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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대기업 DNA,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2) LG그룹 - 도전과 끈기의 리더십으로 “초우량기업 LG 실현”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포브스코리아와 한국경영사학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특별기획 ‘한국 10대기업 핵심 DNA, 창업자들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의 5월호 커버스토리는 LG그룹 창업주 일가의 기업가정신이다. 2015년은 특히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취임한지 2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로 구인회·구자경· 구본무 LG그룹 3대가 면면히 이어온 기업가 정신을 조명했다.

▎구본무 회장 20년은 도전과 혁신의 20년이었다. 구 회장은 취임 후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전자·화학·통신서비스의 3대 핵심사업을 집중 육성했고, 배전의 노력으로 그에 걸맞는 성과를 냈다.
2015년은 LG그룹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해다. 구본무(70) 회장의 취임 20주년이자 럭키금성에서 LG로 기업 이미지(CI)를 바꾸고 LG브랜드로 출범한지 2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1995년 2월 22일, LG그룹은 구자경 2대 회장의 이임식과 3대 회장의 취임식을 함께 개최했다. 재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그만큼 준비경영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1995년 2월 22일, 구자경 명예회장은 LG그룹 깃발을 힘차게 한번 흔들고는 장남인 구본무 신임 회장에게 그룹의 총수 자리를 흔쾌히 넘겨주었다.
이날 구자경(90) 명예회장은 LG그룹 깃발을 힘차게 흔들고는 장남인 구본무 신임 회장에게 흔쾌히 넘겨주었다. 럭키(LG화학) 과장으로 시작해 현장에서 20년의 경영수업을 받고 지천명의 적지 않은 나이에 LG그룹 총수의 자리에 오른 구본무 신임 회장의 각오는 남달랐다. 구 회장은 “정도(正道)경영으로 고객·사원·주주·사회를 만족시키는 세계초우량 LG를 만들어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 임직원들에게 도전정신을 일깨우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 전 부문의 역량을 세계 초우량 기업 수준으로 끌어올리자”고 강조했다. 그리고 “최고의 인재들이 저마다의 능력과 창의를 마음껏 펼치는 일등회사, 진정한 프로들의 회사, 공정하고 합리적인 회사를 만들어나가자”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로부터 20년, 혁신과 정도경영으로 초우량기업을 만들겠다는 구본무 회장의 약속은 실제로 현실화 됐다. 1994년 말 30조원이었던 LG그룹의 매출은 2014년 말 150조원으로 5배 늘었다. 해외 매출은 10조원에서 100조원으로 10배, 그룹 시가총액은 7조원에서 67조원으로 10배가량 불었다. 많은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이 1999년 LIG의 계열분리를 시작으로 LS(2003년)·GS(2005년)·LF(2007년) 등이 LG에서 분리되는 악조건 속에서 거둔 성과라는데 놀란다. LG그룹은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고서도 지난 20년 동안 임직원 수가 10만 명에서 22만 명으로 증가했고, 해외법인도 90개에서 290여개로 늘어났다.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런 빛나는 성과에도 구본무 회장은 그 흔한 언론과의 인터뷰도, 거창한 행사 하나도 개최하지 않았다. LG가를 잘 아는 인사들에 따르면 소탈하고 근검 절약이 몸에 밴 능성 구씨(綾城 具氏) 집안의 가풍을 그대로 빼닮았다.

구본무 회장의 기업인생은 선대 창업주와 2대 회장을 통해 면면히 이어내려온 기업가정신의 계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부터 68년 LG의 역사를 일군 세 명의 거인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LG그룹은 연암(蓮庵) 구인회(1907~1969년)가 창업주다. LG역사는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의 창업으로부터 출발한다. 연암은 국내 최초로 플라스틱공업, 전기, 전자, 무역, 석유화학, 전선, 통신, 언론 등 각 분야에서 근대적 기업군을 일궈낸 선구적 기업가로 꼽힌다. 경영 사학자들에 따르면, 연암의 경영이념은 인화단결주의, 가족주의, 근검절약주의, 도전과 개척주의, 인재중용주의, 기술혁신주의, 국제화와 정도주의, 사업보국주의, 국민생활편의주의로 요약된다. 그중 연암의 기업가정신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오늘날 LG의 경영이념인 ‘인간 존중의 경영’으로 발전한 ‘인화단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업자 연암의 생활철학이며 경영사상이기도 한 인화단결은 말 그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화합하며 한마음, 한 뜻으로 여러 사람이 한데 뭉쳐 단합하는 것이다.

LG그룹의 창업정신 ‘인화경영’


▎1. LG가의 기업가들은 인화경영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57년 간 이어진 구씨·허씨 두 가문의 동업 관계는 끝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우호적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 2. 1993년 조세의 날 기념식에서 구본무 당시 부회장이 금탑산업훈장을 받고있다. LG가는 후계자에 대한 혹독한 경영수업으로 유명하다.
인화경영은 LG그룹 형성기 때부터 시작된 가족중심주의에서 배태됐다. 경남 진양에서 연암의 집안은 구교리댁으로 통했다. 그의 조부 구연호가 과거 시험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를 지냈기 때문이다. 연암은 구교리댁의 전통적인 유교주의 가풍에서 배워나온 가족주의 사상을 그대로 기업 경영활동에 접목시켰다. 연암이 나고 자란 경남 진양군 지수면의 생가에 걸려있는 가훈의 10대 덕목 중에는 지금도 ‘형제간과 종족 사이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마라’는 내용이 있다. 경영사학자들은 형제간의 우애와 근면 성실함을 강조한 이런 집안 내림이 LG의 인화 경영의 뿌리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연암은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며 자식들에게 늘 인화를 강조했다고 한다.


구자경 명예회장으로 경영권이 승계될 때 얘기다. 연암이 63세를 일기로 1969년 별세하자 세상의 모든 관심이 LG가로 쏠렸다. 한국 재계에서 정상을 다투는 재벌의 총수가 생을 마감하였으니 누가 다음 총수가 되느냐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 재계와 언론들은 당시 럭키금성에 포진하고 있는 6명의 형제와 6남 4녀 등 10명의 자녀들, 사돈가의 허씨들과 창업과정 공신들이 이해다툼을 벌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 기대는 보기 좋게 어긋났다. 럭키금성의 양대가문인 구씨, 허씨네 집안은 옛날과 같이 화목하기만 했다. 연암이 별세한지 6일 후인 1970년 1월 6일 유교적 집안의 가풍답게 장자인 상남(上南) 구자경을 럭키그룹의 제2대 회장으로 추대하고 장자승계의 원칙을 따라 취임했다. 이 장면은 한국 재계사에서 유교적 가풍에 따른 2세 경영자의 장자 승계가 처음 이뤄진 날로 기록되었다. 당시 재계에서는 상남 구자경이 2대 회장으로 취임하자 모두들 놀라워 했다. 재계 주변에서 “구씨네 집안 참 대단하네, 조카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숙부들이 그 밑에서 일하다니 신기하지 않는가”라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인화단결을 바탕으로 성장해 온 LG그룹의 두드러지는 경영문화는 구본무 회장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구씨 가문이 GS그룹의 허씨 가문과 57년간의 성공적 동업 관계를 유지한 후 아무런 잡음 없이 ‘아름다운 이별’을 할 때도 인화경영이 빛을 발한 것이다. 1999년 LG화재(현 LIG손해보험)가 먼저 그룹에서 떨어져나갔다. 2003년엔 LS그룹이 분리됐다. 2005년 1월에는 3대에 걸쳐 57년 간 이어진 구씨·허씨 두 가문의 동업 관계가 GS그룹과의 분리로 아름답게 끝났다. 반세기 동안 두 집안을 이어주었던 것은 신뢰와 의리였다. 분리된 가문들과는 아무런 잡음이 없었고, 지금도 우호적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후계자 선정과 계열분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재계 3, 4세들이 구 회장 부자(父子)를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건희 이화여대 명예교수 등 『연암 구인회 상남 구자경 연구』를 진행했던 학자들에 따르면 LG그룹이 초창기에 인화라는 경영이념을 명시한 것은 초창기 럭키금성에 참여한 인적 구성의 복잡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초 허씨 집안, 구씨 성의 ‘회’자 돌림의 여러 형제들, ‘자’자 돌림의 2세들, 그리고 ‘본’자 돌림의 손자들, 여기에 창업주인 연암을 도운 경영자들과 공채로 뽑은 인재들 등등 ‘인화단결’을 강조하지 않고는 오늘의 LG로 성장할 수 없는 복잡한 요소들이 초창기 럭키금성그룹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가족주의 경영방식은 구본무 회장 대에 접어들면서 변화의 고비를 맞는다. 1995년 취임한 구본무 회장은 혁신을 통한 ‘강한 기업’으로의 변신을 예고했다. WTO 체제 출범 등 본격적인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글로벌경영을 강화하고 젊고 도덕적이고 유능한 인재들로 세대교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데 구자경 명예회장과 구본무 회장이 의견일치를 이룬 것이다. 이후 구본무 회장이 주창한 전문경영인에 의한 자율경영체제를 위해 창업회장단의 과감한 용퇴가 뒤따랐다.

LG기업 연구자들에 따르면, 구본무 회장 취임 무렵인 1995년 LG그룹의 최고의사결정기구는 그룹정책위원회로서 회장과 9명의 참모 등 10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그룹정책위원회는 구자경 회장 때의 9인 정책위원회와 비교하면, 그 분위기가 많이 바뀌게 된다. 구자경 회장 시대에는 70세 안팎의 구·허씨에 의한 양가인사가 이끌었고, 회의는 상향보고식이었다. 구자경 회장 시대의 그룹정책위원회 위원은 상남 구자경 회장과 허준구·구태회·구평회·허신구·구두회·구자학·이헌조·변규칠 씨 등이었다고 한다. 9명 중 7명이 선대로부터 이어내려온 구씨·허씨에 의한 양가 경영인들이었다. 그런데 구본무 회장 체제하에서는 이들 9인의 위원 중 구자학씨만 남고 모두 퇴진했다. 이헌조·변규칠만 유임됐을 뿐 허창수·정영의·성재갑·이문호·허동수·구자홍씨 등 새로운 경영진으로 교체되었다. 구·허씨의 가계가 아닌 사람이 3명이나 추가되는 등 소유경영인 대 전문경영인의 비율이 과거 7대 2에서 5대 5로 달라졌다.

이처럼 평균 연령이 20년 정도 젊어진 구본무체제하의 그룹정책위원회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상호토론을 통해 그룹의 방향과 사업 비전을 결정할 수 있었다. 아울러 LG 특유의 ‘사업문화단위’(CU)의 수장이 회장 자문기구를 통하여 전문경영인을 선발, 임명하는 등 전문경영인체제를 제도적으로 보장해 자율경영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가족주의 경영의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문경영인체제의 자율경영으로 이행한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만하다.

자율경영주의와 혹독한 후계자 경영수업


▎1. 재계에서 구자경 명예회장과 구본무 회장은 인내와 끈기의 기업인으로 불린다. 사진은 구자경 부자의 즐거운 한때. / 2. 남들이 하지 않는 사업에 먼저 뛰어드는 연암 구인회의 사업가적 기재와 기질이 지금의 LG를 만들어 냈다. 1961년 국내 최초 국산화한 자동전화기로 시험통화하고 있는 구인회 LG 창업회장. / 3. 상남 구자경은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를 내걸고 자신이 직접 고객을 위한 서비스에 나서는 등 솔선수범했다.
LG그룹의 경영철학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자율경영은 구자경 회장 때부터 LG그룹의 사훈으로 추진되었다. 구자경 회장의 경영이념은 고객가치창조주의, 인간존중경영주의, 자율경영주의, 혁신주의, 초우량기업주의, 책임경영주의, 노사화합주의, 인재중시주의로 요약된다. 그중 자율경영이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힌다. 구자경 명예회장에 따르면 자율경영은 첫째, 능력 있는 후계자를 키워서 믿고 맡기는 경영. 둘째, 현장을 중시하여 현장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영. 셋째, 고민과 고통의 책임이 수반되는 경영. 넷째,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는 전문가적 경영. 다섯째, 팀워크의 경영으로 요약된다.

LG그룹의 자율경영은 독특한 후계자 수업으로 나타났다. 자율경영은 기본적으로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하여 그것을 수행해 낼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에게 경영을 맡기는 LG가의 문화 때문이다. 능력있는 인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육성해야 하며, 사명감과 애정을 가지고 판단능력과 깊이를 더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 LG가의 오랜 경영이념이다.

이에 따라 LG가의 후계자들은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아야 했다. 재계에서 구자경 명예회장과 구본무 회장은 인내와 끈기의 기업인으로 불린다. 그것은 그룹의 후계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오랜 경영수업을 거치며 단련됐기 때문이다. 창업주인 구인회와 아들 구자경 사이의 나이는 18세 차이다. 구인회가 41세에 락희화학공업사를 창업할 때, 이미 구자경은 23세의 헌헌장부였다. 부친 사업의 창업동반자로 럭키금성을 20여 년동안 성장시키면서 부친으로부터 후계자 경영수업을 충분히 받았다. LG그룹의 후계자 수업은 유교문화에서 장자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가족주의 경영과 어우러지면서 LG만의 독특한 승계문화를 만들게 된다.

연암은 때때로 경영수업을 받기 위해 전무의 자리에 있던 장남 구자경을 불러 앉혀놓고 이렇게 일깨워주었다고 한다. “본시 맏이란 일이 고된 법이다. 남들은 놀아도 맏이는 놀 새가 없다. 묽은 걸 알고, 된 걸 알아야 남을 다스려 나갈 거 아니냐, 너는 아버지를 대신할 책임 있는 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집안 분위기 때문에 구자경은 장남이라는 특혜를 누려보지 못했다. 창업주 연암은 왜 장남에게 그토록 어려운 일만 시키느냐고 주위사람들이 걱정하자 “대장장이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담금질을 되풀이 하여 무쇠를 연단하는 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구자경도 아버지인 연암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장자(莊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 “큰 일을 하면서도 지엽말단의 작은 일들을 저버리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하고,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소홀히 하지 않은 가운데 능히 대국을 내다보는 슬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견뎌냈다고 한다.

후계자에 대한 이같은 혹독한 경영수업은 현장을 중시하는 LG의 경영문화와 맞닿아 있다. 어느 기업이건 그룹의 최고경영자들이 자신의 현장에 대해서 손금보듯 자세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일본의 한 경영연구소가 대규모 제조업체들을 상대로 각 조직계층이 기업내의 문제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를 조사해 보았더니 최고경영자층은 납기의 지연이나 고객서비스 문제점 등 기업내의 문제점을 약 4%밖에 알고 있지 못하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능력있는 후계자를 정해 일찍부터 현장경영을 경험하게 하면 이런 걱정은 덜게 된다. 상남은 “나는 고된 경영수업 덕분에 어느 공장에 가도 손때가 묻지 않은 기계가 없었고, 어느 상자에 어떤 공구가 들어있는 지를 환히 파악할 정도가 되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룹내에서 상남만큼 그룹을 미시적으로나 거시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을 때 상남은 다른 이들의 반대없이 회장에 취임할 수 있었다.

이런 승계 문화는 3세인 구본무 회장의 경영수업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1975년 LG화학의 과장으로 입사한 그는 입사 15년만인 1989년에야 그룹 부회장직을 맡아 그룹 경영에 발언권을 낼 수 있었다. 다른 그룹 총수의 후계자들은 임원급으로 회사에 발을 들여놓은 뒤 4~5년이 지나면 경영권을 이어받았지만 LG가는 이처럼 오랜 현장 수련을 거친 뒤에야 경영 대권을 물려주었다. 앞서 1995년 그룹회장의 이임식과 취임식을 동시에 할 수 있었던 자신감이 여기에서 비롯됐다. 그룹 총수가 금쪽처럼 아끼는 장남이지만 밑바닥에서 경험을 혹독하게 쌓은 후계자는 현장을 아는 따뜻한 경영자의 자질을 갖추게 마련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집단 해고 소문이 무성하던 2008년, 구본무 회장은 “사정이 어렵다고 함부로 사람을 내보내거나 안 뽑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려 대량해고를 기정사실화하던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LG그룹 연구자들은 이를 두고 구본무 회장이 혹독한 경영수업을 통해 현장에서 고생하는 이들의 노고를 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인간존중의 생생한 사례로 평가한다.

연암과 상남의 개척주의 정신


▎늘 소탈하며, 겸손이 몸에 배어있는 구본무 회장. 그가 제창한 ‘LG Way’는 LG그룹 모든 임직원의 기업문화이자 사고 및 행동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LG가를 특징짓는 또다른 기업가정신은 도전과 개척주의 경영이다. 연암 구인회의 도전과 개척주의 이념은 첫째, 유교적 인습을 과감히 타파하고 당시로서 택하기 어려운 상업의 길로 투신하는 도전정신. 둘째, 락희의 창업과 화학공업, 전자공업의 새 지평을 여는 도전과 개척주의 정신. 셋째, 국가기간산업의 개척과 성장 등으로 요약된다. 락희화학공업사(1947년)와 금성사(현 LG전자, 1958년)를 거쳐 지금의 LG그룹을 만든 데는 구인회 회장 특유의 개척가 정신이 있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사업에 먼저 뛰어드는 연암의 사업가적 기재와 기질이 지금의 LG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여성이 있는 한 영원한 것은 화장품이다”며 시작한 크림 생산이 유리 용기 때문에 자꾸 깨지는 어려움을 겪자 재빨리 플라스틱 사업을 펼쳤고 용기 제조 기술을 기반으로 라디오·TV·세탁기 등 전자 제품의 외장을 만들면서 전자 사업에 뛰어들었다.

상남 구자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을 하며 정보화시대 제 3의 산업 혁명기를 성공적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개척가였다. 상남은 1970년 1월에 창업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 총수가 된 후 1994년 12월까지의 25년 동안 LG그룹(당시 럭키금성그룹)을 이끌면서 선친인 연암의 기업가정신에 바탕을 둔 LG정신을 계승하여 경영혁신을 주도해 나갔다. 그가 1983년 1월 5일자 <세계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기업가정신을 보자.

“나의 경영철학이자 우리 그룹의 일관된 기업가정신이기도 한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인화를 통해 집단적인 창의를 발현시키는 일이다. 이는 모든 개개인의 활동을 창조적인 집단 활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며, 이 결과 기업발전과 사회복지가 동시에 추구되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산업고도화를 선도해 나가는 일이다. 우리 기업은 창업 이래 언제나 독창적인 기업활동을 선도해 왔으며, 앞으로도 첨단 미래산업 등 미개척 분야에 적극 도전하여 주요 제품의 국산화를 위한 기반을 구축해 나갈 것이다. 셋째, 부단한 연구개발을 통해 기업활동의 질적인 선진화를 추구해 나가는 일이다.”

이같은 상남의 경영방침과 경영철학은 구인회 창업회장으로부터 전승되어 현재까지 LG그룹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상남이 강조했던 개척주의, 도전주의 문화는 LG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기업가정신의 특징이기도 하다. 최고의 기업가치를 추구하고 일등을 지향하는 사람은 결코 남의 눈치를 살피거나 상사의 지시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과 긍지를 지니고 능동적으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LG가의 개척정신은 구본무 회장 때에 이르러 더욱 꽃을 피우게 된다. 구본무 회장이 취임해 몇차례 위기를 넘겨가는 과정도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의 산물이다. 취임한지 3년도 안 돼 닥친 1997년 IMF 외환위기가 1차 시련이었다. 각별한 애정을 쏟은 반도체 사업을 정부의 ‘빅딜’ 압박으로 포기해야 했다. 계열분리로 당시 알짜로 분류됐던 LG화재·LG산전·LG칼텍스 등이 떨어져 나가면서 LG의 내수기반이 흔들릴 것으로 우려했지만 구 회장은 배수의 진을 치고 위기를 넘겼다. 구본무 회장은 LG를 선택과 집중의 전략에 따라 전자·화학·통신서비스 중심 기업으로 새로 도약하겠다는 비전을 내걸고 특유의 뚝심과 도전으로 이겨냈다. 그의 구상대로 LG는 이후 안정적인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내수 중심이던 사업 체질을 확 바꾸고 매출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거두는 수출기업이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구본무 회장의 정도경영과 시장선도


LG그룹의 경영이념은 3대에 걸쳐 발전 과정을 겪는다. 상남은 LG그룹의 정신적 지주로 삼아온 창업주 연암의 ‘인화단결·개척정신·연구개발’ 경영이념을 진일보시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으로 발전시켰다. 기업의 목적은 사람을 신뢰하고 소중히 여기는 인간존중의 경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한 구자경 회장이 ‘개척정신과 연구개발’을 진일보시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로 집약하고, ‘인화단결’의 이념을 승화시켜 ‘인간존중의 경영’이념으로 재정립하게 된다.

이같은 LG그룹의 경영철학은 구본무 회장에 이르러 정도경영으로 발전된다. 구본무 신임회장은 정직과 공정을 바탕으로 하는 ‘정도경영’을 새로운 LG시대의 경영철학으로 확립하고 깨끗하고 투명한 기업경영, 일등을 추구하는 기업풍토를 조성함은 물론 기업의 사회적 책임 수행을 강조하는 초우량기업 LG를 만들어낸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정도경영, 능력과 업적지향의 성과주의 문화, 최고의 기업가치창조형 일등주의문화 및 도전주의 문화 등 네 가지를 새로운 LG문화로 제시해 정착시켜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1월, 럭키금성그룹을 LG그룹으로 변경함으로써, 21세기의 세계초우량기업을 향한 시동을 걸었다. 1947년 연암에 의해 창업돼 락희그룹으로 일궈놓은 것을 1970년 1월 상남이 이어받아 2세 경영체제의 구축과 함께 럭키금성그룹으로 성장시켰고, 그 후계자로서 구본무 회장에 의해 21세기를 향한 LG의 새로운 경영 이정표가 제시된 것이다.

이후 정도경영은 구본무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LG그룹은 투명하고 공정한 거래문화의 정착을 위한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윤리규범이 제정되고 불공정사례신고센터가 설치됐으며, 1995년 3월에는 LG공정문화추진위원회가 구성됨으로써 정도경영을 바탕으로 하는 초우량LG의 방향타를 확고히 했다. LG 그룹이 추구하는 정도경영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외적으로 시장에서 정정당당한 경쟁과 호혜적인 협력을 통하여 세계적 초우량기업으로 성장하고, 대내적으로는 공정·정직·성실을 근간으로 하는 공정기업문화를 정립하려는 목적이었다.

정도경영의 실현을 위해 LG그룹은 2003년 국내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대기업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어온 순환출자의 고리를 끊고 사업자회사는 오로지 본연의 자기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2005년에는 보무도 당당하게 ‘LG Way’를 선포했다. ‘LG Way’는 경영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을 LG의 행동 방식인 ‘정도경영’으로 실천함으로써 궁극적인 지향점인 ‘일등 LG’를 달성하자는 내용이다. 지금도 ‘LG Way’는 LG그룹 모든 임직원의 기업 문화이자 사고 및 행동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도전과 끈기로 ‘일등LG’ 실현하는 구본무 회장


▎구본무 회장은 LG 디스플레이를 세계 1위로 올려놓았다. 구본무 회장이 3월 11일 열린 ‘연구개발성과보고회’에서 LG디스플레이의 아트슬림 LCD가 탑재된 TV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다.
구본무 회장의 최근 3년간의 화두는 ‘시장선도’와 ‘철저한 실행’이다. 고객가치에서 일등하는 LG, 시장을 선도하는 LG, 100년을 넘어 영속하는 LG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구 회장은 그 배경으로 “갈수록 예측하기 힘든 앞으로의 경영환경에서 이제 일등기업이 아니면 성장이나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냉엄한 현실”이고, “결국 시장선도 상품으로 승부해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스스로가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실제 구 회장은 “창립 이래 60년 동안 LG 경영철학은 시장선도와 맥을 같이해 왔고, 글로벌 시장에서 앞서 나간 경험과 무한한 잠재력, 그리고 반드시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더해 시장선도를 철저하게 실행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LG Way’로 상징되는 구본무 회장 20년사는 도전과 혁신의 20년이었다. 구 회장은 취임 후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전자·화학·통신서비스의 3대 핵심사업을 집중 육성했고, 배전의 노력으로 그에 걸맞는 성과를 냈다.

우선 LG는 현재 전자부문 디스플레이 세계 1위다. 구회장은 총 40조원 이상을 투자해 LG디스플레이를 세계 일등기업으로 키웠다. 경북 구미에서 첫 번째 공장을 가동할 당시 임직원 수는 1100명, 매출은 15억원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임직원 3만2500명에 27조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LG전자는 세계가 주목하는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TV와 스마트폰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LG TV는 세계 최초로 올레드(OLED) TV를 상용화했다. 스마트폰도 G시리즈를 출시하며 세계 3위(매출액 기준)를 달리고 있다. 통신부문에서는 LG유플러스가 LTE로 시장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그룹의 모태인 럭키에서 시작한 LG화학도 20년 동안 연구개발 노력을 기울인 중대형 2차전지 사업이 이제 주력사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편광판, ABS(충격과 열에 강한 합성수지)부문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단기 성과를 내는데 급급하지 않고 부단히 도전해 결실을 보고야마는 구본무 회장 특유의 ‘인내’와 ‘끈기’의 리더십이 이런 성장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다.

구본무 회장은 지난 1월 임원들과의 20년 기념 모임에서 “LG 브랜드가 더 나은 고객의 삶을 위한 혁신의 상징이자 진정한 ‘일등 LG’로 성장하여 영속할 수 있도록 CEO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해 달라”고 주문했다. 지난 1월 ‘글로벌 CEO 전략회의’ 후 LG브랜드 출범 20주년과 회장 취임 20주년을 기념하는 조촐한 ‘20-20’ 행사 자리에서 최고경영진들에게 제시한 비전이다.

그가 말하는 일등 LG는 무한경쟁 시대의 경영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LG그룹이 추구하는 정도경영의 정신에 입각하여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하며 LG의 구성원 모두가 세계의 최고가 되어 세계적 초우량기업을 만들어나가자는 주문이다. 각자가 만들어내는 제품이나 서비스 혹은 단 한 장의 보고서에서도 세계 최고의 수준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다. 그런 점에서 보면 21세기의 초우량 LG그룹을 담금질하고 있는 구본무 회장은 2002년 월드컵 때 ‘아직 배가 고프다’며 승부욕을 불태웠던 히딩크 감독처럼 아직도 배가 고픈 것이다.

포브스의 이번 취재에 도움을 아끼지 않은 LG그룹 관계자는 “LG 임직원들은 창업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차세대 새로운 성장엔진을 발굴하고 시장을 개척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며 “20년 자축행사를 여는 것보다 뚝심있게 내실을 다지는 것이 LG의 기업 DNA”라고 설명했다.

LG가의 기업가정신을 거론하면서 마지막으로 LG가 특유의 근검절약주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구본무 회장은 어릴 적부터 선친으로부터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쓰는것이 더 중요하다. 돈을 낭비하고 천하게 쓰는 것을 우리 집에서는 가장 큰 악덕중 하나로 여겨 왔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자라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매년 <포브스> 선정 한국의 50대 부자 순위(올해는 18위)에 꼽히는 그는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 이는 창업주인 연암에서 비롯된 독특한 용전(用錢)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연암은 특히 절약하고 저축하되 돈을 쓸 때는 허세부리지 않고 필요한 곳에 서슴없이 쓰는 기업인으로 유명했다. 꼭 써야 할 큰돈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내놓는 배포를 가졌으면서도 비록 푼돈일지라도 사치나 허세를 위해 낭비하는 것을 큰 잘못으로 아는 그런 성품이었다. 다음과 같은 일화는 유명하다.

LG가 3대의 아름다운 용전(用錢)철학


▎2014년 10월 23일 오전 서울 강서구 마곡산업단지에서 열린 LG사이언스파크 기공식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구본무 LG 회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본격적인 착공을 알리는 스크린터치패널을 누른 후 박수를 치고 있는 모습.
한국전쟁 이후 부산의 공장들이 활발히 가동하고 럭키치약이 미제치약을 물리치면서 시장을 석권해 가고 있던 무렵, 락희화학은 서울의 반도호텔 빌딩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연암은 일류회사의 사장이었다. 당시 락희화학 김주홍 상무는 신설동에 살면서 아침 저녁 미니 합승버스로 출퇴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그 차에 구인회 회장이 올라타는 것이다.

“택시를 이용하지 않고 미니 합승버스를 타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나는 합승버스가 좋습니다. 돈 몇 푼 벌었다고 거들먹거리며 흥청망청 쓰는 사람들을 보면 딱해서 못 보겠습니다. 돈이란 있을 때 아낄 수 있는 것이지 없는데 무엇을 아낀다 말이요. 그래서 옛말에도 돈이란 벌기보다 쓰기가 어렵다고 했소. 부자라는 것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아니라 쓰지 않고 저축하면서 아끼는 것이 부자가 되는 법이요. 합승버스를 타면 회사까지 오는데 뭣 때문에 휘발유 없애고 길바닥에 돈 뿌리며 택시 탄다는 말이요.” 여기까지만 들으면 영락없는 구두쇠 소리나 듣기 마련이다.

하지만 연암 구인회 회장은 인색한 기업가가 아니었다. 일제 말기에 백산 안희제에게 독립운동자금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1만원을 선뜻 건네준 기업가였다. 1969년에는 인재양성을 위해 연암문화재단을 설립·운영하는 등 큰 돈을 쓰는 데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LG연암문화재단은 1970년부터 지금까지 2900여 명의 석·박사 대학원생들의 학비를 지원하는 ‘연암장학생 지원사업’을, 1989년부터는 인문사회·이공계 대학교수 700여 명에게 1년간 해외연구를 지원하는 ‘연암해외연구교수’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상남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LG상남도서관은 구자경 명예회장이 건축가 고 김수근씨가 설계한 사저를 LG연암 문화재단에 기증해 1996년 도서관으로 개관한 것이다. 근검 절약이 몸에 배인 그는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자리잡은 자신의 사저를 국내 최초의 디지털 도서관이자 과학기술 전문도서관으로 흔쾌히 내놓았다.

근검절약 정신은 구본무 회장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특별취재팀은 자료를 수집하다 재미있는 기록을 발견했다. 구본무 회장이 취임 이듬해인 1996년 허례허식을 없애자는 생활개혁운동을 펼치고 절약한 돈을 장학기금으로 전달했다는 뉴스였다. 구본무 회장은 당시 연말연시에 기업체에서 의례적으로 보내는 연하장 안보내기운동을 펼쳐서 절약한 1억원을 우편집배원의 자녀들을 위한 장학단체인 윤당체우장학회 희사해 화제가 되었다.

지난 2000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설립된 공연예술 공간 ‘LG아트센터’도 LG그룹 전통의 용전철학을 보여주는 사례다. 연면적 7000평의 공간에 객석 1100개를 갖춘 최첨단 공연장인 LG아트센터는 문화예술 창작과 교류를 통해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설립 이후 LG는 530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아트센터의 안정적인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돈을 쓸 때는 낭비하지 않고 필요한 곳에는 서슴없이 쾌척할 줄 아는 LG가 기업인들의 아름다운 돈씀씀이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201505호 (201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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