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김준태의 호적수(8) 김춘추와 알천] 왕을 꿈꾸던 자 김춘추, 경쟁자 알천을 이긴 방법은? 

 

상대의 약점이자 자신의 강점인 외교 분야에 역량 집중

▎신라 태종무열대왕 김춘추가 삼국통일에 관한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그림. / 사진:민족기록화
진골 신분 최초로 신라의 왕이 되어 삼국통일의 반석을 놓은 김춘추(金春秋, 604~661). 연개소문, 의자왕 등 각국의 거물과 겨뤘던 그에게도 내부에 알천(閼川)이라는 만만치 않은 적수가 있었다.

알천의 생몰연대나 가계는 알려진 바 없다. 왕위를 놓고 김춘추와 경쟁했다는 점에서 김씨 성을 가진 진골이었으리라 예측한다. 그가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636년(선덕여왕 5)인데, 5월 백제군이 옥문곡으로 잠입해오자 이를 전멸시켰다고 한다. 이어 637년 알천은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638년에는 칠중성을 공격해온 고구려 군대에 대승을 거두었다. 연구자들은 선덕여왕 재위 초~중반기에 알천이 군권(軍權)의 정점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개인의 무력도 매우 뛰어났는 ,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알천이 경주 남산 오지암에서 회의를 주관하고 있을 때 갑자기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좌중으로 뛰어들었다. 참석자 모두 크게 놀랐을 것은 당연. 삼국유사에는 “오직 알천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어쳐서 죽였다”라고 쓰였다. 용력과 통솔력을 겸비한 명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김춘추, 김유신과 손잡고 무력 확보

알천의 경력은 군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647년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보위에 오르면서 그는 상대등이 되었다. 수석 재상으로 국정을 총괄하며, 최고 회의기구인 화백(和白)의 의장으로서 귀족세력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당시 전임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女主不能善理)’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와중에 선덕여왕이 승하하는 등 신라 조정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이를 진정시킬 적임자로 알천이 선택된 것이다. 알천은 진덕여왕 재위 기간 내내 상대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국정의 중심을 잡았다.

이러한 알천은 큰 꿈을 꾸던 김춘추에게는 장벽과 같았을 것이다. 본래 성골이었던 김춘추의 집안은 할아버지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진골로 ‘족강’되었다.(성골과 진골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보통은 왕의 직계를 성골로 본다) 하지만 진지왕의 손자이자 진평왕의 외손자라는 그의 출신성분은 진골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야망과 뛰어난 재주가 뒷받침되면서 김춘추는 왕이 되겠다는 포부를 품게 된다. 조정엔 성골이자 미혼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만 남아 있어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륜과 인망 면에서 모두 자신보다 앞섰던 알천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답답했으리라. 더구나 알천은 문(文)에만 치중된 자신과는 달리 문무를 겸비했다. 군부와 귀족사회에 끼치는 영향력도 막강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버거운 상대, 김춘추에게 알천은 그런 존재였다.

알천의 양보 얻어내 왕위에 오를 수 있어

김춘추가 김유신과 손을 잡은 이유도 이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선덕여왕 초·중반기 신라군의 총사령관이 알천이었다면, 선덕여왕 후반기에서 진덕여왕 시기의 신라군은 김유신이 총괄했다. 알천과 김유신은 신라 군부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주축인 것이다. 김춘추는 김유신과 연합해 알천에 못지않은 무력을 확보하게 된다. 아울러 김춘추는 외교 분야에 주력하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갔다.

김춘추가 내치(內治)에서 알천과 승부를 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내정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알천이었고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조정의 주요 포스트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춘추는 상대편의 본진에서 힘을 소모하기보다 상대의 약점이자 자신의 강점인 분야에 역량을 집중해 경쟁력을 키운 것이다.

더욱이 외교는 고구려-백제-왜에게 포위되어 있던 신라가 활로를 찾기 위한 필수적인 분야였다. 김춘추는 목숨을 걸고 각각 고구려와 왜로 건너가 담판을 벌였고, 당나라와 외교협상에 성공했다. 이와 같은 업적은 신라 조정에서 그의 위상을 크게 높여주었다.

이 밖에도 김춘추는 도전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주도면밀한 행보를 보여줬다. 궁극적으로 신라의 국익을 위한 것이지만, 일차적으로 왕위계승자로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었다. 자신이 알천보다 나은 선택지라는 것을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보위는 김춘추에게 이어졌다. 여러 신하가 알천에게 섭정(攝政)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권력 공백기 동안 섭정을 맡은 후 정식으로 왕이 되어달라는 뜻이다) 알천이 “저는 늙었고 이렇다 할 덕행도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로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입니다”라며 사양했고, 따라서 김춘추가 왕으로 즉위했다.

이 기록만 보면 알천이 김춘추의 능력을 인정하고 양보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알천의 나이가 매우 많아서 왕위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알천의 생몰연대를 모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러 기록에서 엿보이는 알천 vs 김춘추·김유신의 긴장 관계로 볼 때, 정말 이렇게 평화적으로 결정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김춘추가 즉위한 후, 알천이 역사에서 전면 퇴장한 것을 두고 알천이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김춘추에게 제거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니 말이다. 다만 어찌 됐든 분명한 점은 김춘추와 알천의 경쟁이 김춘추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다.

알천에게 대권에 대한 의지가 있었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최소한 김춘추에게 알천은 강력한 라이벌이자 자신을 긴장시켜주는 존재였다. 만약 알천이 없었다고 생각해보자. 왕위 계승의 경쟁자들이 고만고만한 존재였다면? 김춘추가 그처럼 필사적으로 노력했을까? 더욱 강해지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했을까? 그냥 가만히 있어도 왕이 될 수 있었다면 김유신의 손을 잡고, 김유신에게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었을까? 그냥 놔둬도 자연스레 자신의 신하가 될 텐데? 또한 그랬다면 김유신이 김춘추를 위해 그처럼 헌신했을까? 알천이 없었다면 김춘추의 모습은 우리가 아는 것과 상당히 달랐을지도 모른다.

무릇 적수가 뛰어날수록, 훌륭할수록 그와 벌여야 할 승부는 더욱 힘겨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 적이 나를 단련하고 성숙시켜 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모두 끄집어내 주는 존재가 된다. 그런 적을 이기려면 나는 더 뛰어나고 훌륭해져야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거대한 적수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불평할 일이 아니다. 더욱더 철저해지고 더 노력하면 된다. 내가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용감하게 응전할 필요가 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58호 (2020.11.09)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