에서 설계 개발을 집중할 것으로 본다. 현재의 반도체 핵심인 CPU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장이 생겨나는 신경망처리장치(NPU)에 집중하는 이유다. 삼성전자는 NPU 분야 인력을 현재 200여 명에서 2030년에는 2000명 이상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차량용 반도체에서의 활발한 움직임도 주목받는다. 2016년 아우디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은 삼성전자는 최근 아우디에 차량용 반도체 ‘엑시노스 오토 V9’을 공급한다고 밝혔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2020년까지 연평균 6%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올해는 95억 달러(10조7000억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의 딜레마를 없앨 수 있는 궁극적인 해결책은 ‘파운드리의 경쟁력 강화’라고 역설한다. 박 교수는 “TSMC를 넘어 파운드리 분야, 특히 하이엔드급 반도체 공정이 가능한 미세공정에서 대체할 수 없는 경쟁력을 갖추는 것만이 종합반도체 업체의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최윤신 기자 choi.yoonshin@joongang.co.kr / 사진:각 사

1525호 (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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