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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호적수(10) 김부식과 정지상] 모차르트(鄭)를 질투한 살리에리(金)였나 

 

자신을 성장시켜 줄 호적수를 스스로 제거해버린 김부식

1135년(고려 인종 13년) 정월, 천재 시인 정지상(鄭知常)이 참수됐다.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묘청과 내통했다며,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김부식(金富軾)이 그의 목을 벤 것이다. 연루된 직접적 증거가 없는 점, 먼저 죽이고 왕에게 사후 보고한 점, 심문 등 법적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에서 김부식의 사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김부식은 왜 정지상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

[고려사]에 따르면 정지상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시를 잘 짓기로 유명했다. 야사에 보면 5살(2살이라는 기록도 있다) 때, 대동강의 오리를 보고 “누가 흰 붓을 들어 강물 위에 을(乙)자를 써놓았을까?”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이자 중국 문인들에게까지 찬사를 받은 시, ‘송인(送人)’도 과거에 합격하기 전 청년시절에 지은 것이다.

비 개인 언덕에는 풀빛이 짙어 가는데(雨歇長堤草色多)
남포에서 그대를 떠나보내며 슬픈 노래를 부르네(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의 물은 언제 다 마르려는가?(大同江水何時盡)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구나(別淚年年添綠波)


정지상이 반란에 동참했다는 증거 없어

그가 문학적 재주만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경연에서 [서경]의 ‘무일편(無逸篇)’을 강론하고, [역경]을 토론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유교 경전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127년(인종 5년)에는 전횡을 휘두르는 권신 척준경을 탄핵하여 유배 보내는 등 서릿발 같은 기개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서경 출신이었던 정지상은 이즈음 조정에 등장한 묘청과 의기투합한다. 단재 신채호가 우리 역사상 가장 통탄할 만한(실패한 것이 아쉽고 분하다는 뜻) 사건으로 꼽았던 ‘서경천도 운동’의 주역 묘청은 당시 고려가 겪고 있는 내우외환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개경의 기운이 쇠한 탓에 이처럼 위기가 계속되는 것이니 옛 고구려의 도읍이자 왕기(王氣)가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 나라를 일신하자는 것이다.

묘청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롭고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을 이루고 있어 길이 대업을 누릴만한 곳이다. 왕은 3년마다 서경으로 가 100일을 머물러 태평을 이루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고려에게 서경은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국가 안보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도 개경의 귀족들은 서경을 천시하였고, 여기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서경 출신들로서는 묘청의 비전이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군주인 인종을 위시하여 개경 기득권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도 묘청을 지지했다. 정지상도 이러한 묘청에게 힘을 실어주었는데, 조정 내에서 서경천도 여론을 주도한다.

한데 묘청이 조바심을 내어 섣부르게 행동하면서 위기가 닥쳤다. “서경에 궁궐을 세워 천도하고 고려가 황제국을 칭하면 자연히 천하를 아우르게 되어 금나라가 예물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며 주변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라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내세웠다. 상서로운 징조를 조작하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했다. 묘청에 대한 왕과 사람들의 신뢰는 크게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천도가 지지부진해지자 묘청은 “개경 귀족들이 자신들의 고토(古土)만을 생각하여 천도를 주저할 뿐 아니라 사업을 가로막고 방해한다”고 비난하며 왕명을 사칭해 반란을 일으켰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지상이 반란에 동참했다는 증거는 없다. 정지상도 서경천도를 주장하긴 했지만 강경파인 묘청에 비해 그는 온건파에 속한다. 고구려 계승 인식을 가졌고, 금나라에 자주적으로 대응하며 북방을 경략하자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서경을 전진기지로 삼자는 뜻에서 천도를 지지한 것이다. 물론 서경 출신이라는 지역적 성분도 작용했을 테고 말이다.

김부식은 이러한 서경천도운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개경 귀족을 대표한다. 개경의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골수 유학자로서 승려인 묘청이 풍수 운운하는 것도 혹세무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정지상을 그렇게 처단한 이유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고려사]를 보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부식이 평소 정지상과 함께 문장으로 명성이 가지런하였는데, 불만을 쌓아두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묘청과 내응하려 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였다’라고 하였다.” 김부식을 긍정적으로, 묘청과 정지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고려사]의 기록이니만큼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판단된다.

정지상의 뛰어난 글재주가 세상으로 알려질 당시, 고려의 문단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김부식이었다. [삼국사기]를 저술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그의 문장 실력은 분명 탁월했다. 하지만 정지상이 한수 위였기 때문에 김부식이 시기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리랄까?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하루는 정지상이 “사찰의 염불 소리 그치니 새벽 하늘빛이 맑은 유리 같구나”라는 시를 지었다. 이 표현이 마음에 들은 김부식은 이것을 자신에게 주면 나머지 부분을 채워보겠다고 제안했다. 시를 망쳐놓을 거라는 생각에 정지상은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김부식이 모멸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또한 윤휴의 [백호전서]를 보면, 김부식이 “촛불이 다하자 날이 밝아 오려하고(燭盡天將曉), 시가 이루어지니 구절이 향기롭구나(詩成句已香), 뜰안 가득히 사람으로 시끌벅쩍한데(滿庭人擾擾), 장원을 할 사람은 누구일 것인가?(誰是壯元郞)”라는 오언절구의 시를 짓자, 이를 본 정지상이 즉석에서 ‘삼경(三更)·팔각(八角)·낙월(落月)·부지(不知)’를 각 행에 추가하여 칠언절구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시가 훨씬 더 좋았기에, 자신의 재주로는 정지상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김부식이 그를 모함하게 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러한 두 사람의 대립은 정지상이 죽은 후로까지 이어진다. 고려 후기의 명문장가 이규보의 [백운소설]을 보자. 어느 날 김부식이 “버들은 천개의 실로 푸르고(柳色千絲綠), 복숭아꽃은 만 점으로 붉다(桃花萬點紅)”라는 시를 지었다. 그러자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김부식의 뺨을 때리며 “천 실, 만 점을 누가 일일이 세겠는가? 버들은 실실이 푸르고(柳色絲絲綠), 도화는 점점이 붉다(桃花點點紅)라고 고쳐야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왜곡된 질투심이 호적수를 죽음으로 내몰아

김부식에게 정지상은 라이벌이자 넘어서야 할 벽이었다. 그런데 끝내 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자, 왜곡된 질투심을 발휘하여 상대방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지상을 죽인 후, 김부식의 마음은 시원했을까? 질투심을 분투노력하는 동력으로 삼을 수는 없었을까? 정지상을 넘어서고자 계속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 역시 발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김부식은 자신을 성장시켜 줄 호적수를 스스로 제거해버린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62호 (20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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