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전경일의 경영리더십 - 3대 국왕 태종 

미래 권력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창업 파트너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태조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새로운 국면을 열었고, 창업에서 수성으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을 충실히 담당해 냈다. 한국 사상 가장 다이내믹한 국가경영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태종은 권력을 호랑이 등에 탄 것으로 여겼다. 자칫하면 호랑이에게 삼켜 먹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진은 태종삼호자도 (73.5x50.4cm), 우승우. / 중앙포토
정치를 예술로 승화시킬 줄 알았던 국왕, 조선 초의 국가경영 초석을 최상위로 단단하게 놓은 국왕, 국가경영권 강화에 거의 모든 것을 건 국왕, 처남은 물론 아들의 장인까지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제거해 낸 비정한 창업 시기의 국왕, 역대 국왕 중 가장 뛰어난 정치 사상가이자 비전 실천가... 조선의 제3대 국왕, 태종 이방원에 대한 이 같은 비유는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나아가 그를 시대가 만들어 낸 풍운아이자, 불나방 같은 혁명적 경영자라고 한다면, 이 또한 틀린 얘기가 아닐 것이다. 권력이 허망하다해도 권력이야말로 세상을 만들어내는 가장 강한 힘일 수밖에 없으니 창업 군주들이 힘을 좇는 건 당연하다 하겠다. 태종 이방원, 그가 펼친 리더십의 비밀은 무엇일까?

한 시대의 리더로서 태종을 정의하자면, 그는 너무도 ‘강렬한 불꽃같은 인물’이자 ‘가장 컬러풀한 욕망을 지닌 국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 창업의 교착상태를 단칼에 끊고자 창업에 가장 걸림돌이었던 대유(大儒) 정몽주를 선죽교까지 쫓아가 격살시킴으로써 정국을 일시에 전환시키며 건국의 물꼬를 트는 결단력을 보였다. 포은이 제거된 후 3개월 만에 조선이 창업되었으니 고려로서는 얼마나 큰 뿌리가 뽑혀 나간 것이자, 조선으로서는 얼마나 큰 창업의 걸림돌이 빠져나간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비전을 실천하고자 한 점에서 태종은 추진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태종 이방원은 애초에 고려의 신하였다. 우왕 8년(1382년) 문과에 급제했고, 예문관제학까지 지냈다. 고려 조정에 들어가서 고려가 지속가능한 국가가 될 수 없음을 일찌감치 깨닫고, ‘화가위국(化家爲國)!’, 즉 ‘집안을 일으켜서 반드시 나라를 세우겠다!’라는 뜻을 세웠다. 고려 왕조로서는 강력한 미래의 강적이 신하의 모습으로 내부에 들어 온 격이었다.

노회함과 슬기가 어우러진 경영

태종은 고려 말 태조 이성계가 신흥세력으로 부상할 때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며 급부상한다. 부친을 도와 권력을 만드는 데 동참한 그는 혁명의 동지였으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미래의 권력을 만들어 내는 데 끝내 성공한 창업 파트너였다. 흔히 창업군주가 그렇듯 그의 리더십엔 비인간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행적엔 시종 피비린내가 함께 했다.

권력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최대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삼봉 정도전을 비롯해 남은, 심효생 등 태조의 최측근들과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 방번 등을 제거했다. 이른바 무인정변(태조 7년 1398년 8월 26일)이다. 그리고 2년 뒤(정종 2년, 1400년), 형인 희안공 방간과 다툰 권력 쟁투(제2차 왕자의 난)에서 마침내 권력을 공고히 한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스스로의 힘으로 열어갔다. 태종의 최대 탁견이라 할 만한 것은 세자 이제(양녕대군)를 폐출(태종 18년 6월 3일)하고 충녕을 왕세자로 삼은 일이다. 이는 적장자를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로 그 자신이 정변을 일으켰던 무인정변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닫힌 패러다임이 아닌 열린 패러다임의 전형으로 이는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의사 결정이 된다. 그의 뒤를 이은 세종에 이르러 태평성대와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변혁의 시기, 사상적으로 부유(浮游) 하던 여말-선초의 대전환기에, 그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을 했다. 유학적 질서를 세워 사상적 기초로 삼았고, 그 자신도 사상적으로 새롭게 재무장했다. 오늘날로 치자면, 기업이 비전을 명확히 한 것과 같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태종은 개국 공신들을 토사구팽하고 500년 조선 경영권을 확실히 다져 놓았다. 세종이 아무런 경영상의 짐 없이 홀가분하게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이 덕분이었다. 세종시대의 안정적 발판도 여기서 나왔다. 고려의 충신들을 무덤 속에서 불러내 충신으로 추승함으로써 죽은 자들을 한 번 더 죽이되, 그것을 내부적으로 힘을 모으는 계기로 삼았고, 산자를 치욕 속에서 죽게 만들 줄 아는 노회함과 슬기가 어우러진 정치를 펼칠 줄도 알았다. 이점에서 보자면, 고도의 통치술이자 오너의 경영 기법이 발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국정 운영의 철학을 분명히 했다. 태종의 즉위교서는 이 같은 결의를 잘 보여준다.

“아아! 천지의 덕은 만물을 생성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임금 된 자의 덕은 백성을 은혜롭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늘과 인민 두 사이에 위치하여 굽어보고 우러러보아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면 이르건대 공경하고 이르건대 어질게 하면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힘써 이 도리에 따라서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겠다.”(『정종실록』2년 11월 계유)

창업에서 수성으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

태종은 고려가 근 500년 동안 경영권이 분산되어 한번도 중앙집권을 이뤄내지 못한 것을 반면교사 삼아 조선을 국왕 중심의 국가가 되도록 했다. ‘시왕지제(時王之制)’가 이것이다. 이로써 왕을 정점으로 한 의정부, 육조체제가 정립되게 된다. 즉, 경영권 확립과 이를 밀고 나갈 경영층이 가지런히 서게 되는 것이다. <경국대전>의 법제화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더불어 권력을 뜨거운 불과 같이 여겨 늘 조심해 다뤄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태종 5년(1405년) 8월 세자였던 양녕에게 한 말은 이 점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걸주(桀紂)를 왜 독부라고 부르는지 아느냐?” 이에 세자가 “인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태종이 말하였다. “걸주는 천하의 주인이었지만 인심을 잃자 하루아침에 독부가 되고 만 것이다. 너와 나도 인심을 잃으면 단 하루라도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임금이 될 자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는 대목이다. 양녕은 이를 무시했기에 낙마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경영 환경이 요동치는 시기, 경영자들로 하여금 무엇에 조심하고 근려(勤勵)해야 하는지 매우 주요한 가르침이 된다. 태조 이성계보다도 오히려 창업에 더 공이 큰 태종,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나갔고, 창업에서 수성으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을 충실히 담당해 냈다. 태종, 그는 한국 역사상 가장 다이내믹한 국가경영의 리더십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진정한 국가 경영자였다.

전경일 - 인문경영연구소 소장으로 인문과 다른 분야의 경계를 허무는 통섭적 관점을 연구한다. 저서로 <조선남자>와 <창조의 CEO 세종> 등이 있다.

201507호 (201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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