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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원 두산그룹 신임 회장 

31년 기다린 준비된 회장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1896년 8월 서울 종로에서 박승직상점(朴承稷商店)으로 창업한지 120년이 지나 한국기네스협회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장수 기업 두산그룹이 재계 최초로 3월 25일 4세 경영시대를 개막했다. 4세 경영의 선봉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어떤 인물일까.

지금으로부터 31년전. 두산산업(현 (주)두산 글로넷 BU)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생 한 명이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심장부정맥으로 군대를 면제받은 데다 휴학 한 번 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해 고작 24세에 불과했다. 이 앳된 얼굴의 청년은 31년 후 재계 12위 두산그룹의 총수로 올라선다. 박정원(54) 두산그룹 회장 이야기다.

경영전문지 월간 현대경영이 지난해 국내 100대 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CEO의 회사 재직기간은 평균 29.27년이다. 박정원 회장은 올해 나이 54세에 재직기간 31년이다. 총수 자리에 오른 기간만 보면 그룹 회장이 되기까지 오너 프리미엄이 크지 않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24세에 평사원으로 입사


긴 시간 동안 그는 다른 전문경영인처럼 그룹 총수직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1989년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 과정을 밟고 귀국한 그는, 다른 해외 MBA 출신처럼 과장(일본 기린맥주)으로 입사한다. ‘남의 밥을 먹어봐야 안다’는 두산의 경영철학 때문이다.

이어 동양맥주 이사, 오비맥주 상무, ㈜두산 관리본부 전무 등 하나씩 단계를 밟아 처음으로 대표이사직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 이후에도 두산산업개발·두산건설 등 주요 계열사를 거쳐 2012년부터 ㈜두산 지주부문 회장직을 수행했다. ㈜두산 지주부문 회장은 그룹 회장을 보좌하는 자리. 박정원 회장이 자타공인 ‘준비된 회장’으로 불리는 이유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평사원부터 임원까지 거의 전 직급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평직원들과 인화하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며 “박 회장은 사업 현장 역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 역시 평사원을 경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체득한 듯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 회장은 지난 1월 21일 민간투자사업으로 참여한 신분당선 연장(정자~광교) 구간을 임직원과 함께 시승하는 등 수시로 현장을 찾는 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박용만(61) 전 두산그룹 회장은 3월 2일 열린 ㈜두산 이사회에서 갑작스레 차기 이사회 의장으로 조카인 박정원 ㈜두산 지주부문 회장을 추천했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다수의 언론이 빠르게 재계 12위 총수의 변경을 타전했다.

박용만 회장은 창업 3세다. 두산그룹은 1980년대부터 창업 3세 형제가 차례로 그룹 회장직을 맡았다. 장남인 박용곤 회장을 필두로 차남인 고 박용오 회장, 3남 박용성 회장, 4남 박용현 회장, 5남 박용만 회장이 나이 순서대로 총수를 역임했다. 이생그룹으로 분가한 6남 박용욱 회장을 제외하면 형제들이 순서대로 그룹 회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번에 회장직을 이어받은 박정원 회장은 창업 2세인 고 박두병 회장의 맏손자이자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의 장남으로서 적통성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최초로 오너 일가 4세가 두산그룹 총수직을 이어받은 것이다. 두산 오너 일가 중에서 지주사 역할을 하는 (주)두산의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이로써 두산그룹은 ‘세대순·장자(長子)순’이라는 승계 원칙을 지켜가게 됐다.

박용만 회장은 2년 여전부터 박정원 회장에게 그룹 회장직 승계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꾸준히 그룹 회장 업무를 박정원 회장에게 위임했다. 지난해부터 경영계획 점검안 보고를 박정원 회장에게 돌렸다. 분기별 동향 보고인 쿼털리 리뷰(quarterly review)도 지난해 하반기부터 박정원 회장실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광고 카피를 직접 썼을 정도로 인재 경영을 강조한 박용만 회장은 매년 신입사원 최종면접을 직접 담당했지만, 승계를 결심한 이후 박정원 회장과 공동으로 진행했다.

지난해에는 최종면접 대부분을 박정원 회장이 맡았다. 오래 준비한 덕분에 공식적인 회장직 인수인계 절차는 없다는 게 두산그룹 관계자의 언급이다. 일각에서는 두산 오너 일가가 전체 가족회의를 통해 차기 회장을 결정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두산그룹에 정통한 관계자는 “다른 그룹과 다소 다르게 두산가는 그룹 회장이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고, 이를 가족회의에서 공유하는 문화가 있다”며 “차기 회장 승계 시점도 박용만 회장의 판단이었다”라고 말했다.

박정원 회장이 그룹 총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우리나라 30대 대규모 기업집단 중 최초로 4세 경영 시대가 개막했다. 두산그룹 4세 중 처음으로 총수 자리에 오르는 박정원 회장의 제 1과제는 단연 그룹 정상화다.

두산그룹 주력 계열사들은 최근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두산그룹은 1조7000억원 규모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국제회계기준(K-IFRS) 연결기준으로, 매출 18조9604억원, 영업이익 2646억원, 당기순손실 1조7008억원이다. 모기업 ㈜두산과 중간지주 역할을 하는 두산중공업은 실적이 비교적 양호하지만, 경영실적이 좋지 않은 손자회사들이 발목을 잡았다.

두산인프라코어가 지난해 연결기준으로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93.94% 감소했다. 두산건설은 렉스콘 공장 매각 등 유동성 확보 노력에도 작년 말 순차입금이 1조3000억원에 달한다. 때문에 주요 계열사들은 2월 기업 신용도가 하락했다. 2012년 3월 17만원을 넘었던 ㈜두산 주가도 8만원 대로 주저앉았다.

세대순·장자(長子)순 승계 원칙


때문에 그룹 재무구조 개선이 박 회장의 첫 번째 과제로 꼽힌다. 두산그룹은 3월 2일 MBK파트너스와 두산인프라코어 공작기계 사업부문 매각 협상을 마무리해 1조 1308억원가량의 자금을 확보했다. 연내 두산밥캣을 국내 증시에 상장하고, 방산업체 두산DST의 매각 작업을 마무리하면 3조원 안팎의 자금을 수혈할 수 있을 전망이다.


두산그룹의 장기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것도 박 회장이 처리해야 할 시급한 과제다. 올해 사업권을 따낸 시내 면세점 등 유통 부문을 확대해, 기존 중공업 중심에서 소비재 중심으로 그룹 구조를 재편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두산그룹 실적 악화에는 중후장대 사업에 편중된 그룹 구조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있다. ㈜두산의 서울 시내 면세점 사업 진출 결정에도 박정원 회장이 관여했다. 면세점 사업은 2년 사이에 무려 1조원의 매출이 기대되는 대형 사업이다.

박정원 회장이 일궈낸 신규 사업인 연료전지 사업 확대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박용만 회장이 구조조정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만큼, 박정원 회장은 ㈜두산 지주부문 사장으로 일하면서 2014년 연료 전지 사업을 신성장 분야로 정하고 국내의 퓨얼셀파워와 미국 기업인 클리어에지파워 인수를 주도한 바 있다. ㈜두산 지주부문 사장은 그룹 회장을 보좌하면서 그룹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역할을 하는 자리다.

덕분에 연료전지 사업은 시작 2년 차인 지난해 5870억원을 수주해 매출 1680억원, 영업이익 55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사업 초년도인 2014년 대비 무려 659%, 221%나 각각 증가한 수치다. 올해 연료전지 사업 목표는 “4080억원 매출에 영업이익 400억원을 기대하고 있다”는 게 두산그룹 관계자의 언급이다.

박정원 회장에 대한 엇갈린 시선도 존재한다. 2009년부터 두산건설의 대표이사를 맡았지만 2013년 두산건설이 유동성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2004년에는 일본 혼다와 판매계약을 체결하면서 수입차 시장에도 뛰어들었지만 결국 사업을 정리했다.

그럼에도 두산가는 박정원 회장의 승부사 기질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박정원 회장은 1999년 ㈜두산 상사 BG 부사장에 취임한 이후 사업 포트폴리오를 수익사업 위주로 과감히 정리해 2000년 매출액을 30% 이상 끌어올린 바 있다. 이를 인정받아 2004년 두산그룹이 자체적으로 선정한 ‘두산경영대상’에서 박 회장은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박정원 회장은 그간 두산그룹 변화 혁신 과정에서 실무자로 및 의사결정자로 참여하면서, 두산을 글로벌 기업으로 이끌었다”며 “덕분에 두산그룹은 국내 소비재 기업에서 글로벌 인프라지원 기업(Infrastructure Support Business)으로 변화했다”고 말한다.

야구인 박정원에서 두산의 미래를 그려보는 시각도 있다. 박정원 회장은 두산베어스 구단주를 겸임하고 있는데, 야구팀 운영에서도 박 회장의 경영철학이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박정원 회장이 구단주로 재임하면서 두산베어스는 독특한 팜시스템을 구축했다. 프리에이전트(FA) 등 매물로 나온 유명선수를 막대한 금액을 주고 스카우트하기 보다는 실력 있는 무명선수를 발굴해 육성하는 시스템이다. 때문에 박 회장은 두산베어스 2군을 육성하려는 목적으로 2014년 7월 이천에 550억원을 들여 2군 연습장을 확장하기도 했다.

이는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화수분 야구’로 알려졌다. 덕분에 두산그룹은 김현수 볼티모어 오리올스 외야수 등 수많은 연습생 신화를 만들었다.

‘승부사’ 기질에 주목하는 재계


▎박정원 회장은 두산베어스 구단주를 겸임하고 있는데, ‘화수분 야구’로 유명하다.
박정원 회장도 무명선수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시스템이 진정한 프로야구 시스템이라고 믿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두산그룹의 경영철학과도 맞물린다. 두산그룹은 핵심 경영철학 중 하나로 2G(Growth of People, Growth of Business) 전략을 추구한다. 사람을 육성해 사업을 성장시키는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추진하자는 내용이다. 더불어 근자성공(勤者成功) 정신과 전략적 사고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평소 부지런하면 안 될 것이 없지만 여기에 전략적 사고가 더해지면 효율성이 더욱 높아진다는 의미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야구광인 박정원 회장은 야구팀 두산베어스 구단주를 맡아 화수분 야구 시스템을 안착시켰다”라며 “인재 발굴과 육성을 가장 중시하는 박정원 회장의 경영 철학이 두산그룹 전체로 확산된다면 재무구조 개선과 신성장동력 발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 문희철 기자

201604호 (201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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