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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영의 팝콘 심리학] 미국의 부조리·모순은 우리에게도 있다 

 

‘흑인 사망’으로 거세진 인종차별 반대 시위… 당신은 ‘차별’에서 자유로운가

▎그린북은 1936년부터 1966년 사이에 발행된 여행가이드로, 흑인 여행객들이 환영받을 만한 호텔, 식당, 술집, 주유소 등을 열거했다. / 사진:위키미디아커먼(퍼블릭 도메인)
지금 미국은 미니애폴리스 경찰이 일으킨 흑인 사망 사건에서 시작된 항의 시위로 전국이 들끓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과 락다운으로 억눌렸던 사람들의 좌절감이 그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던 공권력의 흑인 차별 사건들과 함께 축적되어 온 분노와 만나 더 크게 불타오르는 모양이다.

차별이 계속되는 건 그것이 우리의 심리적 근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어떻게든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의, 즉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정체성에는 두 가지 핵심요소가 필요하다. 첫째는 ‘고유성’이다. 이건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증거들이다. 단, 고유성에도 정도가 있다. 자신이 남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그건 외계인이거나 왕따라는 이야기니까. 우리는 대다수의 남들과는 다르되, 어떤 바람직해 보이는 누군가와는 비슷하기를 바란다. 이런 고유성을 제공하는 것이 대개는 집단이다.

내 가족, 출신 대학, 소속된 조직, 그 속에서의 지위 같은 것들이 이런 적당한 고유성과 동시에 두 번째 요소인 둘째 ‘연속성’도 제공한다. 연속성은 그 고유성이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보장이다. 요컨대, 내가 어떤 집단에 안정적으로 소속되어 있음을 가지고 나를 정의하면 적절한 수준의 고유성과 연속성이 충족된다.

문제는 이 집단적인 정체성은 차별과 이어진다는 점이다. 내가 속한 집단이 다른 집단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그 집단 소속이라는 것이 내 정체성에 별 기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별과 정체성의 관계는 상품 마케팅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대부분의 사치품들은 실제 기능이나 스토리만큼이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라는 점 때문에 소비자들이 매력을 느낀다. 고급 자동차에 대해 말하는 ‘하차감’ 역시 마찬가지다. 자동차의 기능이 아니라 그 차를 소유했다는 자체가 부여하는 심리적 의미를 뜻하는데, 이 역시 결국 차별성이 주는 정체감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과정을 ‘차별을 통한 사회적 지위 격차의 정당화 과정’이라고 한다.

‘차별을 통한 사회적 지위 격차의 정당화 과정’

물론 이 세상에는 이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차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누군가를 배척하고 증오하는 차별이 더 많다. 영화 ‘그린북’은 그런 차별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의 제목인 ‘그린북’은 원래 휴고 그린이 쓴 흑인 운전자를 위한 로드 트립 가이드북(The Negro Motorist Green book)을 부르는 말이다. 미국 전역의 호텔, 음식점, 주유소 중에서 흑인이 이용할 수 있는 곳들을 정리한 책으로 1940년에 초판이, 그 이후로 1963년까지 총 3번에 걸쳐 개정판이 나왔다. 흑인이 백인이 모는 차를 추월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는 주도 있었던 당시 미국에서 흑인이 자기 차로 여행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었다.

영화는 1962년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돈 셜리 박사(마허샬라 알리)가 미국 중남부 지역 순회 연주회를 진행하는 동안 벌어지는 다채로운 사건들을 그의 운전기사 겸 경호원 역할을 맡아 함께 한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이 둘은 존재 자체가 인종적 편견과 어긋나는 사람들이다. 백인인 토니는 백인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출신이라 주류가 아닌 뒷골목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는 배움도 짧고 어휘력도 빈약하며, 말보다는 주먹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보통은 이런 특성들은 백인이 아니라 흑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에 맞는다.

반면에 흑인인 돈 셜리는 음악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시카고 대학에서는 심리학을 전공해 심리학자로 일하기까지 했던 지식인이다. 8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던 그가 박사라 불린 이유는 실제로 2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클래식과 재즈를 결합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음악계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당시 백인 미국인들에 비해서도 가장 수준 높은 사람 중 하나였다.

이런 전형성에서 벗어난 두 사람이 전형적인 흑인 차별로 가득한 지역에 들어서니 당연히 우습지만 웃을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이 영화의 감독 피터 페럴리는 예전부터 ‘덤 앤 더머’ ‘미트 페어런츠’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등 민망한 코미디로 잘 알려진 양반인데, 이 작품에서 그가 비꼬는 건 바로 인종 차별의 기괴함이다.

돈 셜리를 초청한 미국 중남부 지역 호텔이나 공연장의 관계자들은 부조리와 모순이란 무엇인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 그들은 모두 셜리 박사의 국제적 명성과 뛰어난 연주 실력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를 초청했고 그의 연주회를 광고해서 손님들을 모으기까지 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셜리 박사에게 제대로 된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흑인이고, 흑인은 백인들과 같은 시설물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는 그의 클래식 연주는 듣고 싶지만, 그가 자신이 연주할 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 감정 때문도 아니고, 악의적인 의도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법과 규정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차별은 나쁜 것이다. 이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차별을 한다. 그들이 몰라서가 아니다. 자신이 하는 건 학교에서 배운 그런 나쁜 차별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불가촉천민을 불가촉천민으로 대하는 건 차별이 아니라 그냥 사회 규범을 따르는 거라고 간주된다. 그들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이상한 존재로 취급받을 것이다.

정규직·비정규직 차별 등 우리사회도 마찬가지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말처럼, 착하고 윤리적인 사람들이 차별을 한다. 차별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법을 따르고 공동체를 보호하며 사회의 윤리와 질서를 지키려는 올바른 행동 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자기들의 행위가 제3자의 눈에는 얼마나 야비하고 잔인하게 보이는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

1960년대 당시 돈 셜리 박사를 괴롭혔던 흑백분리 제도는 원래 ‘흑인과 백인에게 동등한 서비스가 제공되기만 한다면 인종별 구역을 나누어도 된다’ 는 연방법원의 판결에 따른 것이었다. 소위 ‘분리했으나 평등하다’는 이 원칙은 영화에서처럼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는 어떤 원칙이나 법률이 작동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남성과 여성의 차별, 학력의 차별, 지역 혹은 국가에 따른 차별도 멀리서 보자면 역시 야비하고 잔인하며 어처구니없이 어리석다. 차별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걸 조금씩 지워나가는 것이 우리 할 일이다. 우리가 덜 한심하고 덜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래야 한다.

※ 필자는 심리학 박사이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에서 발달심리학으로 석사를, 온라인게임 유저 한일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심리학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등을 썼고 [심리원리],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1539호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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