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3) 애경그룹 

‘한국 재계의 여장부’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포브스코리아가 한국경영사학회(회장 차동옥 성균관대 교수)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의 세 번째는 ‘한국 재계의 여장부’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이다. 6월 9일은 애경그룹 62주년 창사 기념일이다. 애경그룹은 장 회장이 팔순을 넘긴 고령이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10년간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며 포브스코리아의 인터뷰 요청을 정중히 고사했다. 애경그룹은 대신 장영신 회장의 기업가정신과 관련한 자료를 제공하는 등 포브스코리아의 이번 기획을 지원했다.

▎장영신 회장은 지금의 애경그룹을 키워낸 실질적 창업자이자 초대 한국여성경제인협회장과 전경련 부회장으로 활약한 재계의 여장부다.
장영신(80) 애경그룹 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1호 여성 CEO’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다가 1971년 애경의 사장을 맡아 비누와 세제회사이던 애경을 유통과 항공, 부동산, 호텔 등 국내외 46개 계열사를 거느린 연매출 6조원(2015년 기준)의 중견그룹으로 키워냈다. 장 회장은 애경그룹의 실질적 창업자이자 초대 한국여성경제인협회장과 전경련 부회장으로 활약한 한국 재계의 여장부다. 포브스코리아와 한국경영사학회가 6월호에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빛낸 경영자로 장영신 회장을 조명하는 이유다.

장영신 회장은 1936년 7월 서울에서 아버지 장회근 씨와 어머니 문금조 씨의 4남 4녀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영민했다. 6·25 직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당시 장영신의 외국어 능력을 눈여겨 본 경기여고 교장이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시켰다. 장영신은 1955년 경기여고 졸업 후 전액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가톨릭 신자였던 장영신은 가톨릭 재단인 필라델피아 체스넛힐대학(Chesnut Hill College)을 선택했고, 평소 과학과 수학을 좋아해 화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장영신은 유학시절 ‘악바리’로 통했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 처음 1년간은 옷 입은 그대로 책을 베고 책상에 누워서 잤다. 깊은 잠에 빠지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일요일에도 도서관에서 종일 지냈고, 실험실에서 밤늦게까지 혼자 남아 화학이론과 실험 결과를 연구하는 날이 허다했다. 한국판 퀴리부인이 연상될 정도다. 평균 B학점 이상 받아야 전액 장학금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영신은 4년 내내 미국에 머물러 학업에 열중했다. 그런 와중에도 대학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필라델피아 오페라하우스와 협연한 ‘나비부인’의 프리마돈나를 맡기도 했다. 장영신은 1959년 화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장영신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한 김성수 경희대 명예교수(전 한국경영 사학회장)에 따르면, 유학시절의 다양한 지식과 경험, 국제감각은 후에 장영신 회장이 애경을 경영하는 전략적 두뇌의 기반이 되었다. 이는 애경을 그룹으로 성장시키고 국제적 기업으로 발전시킨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1959년 6월, 23세의 엘리트 여성 장영신은 애경유지 공업㈜ 창업주 채몽인과 결혼해 평범한 주부의 길을 걷게된다. 당시만 해도 장영신의 인생에서 ‘기업인’의 삶은 전혀 계획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영신은 막내아들(채승석 애경개발 사장)를 낳은 지 사흘 만인 1970년, 남편을 갑작스럽게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며 인생의 극적인 고비를 맞게 된다. 남편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이웃사촌이었다. 채몽인 선대회장은 국민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애인경천(愛人敬天) 정신을 담아 애경이란 회사 이름을 지을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한 알의 밀알을 심는 마음으로


▎타계한 남편의 1주기를 계기로 장 회장은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기로 결심한다. 사진은 72년 애경의 대표이사에 취임해 책상 앞에 앉은 장영신회장
34세 젊은 나이에 3남 1녀를 혼자 힘으로 양육하고 뒷바라지할 처지가 된 장영신 여사는 그 충격에 1년여를 집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장영신 여사에게 힘이 된 건 장남(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이었다. 채 부회장은 당시 10살 남짓한 나이에도 실의에 빠져 있는 어머니에게 “엄마, 걱정마. 학교 앞에서 학생들 상대로 떡볶이 장사하면 되잖아!”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장 회장은 평소 “위기 때마다 장 회장을 든든하게 지원해 준 가족이 있었기에 지금의 애경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이 같은 가족애는 나중에 애경그룹 특유의 가족경영으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 된다.

타계한 남편의 1주기를 계기로 장영신은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기로 결심한다. 네 아이의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자랑스러운 아들 딸로 키우기로 작정한 것. 장 회장이 ‘복식부기’와 제무제표 보는 법을 익히기 위해 6개월 간 남몰래 종로 낙원동에 있는 경리학원에 다녔다는 것은 재계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다. 장 회장은 자서전 『밀알 심는 마음으로』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모성에서 출발했고, 남편의 유업을 그냥 버려둘 수 없다는 아내로서의 의리, 애경 종업원에 대한 책임감 등이 복합돼 운명적으로 기업경영을 맡아야겠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서 무모한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고 썼다.

장 회장은 한번 마음먹으면 그대로 실행하고야 마는 굳센 의지의 인간형으로 알려진다. 1972년 7월 1일 첫 출근을 감행했고, 그해 8월 1일 사장에 취임하고야 만다. 당시 재계 분위기나 회사 정서로는 애경의 나이든 임원들이 젊은 여성 CEO 아래에서 일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몇몇 임직원들은 “같이 일해 달라”, “최소한의 수준까지만 가르쳐달라”는 장 회장의 부탁을 외면한 채 애경을 떠나갔다. 장 회장은 자서전에서 “당시 나는 왕따였다. 사장이었지만 한동안 직원들은 결재조차 받으러 오지 않았고 이사회에서 임원들이 나누는 얘기를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회사를 대표해 경제인 모임에 나갔다가 자신만 홀로 여자라는 자격지심에 기둥 뒤에 숨어 서 있다 오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장 회장은 후배 기업인들에게 “그 어려웠던 때에 나를 여기까지 이끈 힘은 죽을 만큼 힘든 순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은 미련한 인내심이었다”는 말을 했다. 자신이 생생하게 겪은 경험담이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애경이 개발한 국내최초 화장비누 ‘ 미향’(1956)과 트리오를 판매하는 써니센터 부녀 판매원(1977)
장 회장은 평소 후배 경제인들에게 여성 경영인이 여장부로서의 모습과 여성성을 살린 리더십을 함께 보여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제 장 회장의 40년 경영인생에서는 이 두 가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우선 여장부로서 당찬 모습이다. 장 회장 취임 1년 만인 1973년 10월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그 여파로 이듬해 유류가격과 전기요금이 각각 82%와 30%나 상승했다. 이로 인해 애경의 석유화학공업 회사인 당시 삼경화성(현 애경유화)이 원료공급이 끊겨 공장 문을 닫을 처지에 놓였다. 당시 장 회장은 임직원들을 먹여 살릴 기업의 CEO였고 생때같은 네 자식을 키워야 할 어머니였다. 기업가정신은 위기의 순간에 빛나는 법이다.

‘국내 1호 여성 CEO’의 도전


▎장영신 회장(가운데)은 ‘재계 맏언니’로서 초대 한국여성경제인협회장 (1997~1999)을 맡았다.
장 회장은 가장 어려운 그 국면에서 특유의 도전정신을 발휘한다. 한국에 파견된 미국 화학업체 걸프사 사장을 직접 찾아가 “삼경화성은 앞으로 한국의 석유화학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할 기업이다. 양사의 이익을 위해 일본 미쓰비시가스케미컬사와 물물교환을 할 수 있게 좀 중개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장 회장은 한번 결정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돌파해 나가는 스타일이다. 부탁을 들어주기 전에는 한 발짝도 떼지 않겠다는 듯 당차게 요구하는 장 회장의 그 결기에 놀라 걸프사 사장은 미쓰비시가스케미컬사를 주선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유비누와 트리오 등 대표 상품의 수출길이 열렸다. 지금도 매년 1조원이 넘는 매출을 거두는 애경유화가 그렇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장 회장의 담력은 1984년 영국의 세계 최대 브랜드 유니레버사와 합작해 애경산업(주)을 설립할 때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외국기업에 회사를 팔아먹는 게 아니냐는 주위의 비난이 거세자 장 회장은 최대한 애경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며 압박해 상대방을 당혹케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기술과 생산설비는 들여오되 로열티는 받지 말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합작은 애경과 유니레버가 각각 50대 50으로 하되 애경이 경영을 주도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달았다. 합작이나 협상은 대등하거나 서로에게 이득이 있어야 성사되는 법이다. 당시 장 회장이 내건 이 같은 조건을 전해들은 임원들은 합작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봤다. 하지만 유니레버는 예상을 깨고 애경과 합작의사를 밝혔다. 배수진을 친 장 회장의 결기에 두 손 든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애경과 유니레버는 1984년 11월 애경산업(주)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당시 장 회장이 어찌나 집요하게 요청하며 물러서지 않았던지 외국 업체 임원들 사이에서‘터프 우먼’으로 불렸다고 한다.

앞서 장 회장이 미국 유학시절 체득한 화학 지식과 영어실력, 그리고 국제적 감각은 다국적기업인 유니레버, 미쯔비시 등과의 합작사 설립에 기여하는 밑거름이 됐다. 장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한 학자들은 장 회장에게 이처럼 보이지 않는 ‘기초체력’이 있었기에 애경을 종합 경공업 그룹으로 키울 수 있었다고 본다. 미국 체스트넛힐대학은 1985년 장 회장에게 여성경영자로서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2009년에는 눈부신 업적을 남긴 체스넛힐대학 졸업자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이 자본주의를 막 시작한 한국의 여성기업인 장 회장의 경영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장영신은 1987년 어엿한 애경그룹의 회장직에 오른다. 경영의 귀재로 변모한 어머니 경영자로서 ‘주부경영의 신화’라는 타이틀이 붙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장 회장은 당시 애경유지공업㈜을 애경그룹으로 성장시킨 한국 최초의 화학공업 전문경영자였다. 장영신 회장 연구자들은 장 회장만의 특징적이고 탁월한 경영능력을 네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가 빅 브랜드를 육성해내는 창조 능력, 둘째가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경영능력, 셋째가 신 시장을 개척하는 탁월한 능력, 넷째가 내실경영에 앞서 흑자경영을 실현하는 경영능력이다.

장 회장은 자신이 평범한 주부에서 경영인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네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에 주부 CEO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한 가정의 가장이 아이들을 돌보듯 오너로서 채몽인 선대 회장을 대신해 애경을 키워내야 하는 가혹한 운명이 없는 힘도 생겨나게 하고 악바리 근성도 나오게 하더라는 것이다. 앞서 거론한 여장부 리더십이다. 애경그룹 기업가정신을 연구한 경영사학자들도 장 회장이 성공적 경영인이 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장 회장이 당시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정주부로서 기업자정신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첫손가락에 꼽는다. 장 회장은 남들보다 담대했고, 남보다 부지런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힘들고, 어렵고, 여성에 대한 극심한 편견 속에서도 “남자도 하는데 왜 내가 못해” 하는 대담한 마음과 열정으로 버텨갔다.

담대하고 부지런한 여장부


▎장명신 회장은 애경 창립 50주년을 맞은 2004년 채형석 부회장에게 그룹총괄을 맡겼다.
장 회장의 경영 리더십은 1990년대 들어 사업다각화를 통해 애경을 한 단계 성장시킨 유통사업 진출 과정에서도 발휘됐다. 장 회장은 1993년 9월, 애경유지 공장이 있던 영등포 부지에 애경백화점 구로점(현 AK플라자 구로본점)을 열었다. 그리고는 맏아들인 채형석 애경 총괄 부회장에게 사업을 맡긴다. 채 부회장은 당시 개점 인사말에서 “이 백화점을 돌아가신 아버님께 바칩니다”라고 말해 장 회장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애경백화점은 비누·세제 이미지가 강하던 애경을 중견그룹으로 탈바꿈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 무렵 애경백화점을 배경으로 한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애경백화점 이미지가 급상승하는 행운도 뒤따랐다. 애경백화점은 그 뒤 전국에 5개 백화점을 운영하며 전체 그룹 매출의 45%를 차지할 정도로 애경의 주력 사업이 됐다. 끊임없는 경영혁신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여장부’ 장영신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장 회장은 여성기업인도 기업활동을 통해 성취감을 얻고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장 회장이 ‘재계 맏언니’로서 그 어려웠던 IMF 사태를 겪으며 초대 한국여성경제인협회장(1997~1999)을 맡은 것도 그런 이유다. 당시 장 회장은 남성 우위의 재계 풍토에서 힘들어하는 여성 기업인들에게 “차별과 편견은 세상으로 나가는 통과의례”라며 용기를 북돋았다. 그러면서 여성기업인을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국회에도 진출했고, 1999년에는 재계의 얼굴인 전경련 부회장을 맡아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장 회장은 여장부로서의 다양한 활약 뿐만 아니라 여성의 고유한 ‘여성성’을 살린 경영리더십도 여러 차례 발휘했다. 장 회장을 가까이서 보좌한 사람들에 따르면, 장 회장은 성격이 직선적이고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그 자신이 여성으로서 자신을 연출할 줄도 알았다. 필요한 거래처나 손님 계층에 따라 색조화장이나 의상에도 신경을 썼고 기초화장 등 5분 만에 끝내는 화장기술도 익혔다고 한다.

장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한 경영사학자들은 70~80년대 애경의 성장사를 보면, 여성으로서 장 회장의 선견지명이 작용한 사례를 여러차례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선 장 회장이 회장 취임 뒤 애경유지공업의 미래 지표 사업을 화학공업으로 설정하고 애경화학을 설립한 사례를 들 수 있다. 1차 석유파동이 터질 1973년 당시는 국내에 세탁기가 막 보급되기 시작할 때였다. 애경의 CEO이자 가정주부이기도 했던 장 회장은 당시 비누 대신 합성세제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견하고 대전 대덕단지에 2500여 평 규모의 대규모 합성세제 공장을 준공했다. 장 회장의 예상대로 1975년 공장이 준공될 무렵 합성세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애경의 ‘트리오’ 판매액도 최고기록을 경신했다. 이를 통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회사가 경영 정상화를 이룰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장 회장은 자신의 전공학문인 화학 지식을 살려 폴리에스테르 수지를 제조하는 애경화학, 합성세제 원료를 생산하는 애경쉘, 도료 메이커인 애경공업, 애경유지의 사업을 이은 애경산업 등을 차례로 설립해가며 굴지의 애경그룹으로 키워 나갔다.

여성성을 적극 활용할 줄 아는 경영자


▎장남 채형석 총괄부회장(왼쪽)과 장 회장의 사위 안용찬 부회장. 장영신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이어받았다.
애경산업의 화장품 사업도 장 회장이 선견지명을 발휘해 여성성을 살린 대표적인 사례다. 장 회장은 1980년대 들어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당시에는 관심이 저조했던 ‘클렌징’제품 시장에 주목했다. 그리고는 백화점과 호텔, 전문매장에서만 구입할 수 있었던 유통구조를 개혁해 약국과 슈퍼마켓에서 판매해 성공을 거뒀다. 장 회장은 여성 소비자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부합하는 제품을 연이어 출시해 여성 고객들의 마음을 얻었다.

1994년에는 청양공장에 별도의 애경산업 화장품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이 화장품연구소는 제품연구개발, 제품의 안전성·효능·효과와 신소재개발, 기초화장품 및 색조화장품·향수 개발, 국내화장품 관련 기술정보 수집· 분석 등 전문연구 역량에 총력을 집중했다. 장 회장이 기틀을 닦은 화장품 사업은 지금도 애경산업의 전체 실적을 이끌 정도로 효자 사업이다. 장 회장은 화장품 사업이 잘 되자 최근 전 임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수년 동안 어려웠던 화장품 사업에서 역대 최고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달성하며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냈다.”며 격려했다고 한다.

장 회장의 탁월한 경영수완으로 애경그룹은 IMF 위기 때도 흑자기조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1999년 그룹 전체 매출액이 전년 대비 11%의 고도성장을 구가했다. 이렇듯 지난 40여 년 동안 애경을 이끌며 기업가정신을 발휘해 애경그룹을 재계 50위권 기업으로 키워낸 장 회장은 2004년, 한국경영사학회가 주는 제11회 창업대상을 수상하며 탁월한 경영능력을 학계와 재계에서 공인받기에 이른다. 이후 장 회장은 2세 경영자들을 위해 용단을 내렸다. 애경 창립 50주년을 맞은 2004년 채형석 부회장에게 그룹총괄을 맡긴 것. 장 회장은 현재는 애경복지재단 일만 관여하고 있다. 영어와 일본어가 수준급인 장 회장은 몇 년 전, 취미 삼아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인생의 황혼기를 살고 있지만 장 회장은 여전히 배우고 노력하는 리더의 모습이다.

다행인 것은, 장 회장의 자녀들이 장 회장의 이런 도전정신과 기업가정신을 이어받아 가족경영으로 애경을 더 성장시켜가고 있다는 점이다. 장 회장이 낳은 3남 1녀가 모두 애경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그룹경영을 총괄하는 장남 채형석 총괄 부회장에 이어 차남인 채동석 부회장은 유통과 부동산 개발 부문을, 막내아들인 채승석 사장은 골프장 사업을 하는 애경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외동딸인 채은정 부사장은 남편인 안용찬 부회장과 함께 애경산업에서 생활 항공부문 경영을 맡고 있다.

가족경영의 새 모델을 제시하다


▎애경산업은 매년 창립기념일이면 화려한 기념식이나 이벤트 대신 나눔을 실천해왔다.
장영신 회장의 기업가정신은 채형석 부회장 등 자녀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채형석 총괄부회장이 적극적인 경영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채 부회장은 2006년 5월 제주항공을 출범시켰다. 저비용항공(LCC) 사업에 진출한 제주항공은 유가와 환율, 금융위기 등 각종 악재에 시달리며 5년 연속 적자에 시달렸지만 2011년 흑자 전환에 성공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국내 저가항공사로는 처음으로 증권시장 상장에 성공했다. 애경은 호텔사업으로도 발을 넓혔다. 수원애경역사를 증축해 백화점과 특급호텔이 복합된 ‘노보텔 엠베서더 수원’을 오픈했다.

애경은 현재 총력을 동원해 그룹의 모태인 애경산업(대표 고광현)의 주식 상장을 추진하고 있다. 애경산업은 2014년 사상 첫 4000억원 매출 시대를 연 이후 2015년에는 총 매출 4854억원, 영업이익 273억원을 기록했다. 최근에는 주요 사업인 생활용품 사업군의 안정적 수익을 바탕으로 화장품 사업의 확장을 가속화하면서 ‘생활뷰티 선도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애경그룹은 현재 대신증권을 상장 주관사로 선정하고 본격적인 IPO 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IPO를 통해 조달하는 자금으로는 연구개발(R&D) 투자 및 해외 진출 등 신사업 확대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계획대로 2017년 상반기에 애경산업의 상장이 이뤄지면 애경유화, AK홀딩스, 제주항공에 이어 애경그룹의 4번째 상장사가 된다.

애경그룹 특유의 나눔 경영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 설립된 애경산업은 매년 창립기념일이면 화려한 기념식이나 이벤트 대신 창립기념 횟수만큼 이주 청소년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나눔을 실천해왔다. 지난 4월 22일에는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다문화가정 등 17∼21세 이주배경 청소년 31명에게 지원할 장학금을 전달했다. 지난해 창립 30주년 때도 이주배경 청소년 30명에게 장학금을 기부했다. 나눔을 통해 사랑과 존경의 창립 이념을 실천하는 애경의 ‘나눔경영’은 애경의 기업이념이자 기업가정신의 핵심인 ‘애인경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장기화되고 있는 경제난 속에서도 가족경영으로 활로를 개척하고 사회공헌에 열심인 애경 그룹은 재계에서 가족경영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채형석 부회장과 채동석 부회장은 최근까지 10년 넘게 한 사무실에서 일했었다. 골육 간에 경영권 분쟁이 심심찮게 벌어지는 재계에서 보기 드문 형제경영의 모습이다. 장 회장도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된 일로 “아이들이 잘 자라주고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지난 4월 15일, 공식석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던 장 회장이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장남인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의 차녀 채수연씨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외손자 선동욱씨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 애경그룹 홍보실에 따르면, 장 회장은 결혼식을 지켜본 뒤 사진촬영은 하지 않고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 식장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장영신 회장은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장남인 채 총괄 부회장은 효자로 소문이 자자하다. 선배 경영자로서 지혜를 전수해주고 당신의 운명과 열심히 싸워온 모친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 회장은 2014년 신년사에서 지난 60여년 간 애경그룹이 어려움을 딛고 도약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애경인의 저력과 개척자 정신으로 묵묵히 앞만 보며 담담하고 의연하게 대처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업의 기초체력이 튼튼하고 매사를 돌다리도 두들겨보며 건너온 애경그룹은 최근의 경기불황도 의연하고 슬기롭게 대처해 극복해갈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박스기사] 기업가정신을 강조한 장영신 회장 발언


개척자 정신

“60년 동안 생활용품·유통·항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쉼 없는 성장과 도약을 해 온 애경인의 개척자 정신에 남다른 긍지를 느낀다. 인생에 희로애락이 교차하듯 경제 역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한다. 잘 나갈 때 어려울 때를 대비하고, 힘들 때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담담하고 의연하게 대처해 나간다면 이루어내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2014년 6월 8일 애경그룹 창립 60주년 기념사)

꾸준한 노력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남보다 강하거나, 남보다 잘난 것이 아니라 그 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고 묵묵히 노력한다는 것이다. 긍정적 생각으로 꾸준히 노력하면 어떤 어려운 목표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경험으로 확인했다.” - (2010년 12월 기업경영 40주년을 맞아 펴낸 자서전<스틱 투 잇(Stick to it)>을 출간하며)

[박스기사] 한국경영사학회 김성수 교수가 말하는 장영신 회장의 기업가정신 - 국민으로부터 사랑 받고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는 기업


김성수 경희대 명예교수는 “장영신 회장은 ‘내 인생은 사업이다. 기업인은 애국자다’ 라는 사업보국주의 정신이 확고한 경영자였다”며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기업, 국민으로부터 사랑 받고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는 기업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경영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장영신 회장의 기업가정신

애인경천(愛人敬天):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을 하늘과 같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정신”과 “국민으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기업으로 성장 발전하겠다는 기업정신”의 두가지 의미가 애인경천에 함축되어 있다. 애경의 사훈은 “앞서서 나가자, 열심히 일하자, 마음을 모두자”이다. 1976년 사원 공모를 통해 결정된 사훈에는 애경의 경영이념이 담겨져 있다. 바로 ‘앞서가는 사고와 앞서가는 기술, 앞서가는 경영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창조하는 기업이 되자’는 것이다. 애인경천에 바탕을 두고 장영신 회장이 몸소 보여준 기업가정신은 다음과 같다.


도전과 개척주의 정신: 네 아이의 어머니로서, 극심한 난관과 좌절, 남녀 편견 때문에 어떻게 사장이라는 직책을 해낼까 하는 의아심과 극심한 반대 속에서도 “오직 할 수 있다”는 캔두이즘의 기업가정신으로 성공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장 회장은 ‘창조적 기업가’이다.

학습과 상식주의 정신: 전문가가 되려면 학습과 상식을 풍부하게 해서 실력을 향상하도록 해야 한다. 장 회장은 초기의 신생기업을 그룹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학습을 중요시하고 상식이 풍부한 기업가로 행동하는 성과를 일궈냈다.

노사화합주의 정신: 2003년 5월 13일 애경유화 울산공장은 장영신 회장과 채형석 부회장, 전기철 대표이사, 노조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노사평화선언 선포식을 개최해 국민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애경산업 노사는 2003년 이후 올해까지 14년 연속 무교섭 타결을 이뤄냈다.

고객만족주의 정신: “소비자는 기업에게 마치『어린왕자』에 나오는 장미와 같다. 신제품이 나오면 금방 반색을 하다가도 또한 금방 싫증을 내며, 기분이 언짢을 때는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요구사항도 많고 트집도 잘 잡는다. 하지만 기업은 ‘어린왕자’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성공한다. 토라진 소비자를 달래고,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요구사항은 충실히 들어주어야 한다. 이런 정신이 고객감동으로 이어지며 매출 액도 증가한다.” 장영신 회장은 늘 고객 만족주의를 추구했다.

기술혁신에 의한 품질관리주의 정신: 장영신 회장은 그룹 창업 때부터 연구개발을 시작, 기술혁신을 통한 품질관리 부문에서 특히 개가를 올렸다. 경영자로서 기술 혁신을 입버릇처럼 주창하고 강조했다.

201606호 (2016.05.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