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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미국조선미술협회 회장 

북한 미술품 수집 대가를 만나다 

글 유길용 기자·사진 김상선 기자
신동훈 미국조선미술협회 회장은 반평생을 ‘조선화(북한 미술품)’ 수집에 매달리고 북한 미술품을 국내에 소개해온 개척자다. 100여 차례나 북한을 오가며 거장들을 직접 만나고 남북미술교류의 가교 역할을 맡아온 신 회장을 어렵게 만났다.

▎신동훈 회장은 남북의 예술가들이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고 품평하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신 회장의 바람은 언제쯤 이뤄질까.
지난 6월 7일 서울 순화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신동훈(68) 회장을 만났다. 그는 “남북 화가들의 혼이 서린 그림마저 반쪽으로 남아선 안 된다”고 말했다. 민족혼과 애국심이 남달라보였다. 끝이 말려 올라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은 머리, 갈색 구두와 캐주얼 재킷으로 한껏 멋을 낸 노신사의 첫인상이 왠지 범상치 않아 보였다. 들어본 그의 인생 경로는 특별했다. 신 회장은 “북한 미술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그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에 못 미칠지 몰라도 28년간 쌓아온 현장 경험은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장이 아니다. 북한 미술에 대한 그의 경륜은 한국인으로선 독보적이다. 그가 워싱턴과 북한을 오간 횟수는 어림잡아 100여 차례에 이른다. 날고 기는 북한 전문가라 해도 신 회장만큼 북한의 미술 현장을 누빈 사람이 없다. 그가 미국 시민권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한 미술은 국내 미술계에서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흔히 ‘조선화’라고 한다. 분단 이후 시작됐으니 역사는 짧지만 독보적인 화풍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실적인 묘사와 화려한 채색이 조선화의 특징이다. 정창모(1931-2010), 선우영(1946-2009), 김상직(1934-2010), 리석호(1904-1971) 등 이른바 ‘북녘의 4대 거장’은 국내에서도 제법 알려져 있다. 최근 들어 컬렉터들이 늘었지만 활성화되기엔 갈 길이 멀다. 직접 교류가 사실상 불가능해서다.

신 회장이 북한 미술품 수집에 뛰어든 건 1988년부터다. 북한 그림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간첩으로 엮일 수도 있는 엄혹한 시기였다. 그가 북한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생계’를 위해서였다.

위작 구입했다 50만 달러 날리기도


▎북한의 인민예술가 선우영 화백(왼쪽)을 만난 신동훈 회장. 그는 북한에 건너가 직접 거장들을 만나 설득했다.
“1977년에 미국으로 이민해서 델리숍(샌드위치점)을 했어요. 그런데 한 달 새 무장강도를 세 번이나 당한 거예요. 이러다 까딱하면 죽겠구나 싶었죠. 뭐가 됐든 안전한 직업이 필요했어요.”

마침 백인 친구가 워싱턴DC에서 운영하던 화랑을 내놨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그 화랑을 인수했다. 1988년 일이다. 한국화 전문 화랑으로 하면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지만 화랑을 운영한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림에 대한 조예야 두말할 나위가 없고 무엇보다 좋은 작품을 구하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이미 미국에서 동양화를 취급하는 화랑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신 회장은 “나만의 스페셜티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북한 미술이었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북한에 직접 들어갈 수는 없었다. 북한 그림은 중국을 통해 흘러나와 거래되고 있었다. 그는 이듬해(1989년) 중국 베이징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한중 수교(1992년)가 이뤄지기 전이어서 중국 비자를 받는 것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여기서 접한 북한 작가의 그림은 그를 단박에 매료시켰다. 화려한 채색의 독특한 화풍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신세계 같았다. “그때부터 북한 그림이라면 닥치는 대로 마구 사들였다”고 신 회장은 회고했다.


▎북녘 주민들의 일상도 남쪽과 다르지 않다. 독서삼매경에 빠진 여학생의 단정함을 카메라의 아웃포커싱 기법처럼 강조했다. 탁효연 <출근길에>(2008)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구하기 힘들다던 북한 그림이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게 미심쩍었다. 몇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는 그림을 고작 수백 달러에 인심 쓰듯 넘기는 중국 화상들의 태도가 비상식적이란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 몽땅 가짜였다. 1년간 사들인 그림들을 눈물을 머금고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50만 달러가 휴지조각이 된 순간”이었다.

가슴 쓰린 기억이지만 그는 “비싼 수업료라고 생각했다. 호되게 당하고 나니 그림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고 했다. 그 뒤 신 회장은 직접 평양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북한 최고 화가들을 직접 만나야 한다는 절실함이었다. 실제로 고(故) 정창모 화백은 2007년 중국 베이징에서 국내 한 언론사 특파원과 인터뷰에서 “우리에게 와서 진품 여부를 확인해간 사람은 신동훈 씨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북한 최고 화가들을 직접 만나 설득


▎금강산 구룡폭포와 주변 풍광을 원색적으로 그리면서도 동양화의 기본 틀에 충실하다. 북한 미술의 화풍을 잘 나타낸다. 김상직 작 <구룡폭포>(1988)
하지만 초창기에는 북녘 화가들도 신 회장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봤다. 이념과 체제의 거리감이 민족의 동질성보다 앞섰다. 안내원과 지도원들이 감시의 눈길로 그들의 만남을 예의주시했다. 간혹 말 한마디라도 실수하면 “나가라”라며 등을 떠밀었다. 신 회장은 “황해남도 구월산에서 만난 산지기가 그러더라. 내 이마에 ‘겁이 없다’고 써있다고. 그땐 정말 두려움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자칫 한국과 미국, 북한 3국 사이에서 서로에게 스파이로 몰릴 수 있는 위험한 처지였지만 그땐 좌고우면할 겨를이 없었다”고도 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북한에만 묶어두는 건 민족적으로, 미술적으로 큰 손해”라고 설득했다. 북한에서 인민화가로 추앙받는 화가들을 만나 작품을 청탁했다. 화가들은 그의 집요함에 백기를 들었다. 정창모·선우영 화백은 방문 마지막 날 인사차 들르면 안내원과 지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을 꼭 잡고 “수고가 많다. 우리 그림을 전 세계에 알려달라”며 몇 점 씩 건넸다. 그렇게 그림을 얻은 순간을 그는 잊지 못한다. “말로만 듣던 대화가들로부터 직접 그림을 받았을 때 감동이 벅차 올랐다”고 했다.

미국의 그림 애호가들 조선화에 열광해


▎독도는 북한의 인민예술가 선우영 화백의 그림 소재로 곧잘 활용되곤 했다. 마치 사진처럼 세밀하게 묘사한 독도의 웅장한 모습이 압도적이다. 고 선우영 작 <우리땅 독도>(2008)
그림을 입수해 미국까지 가져오는 과정은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다행인 것은 조선화가 전통 수묵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었다. 화선지에 그리는 것인 만큼 여러 번 접어서 휴대할 수 있었다. 서양화처럼 캔버스에 그린 것이라면 갖고 나오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가 선보인 조선화에 미국의 그림 애호가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신 회장에게 이런 풍경은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북녘 대가들의 그림을 남녘의 동포들에게 소개할 수 없는 현실 말이다. 남과 북 거장들의 작품들이 한자리에서 어우러지는 전시회를 열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미술이 폭군과 성군의 시대를 구분한 적이 있었던가”. 그는 한국에 조선화를 소개하기로 맘먹었다.

때마침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관계에도 봄볕이 들었다. 1999년 2월, 드디어 국내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간에 몇 차례 열린 북한 미술 전시회는 모두 중국을 통해 작품을 구입한 것들이었다. 북한에서 직접 수집한 작품으로 여는 북한미술 전시회는 처음이었다. 송찬형·리맥림·김장한·최제남·표세종·선우영·오영성 등 북한의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들의 작품 34점을 선보였다. 조선화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인물화, 풍경화, 화조화는 물론 북한의 절경지를 수묵으로 담아낸 산수화를 내걸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4차례 잇달아 국내 전시회를 열었다. 신 회장은 “북한의 국보급에 해당하는 명화를 서울에서 소개한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남달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2012~2014년에 전시회를 열었지만 관심이 예전만 못했다. 전시회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남북관계가 다시 얼어붙으면서 남북의 미술 교류도 기약할 수 없게 됐다.

인터뷰 도중 신 회장은 “보여줄 게 있다”며 가방에서 곱게 접은 그림 한 점을 꺼냈다. 양팔을 벌린 만큼 큰 그림을 모두 펼치자 잔잔한 바다에 우뚝 서있는 두 개의 섬이 나타났다. ‘우리땅 독도’라는 글이 써있었다. 북한의 인민예술가 고(故) 선우영 화백의 작품이다. 신 회장은 “남과 북의 예술가들의 혼은 이처럼 이념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다. 신 회장이 지금까지 수집한 북한 미술품은 200점이 넘는다. “여전히 북한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은데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의 예술을 한국에 소개하는 것은 사사로이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마지막 희망은 하나뿐이다. 일생을 바쳐 이룩한 것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개인적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남북 예술가들이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고 품평하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신 회장의 바람은 언제쯤 이뤄질까.

- 글 유길용 기자·사진 김상선 기자

201607호 (201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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