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청도 몰래길 만든 ‘문화 독립군’ 

경북 청도 비슬산 자락에 파묻혀 사는 패션디자이너 최복호.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유명 디자이너지만, 그는 여전히 도시가 아닌 자연을 좋아한다. 패션디자이너가 산골 청도에서 사는 이유를 들어봤다. 

최영진 포브스 차장 사진 김현동 기자

▎대구 패션계의 산증인 최복호 디자이너는 경북 청도 비슬산 자락에 최복호패션문화연구소를 짓고 갤러리와 야외공연장을 운영한다.
제주도에 올레길이 있다면, 경북 청도 비슬산 기슭에는 ‘몰래길’이 있다!

제주도 올레길이야 일본·영국 등에 수출된 문화상품으로 전 국민이 다 아는 유명한 길이다.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 『자전거 여행』으로 제주도에 한때 자전거 여행 열풍이 불었지만, 지금은 ‘제주도=올레길’이 됐을 만큼 올레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제주도 올레길 얘기를 하다가 누군가 난데없이 ‘경북 청도에도 몰래길이 있는데 유명하데’라고 말하면 대부분 코웃음을 칠 것이다.

청도는 예로부터 반시(홍시)와 소싸움의 고장이다. 청도의 먹거리 반시는 단맛이 일품이고, 짜릿한 소싸움은 청도의 대표적인 볼거리다. 여기에 청도 몰래길도 인기를 끌고 있다. 올레길 짝퉁 냄새가 폴폴 나지만, 인터넷에 몰래길을 검색하면 깜짝 놀라게 된다. 청도의 유명 문화상품으로 떡하니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그맨 전유성과 손잡고 다양한 프로젝트 펼쳐


▎최복호패션문화연구소에 마련된 갤러리는 작품 전시회나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다. 지역주민에게 사랑받고 있다.
몰래길은 경북의 명산으로 꼽히는 비슬산 중턱에서 출발해 헐티재를 넘어가는 트래킹 코스다. 산불 예방을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길을 걷는다. 완주 시간은 걸어서 1시간30분~2시간 정도로 왕복 4시간 거리다. 몰래길을 걷다보면 천에 소원을 써서 걸어놓은 것이나, 마치 단풍잎처럼 나무에 매달린 짜투리 천을 볼 수 있다. 누군가 몰래길에 체험 프로그램을 결합시켰음을 알 수 있다. 비슬산 중턱에서 출발한 몰래길 종착지는 철가방처럼 생긴 공연장 부근이다. 개그맨 전유성씨가 운영하는 코미디 공연장 ‘철가방극장’이다.

몰래길의 시작과 끝 지점에 몰래길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군청에서 만들어 설치한 비석이다. 몰래길을 만든 주인공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 사람은 전유성, 또 한 사람의 이름은 최복호다. 전유성이라는 이름에는 고개를 끄떡이지만, 최복호(65)라는 이름에는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만일 최복호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면 패션계 혹은 문화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몰래길의 시작은 하얀 건물과 몽골 게르처럼 생긴 텐트가 있는 공간이다. 이곳이 최복호패션문화연구소다. 서울과 청도에서 만나 인터뷰를 한 이 사람, 알고보니 너무 유명하다. 대구패션조합 이사장을 지냈을 만큼 대구의 패션계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다. 120억원의 연매출을 올리는 문화패션기업 C&BOKO(Culture & BOKO)를 운영하는 기업가이기도 하다.

대구가 아닌 청도에서도 최 대표가 유명해진 것은 전유성씨와 손잡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문화 독립군’으로 부른다. “청도에 기거하는 사람은 원주민과 이주민, 그리고 원주민도 아니고 이주민도 아닌 이를 독립군이라고 한다. 나는 청도에서 문화 독립군으로 살고 있다.”

자신보다 6개월 전에 청도에 온 전유성씨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를 알아봤단다. “2008년 산골짜기를 찾아 비슬산에 들어왔는데, 그때 전유성씨를 처음 만났다. 프로는 프로가 알아본다고, 딱 봤을 때 그의 안목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만든 대표적인 히트작이 몰래길이다. 원래 이 길은 사람들 눈을 피해 연인들이 자주 이용하던 데이트 코스였다. 몰래길이라는 이름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청도군은 몰래길에 이어 몰래길2를 내놓으면서 트래킹 코스를 확대하고 있다.

최 대표를 설명하는 또 다른 단어는 ‘펀앤락’(Fun & 樂). 평생 그가 붙잡고 있는 화두다. 비슬산 자락에 최복호패션문화연구소를 짓고 청도에 들어온 이유다. “전유성씨는 이곳을 숲속 양장점이라고 부른다.” 최복호패션문화연구소에는 ‘펀앤락’이라는 이름의 갤러리와 샵, 야외공연장, 글램핑 텐트가 자리 잡고있다. “나만 흥겨움에 취할 게 아니라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며 사과밭 3300㎡(1000평) 부지에 복합문화공간을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이곳은 지역 문화예술인의 사랑방이자, 지역주민의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유성씨와 손잡고 한 달에 한 번 공연을 기획한다. 최근에는 가수 민해경씨의 콘서트가 열렸고 노사연, 변진섭, 전영록 등 많은 가수가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대구지역 패션인의 송년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비슬산 자락에 살고 있는 200여 명의 예술인들도 가끔 이곳을 찾는다. “도예가와 식물원 개장을 준비하는 사람과 자주 만난다.”

2014년 7월에는 ‘힐링 글램핑’ 사업도 시작했다. “리조트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사람들에게 자연속에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글램핑을 선택 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기가 좋다”고 최 대표는 자랑했다. 그가 마련한 글램핑 텐트 내부는 매우 고급스럽다. 최 대표가 직접 디자인한 극세사 이불이 있고, 고급 캠핑 브랜드 제품이 풀세트로 갖춰졌다. 며칠을 머물러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다. 글램핑을 이용할 경우 운이 좋으면 최 대표와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패션디자이너는 트렌드에 민감하다. 그런데 왜 최 대표는 도시가 아닌 산속으로 들어왔을까. “사람들은 청담동 또는 뉴욕 거리에서 패션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자연이 있는 곳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 패션의 흐름은 매체를 통해 얼마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최 대표의 작품은 해외에서 자연의 색이 옷에 스며들어 있다는 호평을 받는다.

2014년 12월 10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열린 ‘제7회 코리아패션대상’ 시상식에서 최복호 대표는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지속적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 받은 결과다. “일을 저지르는 편”이라며 남들보다 먼저 해외 진출을 시도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최 대표의 이력은 독특하다. 목회자를 꿈꾸며 대구 계명대 철학과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신이 무섭다’는 이유로 패션계로 뛰어들었다. “외가가 모두 종교 집안이었다. 집에서는 내가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공부하다보니 성직자의 길은 나와 맞지 않았다.” 그에게 패션디자이너의 길을 알려준 이는 교회 목사였다. “넌 손재주가 좋아서 앙드레 김 같은 패션디자이너가 되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을 해준 것. 당시 패션디자이너는 ‘양장쟁이’로 불리며 대접받지 못한 직업이었다.

해외 7개국 24개 매장에서 작품 판매

최 대표는 그 길로 학원을 다니면서 디자이너 공부를 했다. 1973년 ‘의처증 환자의 작품D’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데뷔했다. 제목부터가 독특했던 작품을 눈여겨 본 이가 바로 고 앙드레 김을 배출한 국제패션학원 최경자 원장이다. 최 원장은 그를 연구원으로 발탁했다.

하지만 1974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대구로 낙향했다. 당시 대구가 섬유산업의 중심지였지만, 패션디자이너로서 성장하려면 서울에서 활동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다. “마음앓이를 심하게 해서”라며 낙향 이유를 설명하며 최 대표는 웃었다. 실연의 아픔 때문이었다.

“지역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면 많은 제약이 있다. 하지만 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남들보다 일찍 해외 진출을 시도했고, 시류의 변화에 따라 백화점과 홈쇼핑 등에 진출해 성공했다.”

최 대표가 해외 시장을 두드린 것은 1980년대부터다. 실패도 많이 했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자신의 옷을 들고 해외 매장을 뚫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 결과물은 놀라울 정도다.

최 대표의 옷은 해외 7개국 24개 매장에서 팔리고 있다. 특히 쿠웨이트의 경우 8개 패션몰에서 최 대표의 옷을 발견할 수 있다. 2014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서울컬렉션에 참석한 최 대표는 쿠웨이트 바이어와 현장에서 20만 달러(약 2억원) 계약을 맺기도 했다.

해외 진출의 경험을 살려 주력한 것이 디자이너와의 교류였다. “패션의 중심은 이제 유럽과 미국을 거쳐 아시아가 될 것이다. 아시아 시장이 열릴 것을 대비해 해외 디자이너와 다양한 교류를 했다. 아시아에서 열리는 패션쇼에 가장 많이 초청을 받는 디자이너가 나일 것이다.” 그는 상하이·홍콩·파리·뉴욕 등 세계적인 패션쇼의 초청을 받고 있다. 2012년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패션위크에 참여했을 때는 배우 우피 골드버그가 ‘The View’라는 자신의 토크쇼에서 최 대표의 작품을 입고 출연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한 패션전문 매체는 “최복호 디자이너의 기발하고 유쾌한 프린트와 의상은 한국에서 레이가와쿠보(일본을 대표하는 패션하우스 꼼데가르송 디자이너)를 발견한 것 같다”는 극찬까지 했다.

최 대표의 이름이 일반인에게도 각인된 계기는 2010년부터 롯데홈쇼핑에서 3년 동안 매출 1위를 차지하면서부터다. 당시 최 대표의 브랜드는 연매출 170억원을 올릴 정도였다. “1990년대 말 홈쇼핑에 도전했을 때는 실패했다. 그 경험을 살려 15년 동안 준비해 대박을 친 것이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과감하게 추진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최 대표는 디자이너로서 이룰 것은 이뤘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젠 시간이 없다”면서 더욱 재미있는 삶을 만들려고 한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며 그는 웃는다.

최 대표에게 2015년 계획을 물었다. “목표는 없다. 목표가 없는 곳에서 목표를 만들어 가고 싶다.”

- 글 최영진 포브스코리아 기자 사진 김현동 기자

201501호 (2014.12.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