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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올림픽 연기] 역대 올림픽은 순탄하지 않았다 

 

전쟁·냉전으로 취소·보이콧… 반칙·승부조작은 고대 올림픽도 마찬가지

▎지난 3월 12일(현지시간) 올림픽 발상지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성화 채화식. 이날 행사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관중 없이 진행됐다. / 사진:AP 연합뉴스
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범유행)으로 인한 글로벌 혼란이 급기야 2020년 도쿄(東京) 올림픽·패럴림픽을 1년 정도 연기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IOC의 토마스 바흐 위원장은 3월 24일 45분간 통화하면서 연기에 합의했으며 IOC는 이날 즉시 임시 이사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연기를 승인했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아베 총리가 먼저 연기를 제안하고, 바흐 위원장은 “100% 동의한다”고 응답하면서 담판이 이뤄졌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는 이날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의 연내 개최를 포기하고 2021년 여름까지는 개최하며, 그리스에서 채화돼 일본으로 옮긴 올림픽 성화는 일본이 보관하고 시기를 미뤘음에도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2020’이라는 대회 명칭은 그대로 쓰기로 했다는 합의 내용을 발표했다. 성화 릴레이도 연기됐다.

코로나19의 전 세계적인 확산으로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 세계에 안전한 곳이 없어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도 불가능했다. 코로나19 확산이 언제 꺾일지 알 수 없어 올해 하반기로 옮기는 방안도 설득력이 부족했다. 선수의 안전과 관중의 참여, 그리고 전 세계적인 흥행을 위해선 개최 시기를 한 해 뒤로 옮기는 방안이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도쿄 올림픽 1년 연기 후폭풍 만만치 않아


▎1972년 뮌헨 올림픽 폐막식에 걸린 올림픽 조기. 뮌헨학살은 올림픽의 상처로 남았다.
결국 개최 시기를 1년 연기했지만 뒤처리도 만만치 않다. 우선 내년 비슷한 시기에 열릴 예정인 다른 국제 스포츠 이벤트의 개최 시기 조정도 문제다. 요미우리에 따르면 2021년 여름과 초가을에는 일본 후쿠오카에서 수영세계선수권 대회와 고베에서 장애인육상 세계선수권 대회가 예정돼 있으며, 미국에선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린다.

대회 연기에 따른 행정 처리는 물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가장 먼저 생각할 대상이 경기장이다. 조직위원회는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을 위해 33개의 경기장을 포함해 진행 공간 등 모두 43개의 장소를 확보했는데, 내년에 이를 다시 확보하려면 추가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 내년에 다른 이용이 이미 예약돼 있는 경우도 있어 이를 연기하거나 다른 장소를 물색해야 하기 때문에 전면적인 임대 재협상을 해야 한다.

선수촌도 문제다. 새로 건설한 뒤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선수촌으로 사용한 뒤 개보수를 거쳐 분양 고객에게 인도할 예정이었지만, 이번 연기로 사달이 나게 생겼다. 부동산 인도시기를 1년 뒤로 늦출 수밖에 없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조직위원회가 보상 책임을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직위원회도 활동이 1년간 연장되면서 자칫 ‘돈 먹는 하마’가 될 처지다. 인건비는 물론 사무실 임대료도 1년 치가 추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직위원회는 IOC와 각국 올림픽위원회에서 도쿄를 찾은 VIP와 직원들을 위해 가계약한 경기장 주변의 숙소 4만6000개의 취소도 문제다. 조직위원회는 물량을 싹쓸이하다시피 해 일반인은 대회 기간 중 예약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직위원회는 이번 연기로 이 많은 물량을 모두 취소하고 내년으로 재계약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위약금을 둘러싼 분쟁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올해 여름 도쿄와 주변 지역에는 이들 숙박 물량이 쏟아지면서 가격이 급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500만 장을 판매한 입장권도 문제다. 환불과정도 만만치 않으며, 이를 1년 뒤에 쓸 수 있게 하는 방법도 쉽지 않다. 확보해둔 임대버스 2000대의 계약을 모두 취소하고 내년에 이 정도 물량을 다시 모아 계약하는 일도 골칫거리다. 1만명 이상의 경비 인력, 11만명의 자원봉사자를 일단 해산하고 내년에 다시 모으거나, 활동 시기를 내년으로 조정하는 일도 과중한 업무가 될 수밖에 없다.

2차 대전 당시엔 ‘정치 선전장’되기도


▎고대올림픽 성화 주자들의 봉송 장면을 묘사한 고대 그리스의 항아리 장식 그림. 기록은 '봉송 주자들이 릴레이 선수처럼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를 순회했다'고 전한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와 함께 한번 정한 올림픽을 연기하는 초유의 사건을 겪는 데 따른 심리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올림픽 연기는 근대 올림픽 도입 뒤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림픽 취소나 반쪽 개최, 선수 학살 등 비극은 왕왕 있어왔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일본은 올림픽 반납과 취소의 전력이 있다. 과거 침략전쟁을 벌이느라 1940년 도쿄 올림픽 개최권을 반납한 전력이 새삼스럽게 지적된다. 내년으로 연기된 도쿄 여름 올림픽은 1964년 이후 두 번째로 같은 도시에서 열린다. 그런데 사실은 도쿄 올림픽 유치는 이번에 세 번째다. 도쿄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다음인 1940년 올림픽 개최권을 확보했다. 당시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여름 올림픽으로 상당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군국주의 일본은 1937년 침략전쟁인 중·일전쟁(1937년 7월 7일~1945년 9월 2일)을 일으키면서 각의에서 올림픽 개최권 반납을 스스로 결정했다. 한 나라가 유치했던 올림픽을 자국이 일으킨 침략전쟁을 이유로 스스로 포기하고 반납한 사례는 1940년 도쿄 올림픽이 유일하다.

이렇게 일본이 반납한 1940년 여름 올림픽 개최권은 핀란드의 헬싱키로 넘어갔다. 하지만 소련이 1939년 핀란드를 침공해 겨울전쟁(1939년 11월 30일~40년 3월 13일)을 벌어지면서 올림픽은 아예 취소됐다. 인류의 제전인 근대올림픽을 전쟁으로 중지한 것은 1916년 베를린 여름 올림픽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된 데 이어 두 번째 사례다.

전쟁이 끝난 1936년 베를린에서 여름 올림픽이 열렸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이를 게르만족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선전장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미국의 아프리카계 제시 오언스(1913~1980년) 선수가 100m, 200m, 4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각각 금메달을 따고 4관왕에 오르면서 히틀러의 인종주의에 일침을 가했다. 1940년 도쿄 또는 핼싱키 올림픽에 이어 1944년으로 예정됐던 런던 올림픽도 나치·파시스트·군국주의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아 끝내 열리지 못했다. 올림픽은 종전 뒤인 1948년 런던이 여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비로소 재개됐다.

일본이 올림픽을 포기하고 벌인 중·일전쟁은 끔찍한 살육극으로 이어졌다. 종전 뒤인 1947년 중화민국 행정원 배상위원회는 일본과의 전쟁으로 군인 365만405명, 민간인 913만4569명이 희생됐다고 발표했다. 1995년 중국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 산하 군역사연구부에서 출간한 [중국항일전쟁사]는 항일전쟁 기간 중 3500만명의 중국인이 죽거나 부상했다고 기록했다. 동아시아를 넘어 인류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올림픽 참가마저 갈라놓은 냉전시대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44만6500명의 군인이 숨졌다. 종전 뒤엔 소련군에 의해 60만명의 일본군 포로가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로 잡혀가 노역에 종사했으며, 이 가운에 6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침략전쟁 과정에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잃기도 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여름 올림픽에서 마술경기의 일종인 장애물경주에서 금메달을 딴 니시 다케이치(1902~1945년 3월 22일) 선수다. 니시 선수는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벌어진 이오지마 전투(1945년 2월 19일~3월 26일)에서 전차 제26연대장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인류애에 입각한 평화와 화합의 제전을 버리고 국가주의를 내세운 침략전쟁을 벌인 대가였다.

올림픽은 정치 문제를 내건 보이콧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27개국이 보이콧하는 불상사를 겪었다. 당시 뉴질랜드가 반인륜적인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인종의 분리거주) 정책 때문에 국제적인 제재를 받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서 경기를 치렀는데, IOC가 뉴질랜드의 올림픽 참가를 금지하지 않자 상당수 아프리카 국가와 이라크 등이 대회를 보이콧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 92개국 6084명이 참가했으며 29개국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몬트리올 올림픽 보이콧 사건은 그 다음에 열린 1980년 모스크바 여름 올림픽에 비하면 약과였다. 모스크바 올림픽은 1956년 이후 가장 적은 80개국 5179명 참가에 그친 반쪽 올림픽이었다. 소련이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보이콧을 주도했다. 그 결과 서방 진영을 중심으로 한 66개국이 올림픽에 불참했다. 한국도 포함됐다. 13개국이 참가는 했지만 국기 대신 올림픽기를 앞세우고 입장했으며 3개국은 국가올림픽 위원회 깃발을 들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89년 2월까지 이어지면서 소련을 끝을 알 수 없는 소모전의 나락으로 빠뜨렸다. 천문학적인 군사비를 투입한 이 전쟁으로 소련은 재정문제에 봉착했으며 고전적 공산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 때문에 가뜩이나 어려웠던 소련을 몰락으로 이끄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공교롭게도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다음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었다. 이번엔 소련이 보복에 나서 보이콧에 나섰다. 하지만 동조 국가는 소련과 북한,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등 14개국에 불과했다. 로스앤젤레스 대회에는 140개국 6829명이 참가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은 72개국 7170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지만 끔찍한 비극이 발생했다. 올림픽 기간 중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인 ‘검은 9월단’ 무장대원 11명이 선수촌에 침입해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시도하다 선수 전원을 살해한 뮌헨 참사가 벌어졌다. 인질극이 시작되면서 일시 중단됐던 경기는 사건이 종료되면서 재개돼 폐막식까지 마쳤다. 이 사건으로 올림픽기가 사상 처음으로 조기로 게양됐으며 이스라엘 국가도 조기로 게양됐다. 이스라엘의 대외정보공작 기관인 모사드는 테러 관련자를 보복 살해하는 ‘신의 분노 작전’을 펼쳐 20명 이상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의 분노 작전은 2005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뮌헨’의 모티브가 됐다.

뮌헨 참사를 겪은 뒤 올림픽의 보안과 경비가 강화됐으며 안전 올림픽이 강조됐다. 몬트리올, 모스크바,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보이콧을 겪은 뒤 국제사회는 올림픽 보이콧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지 않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동서 양 진영이 참가한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보이콧은 사라지고 올림픽은 더 이상 정치로 얼룩지지 않았다. 인류는 올림픽의 비극으로부터 그나마 교훈을 얻었던 셈이다.

연애·결혼·정치권력 얻은 고대 올림픽 우승자들

하지만 고대 올림픽을 살펴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형식적으로는 평화와 화합의 정신을 실천하는 이상적인 행사였지만 현실적으로는 힘이 좌우하는 우락부락한 행사였다. 기원전 776년에 시작돼 기원후 394년까지 계속됐던 고대 올림픽의 주관도시인 엘리스는 개막 전 그리스의 각 도시 국가에 3명의 사자를 각각 보냈다. 올림픽 기간 중 전쟁을 중지하고 재판은 연기하며 사형은 미루도록 요청했다. 부정을 타선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현실은 힘이 지배하는 무정부 상태였다. 고대 군사 강국인 스파르타가 전쟁금지 관례를 어겨 벌금과 출전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벌금을 내지 않고 넘어갔다. 가공할 전투력을 지닌 스파르타의 경보병을 두려워한 다른 도시 국가들은 누구도 이를 문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고대 올림픽 기간 중 전쟁은 중지해도 정쟁을 자제했다는 기록이 없다. 올림픽은 국내와 국제 정치의 대결장이 됐다. 선수들의 성적에 따라 관련한 정치인의 위상과 인기가 단박에 오르내리는 것은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로 맞붙었다가진 도시는 이긴 도시에 한참 동안 목소리가 낮아졌다.

근대 올림픽을 제안한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은 고대 올림픽이 아마추어리즘의 제전이라고 믿었지만 이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고대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수는 상금과 격려금으로 평생 먹을 재산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올림픽 우승자가 인기를 얻어 연애와 결혼은 물론 정치에서도 힘을 얻는 게 일반적이었다. 처음엔 엄격한 아마추어리즘을 내걸었던 근대 올림픽이 현실을 감안해 축구 등 일부 종목에서 프로 선수의 참가를 허용하는 이유다. 하긴 아마추어 선수하고 해도 돈과 거리가 먼 수도승은 아니지만 말이다.

고대 올림픽은 스포츠 행사라기보다 종교 제전에 가까웠다. 선수들은 도시국가 엘리스의 성소인 올림피아에 모여 높이 12m의 위압적인 제우스신 석상 아래에서 경기를 치렀다. 고대 올림픽이 사라진 것도 종교 때문이다. 그리스 지역을 지배했던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347~395년, 재위 379~395년)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 국교로 삼으면서 이교 행사인 그리스의 올림픽을 폐지했다. 이집트에선 신전이 폐쇄되고 사제들이 쫓겨나면서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맥이 끊어졌다.

‘그래도 종교행사였던 만큼 고대 올림픽에선 경기를 정정당당하게 했을 것’으로 여긴다면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다. 올림포스에 반칙 선수들의 벌금을 모아두는 자네스라는 상자를 만들어 둔 것을 보면 반칙이 다반사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심판이나 선수를 매수해 승부를 조작하는 것도 수시로 벌어졌다.

근대 올림픽에선 국적을 바꿔 뛰는 경우가 왕왕 있어 세부 규정까지 마련됐지만 이런 일은 사실 고대 올림픽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소타데스라는 장거리 경주 선수는 출신 도시인 크레타 소속으로 출전해 우승했으나 다음 경기에선 다른 도시국가 에페스로 국적을 바꿔 출전했다. 두둑한 돈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스포츠와 돈의 관계는 역사적인 뿌리가 깊다. 근대 올림픽도 해결하지 못한 고질적인 문제다. 올림픽이 다양한 측면에서 성숙해져야 하는 이유다.

도쿄 올림픽이 1년 연기를 계기로 더욱 성숙한 대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우선 일본 때문에 전쟁 피해를 입었던 이웃나라들이 ‘침략의 상징’으로 여기는 욱일기를 자국민의 응원도구로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황당한 일부터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인류가 코로나19라는 재앙 앞에 힘을 합쳐 대응하면서 그 정도 교훈은 얻어야 하지 않을까. 올림픽 정신인 평화와 화합을 제대로 이루려면 말이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1528호 (20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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