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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6) 코시모 데 메디치 

예술 후원자로 르네상스 이끈 피렌체의 수퍼 리치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수퍼 리치는 재산을 바탕으로 보통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정점은 정치권력이다. 권력은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늘리는 역할도 할 수 있다. 여기에 명예까지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역사는 이를 모두 얻은 사람을 기억한다. 바로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의 초대 통치자로 군림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다.

▎1434년부터 1737년까지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정치 가문의 창업자 코시모 데 메디치
코시모 데 메디치는 1434년부터 1737년까지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정치 가문의 창업자다. 그는 전유럽을 대상으로 했던 금융업자로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유럽 전역에 16개 지점을 두고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복식부기를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회계사도 고용해 과학적인 금융업과 기업 경영을 추구했다. 오늘날 글로벌 금융업과 회계업은 메디치 가문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경영자로서의 능력과 재력으로만 권력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견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권력을 얻고 이를 휘두르려면 거기에 걸맞은 권위가 필요하다. 돈으로 권력을 살 수는 있을지 몰라도 권위까지 얻기는 쉽지 않다. 명예를 얻으려면 거기에 품위도 필요하다. 거기에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시민들의 신뢰도 얻어야 한다. 코시모는 이를 해냈다. 그 원동력은 인문학이었다. 그는 인문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바로 르네상스다.

코시모는 금융업자이자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정치가였지만 성격은 인문학자에 더욱 어울렸다. 금융업자인 조반니 데 메디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수도원 학교에서 인문학을 공부했다.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는 물론 히브리어와 아랍어까지 배웠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모든 학문의 기본이라는 신학은 물론 문학,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학자와 예술가들과 토론도 즐겼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르네상스를 열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코시모 데 메디치 석상
그는 고문서 수집에 빠졌다. 당시 고문서는 지혜와 학문의 보고였다. 종교에만 치중했던 중세 시절 잊고 지냈던 고대인의 과학, 예술, 문화의 결정체가 고문서에 풍부하게 담겨 있었다. 고문서는 새로운 인문정신을 일깨워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그래서 코시모는 자신이 사귄 학자와 예술가를 비잔틴 제국 등에 보내 고문서를 구입하게 했다. 고문서를 찾기 위해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갈 계획을 세웠을 정도였다. 고문서 구입에 재산을 아낌없이 쓴 것은 물론 필경사를 대거 고용해 구입할 수 없는 고문서는 베껴오게 했다.

그는 1443년 산마르코 수도원 내부에 메디치 도서관을 만들어 고문서를 분류하고 보관했다. 고대 그리스나 히브리어, 아람어 문서는 당시 유럽의 공용어나 마찬가지였던 라틴어로 번역됐다. 고대 문명을 제대로 번역해 기록한 아랍어 문서도 번역됐다. 이 번역서들은 유럽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물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학, 문학, 과학의 가치를 전 유럽에 새롭게 확산하면서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됐다. 이에 따라 메디치 도서관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됐다. 이 도서관의 초대 관장을 지낸 토마소 파렌투첼리는 나중에 교황 니콜라오 5세가 됐는데 풍부한 학식 덕분에 ‘인문주의자들의 교황’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더욱 존경스러웠던 점은 엄청난 영향력에도 코시모는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의견이나 제안에 대해 입법회의에서 반대 의견을 말하면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일생을 통해 그는 ‘평등한 시민들 중의 제1인자’를 자처했다. 그의 권력과 권위는 엄청난 재산에서 나왔다. 그는 이 재산을 교육과 예술, 그리고 건축을 후원하는 데 사용했다. 이는 모두 공공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공동체에 헌신하면서 그는 시민의 찬사를 받고 존경을 받게 됐다. 그의 권위는 여기에서 비롯됐다. 존경에서 나온 권위는 자연히 권력으로 이어졌다.

메디치 가문은 원래 약사 집안이었다. 약사는 과학자다. 메디치라는 이름 자체가 약사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메디코에서 비롯했다. 가문의 문장도 동그란 알약으로 이뤄졌다. 메디치 가문이 독약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유지한다는 소문이 오랫동안 난 것도 이런 가문의 전통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처음 약국 운영으로 돈을 벌어들인 뒤 이를 바탕으로 모직 교역으로 업종을 바꿨다. 여기서 자본을 축적한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디 비치에 이르러 메디치 은행을 창업해 금융업에 진출했다. 코시모는 그의 장남이다. 코시모는 금융업뿐 아니라 제조업도 운영했으며 그의 생전에 피렌체 시민의 절반 정도가 메디치 가문에서 급료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시모가 1434년 피렌체의 사실상의 지배자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코시모는 사업에서 얻은 재산을 바탕으로 권력자로 떠올랐다. 그는 재산으로 권력만 얻은 게 아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를 초청해 피렌체를 문화·예술·건축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을 모으는 피렌체의 건축물과 수많은 예술작품과 미식문화는 코시모와 그의 메디치 가문 후손들이 이룬 것이다.

코시모는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 역사 흐름을 바꾸는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르네상스의 후원자를 넘어 실질적인 추진력을 제공했다. 재산을 바탕으로 권력은 물론 존경까지 얻었다. 부가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의 가문은 이를 바탕으로 영향력을 유럽 전역으로 뻗었다. 코시모 메디치는 사후에 ‘국부(라틴어 pater patriae)’칭호를 얻었다. 명예로운 도시국가 피렌체의 명예로운 통치자였던 것이다. 그 힘은 재산을 올바른 시기에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한 데서 나온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정치 권력을 쥐는 것과는 별개로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집안이었다. 피렌체의 통치자는 물론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레오 11세라는 세 명의 교황까지 배출했다.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도시국가였던 피렌체는 물론 유럽의 중심지였던 로마까지 좌지우지한 것이다. 로마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힘을 앞세워 유럽 전역을 사실상 지배했다. 메디치 가문은 그 중심에 있었다.

유럽 역사를 만든 메디치 가문


▎베네초 고졸리의 동방박사 그림 속에 메디치 가문의 인물들이 자리잡은 그림. 가문의 예술사랑 전통과 권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메디치 가문은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스페인 왕실과도 연결됐다. 유럽 각지로 금융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경제력은 물론 정보력까지 갖춘 메디치 가문의 협력을 노린 정략적인 결혼이었다. 거액의 지참금은 기본이었다. 이를 거기에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유럽 최고 수준의 문화를 누리던 피렌체의 문화도 함께 흘러 들어갔다. 메디치와 연결되면 풍부한 자금과 함께 문화도 얻을 수 있었다.

그 시초는 로렌초 2세 데 메디치(1492~1519, 1513~1519 피렌체의 통치자)의 딸인 카테리나 데 메디치(프랑스어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 1519~1589)다. 카트린은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앙리와 결혼했다. 앙리는 나중에 프랑스 국왕 앙리 2세(1519~1559, 재위 1547~1559)가 됐고 카트린은 프랑스의 왕비가 됐다. 이 결혼은 카트린의 시아버지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1494~1547, 재위 1515~1547)가 다리를 놓았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를 흠모했다. 피렌체 공화국 출신인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건너와 <모나리자>와 같은 걸작을 완성했으며 프랑스에서 생을 마쳤다. 프랑수아 1세는 미술중개상을 고용해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거장의 걸작을 프랑스로 옮겨왔다. 오늘날 루브르를 장식하고 있는 숱한 이탈리아 걸작은 그의 치세에 프랑스로 옮겨졌다. 프랑수아 1세는 문화국가 프랑스의 초석을 다진 군주로 프랑스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프랑수아 1세는 메디치 가문과 사돈을 맺기를 원했다. 카트린이 프랑스로 시집오면서 당시 르네상스의 발상지로 유럽 최고의 문명을 누리던 이탈리아에서 미술, 음악, 무용, 요리 등 수준 높은 문화가 프랑스에 전파됐다. 문화국가 프랑스의 전통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에서 전수받은 셈이다. 문화예술뿐 아니라 음식문화도 함께 프랑스로 들어왔다. 음식을 포크로 먹고 접시에 담아 코스로 줄기는 풍습은 당시 카트린이 시집가면서 프랑스로 처음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까지 대부분의 유럽국가는 칼 하나 들고 구운 소나 돼지, 닭, 오리, 거위의 살을 쌓아놓은 채 잘라서 먹었다. 양상추, 브로콜리, 완두콩, 아티초크 등 오늘날 서양요리의 기본이 되는 채소도 프랑스에 전해졌다. 파스타, 파르메산 치즈 등 이탈리아산 식재료도 소개됐다. 아울러 당시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던 칠면조와 토마토도 카트린이 프랑스로 시집가는 것을 계기로 메디치 가문을 통해 비로소 프랑스에 소개됐다. 뿐만 아니고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풍요한 음식문화를 뒷받침하던 수많은 소스의 레시피도 전해졌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통하는 ‘오렌지 오리’ 요리도 원래 피렌체에서 나온 것이다.

카트린의 후손들은 유럽 역사의 주역이 됐다. 카트린은 10명의 자녀를 뒀는데 7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그의 아들로 메디치 가문의 외손자인 프랑수아 2세(1544~1560, 재위 1559~1560), 샤를 9세(1550~1574, 재위 1560~1574), 앙리 3세(1551~1589, 재위 1574~1589)는 프랑스 국왕을 지냈다. 앙리 3세는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군주(1573~1575)로도 선출돼 폴란드 국왕과 리투아니아 대공 자리를 잠시 지켰다. 하지만 앙리 3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면서 발루아 왕조는 단절되고 같은 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왕조가 뒤를 이었다.

카트린의 딸 엘리자베트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1527~1598, 재위 1556~1598)에게 시집가 이사벨 데 발로이스라는 이름으로 왕비가 됐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최전성기의 국왕이었다. 유럽에서는 이웃 포르투갈을 병합하고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 포함),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 공국, 이탈리아 밀라노 공국, 사르데냐 섬, 시칠리아 섬, 나폴리 왕국을 지배했다. 유럽 밖에서는 포르투갈을 제외한 중남미 거의 전부와 아프리카 남서부, 인도 서해안, 동남아시아의 필리핀, 말라카, 보르네오 섬 등을 식민지로 지배했다. 필리핀이란 국명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종교전쟁 시기에 유럽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레반토 해전에서 오스만 튀르크 해군에 승리해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이렇게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의 군주였던 펠리페 2세가 메디치 가문의 외손녀를 왕비로 삼은 것이다. 펠리페 2세는 평생 4차례 결혼했는데 그의 세 번째 결혼 상대가 프랑스 공주이자 메디치 가문의 외손녀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스페인어로 이사벨 드 발로이스(1545~1568)다. 결혼 당시 이사벨은 겨우 14세였다. 이사벨은 출산 도중 세상을 떠난다.

‘마고’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카트린의 딸 마르그리트(1553~1615)는 프랑스 서남부 나바라 왕국의 왕자로 부르봉 가문인 앙리 드나바라(1553~1610, 재위 1589~1610)와 1589년 결혼했다. 나바라는 발루아 왕가의 마지막 프랑스 국왕이자 처남인 앙리 3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암살 당하자 1589년 앙리 4세로서 프랑스 국왕에 즉위했다. 부르봉 가문은 발루아 왕가와 마찬가지로 카페 왕조의 분가로서 발루아 왕가가 남자 후손을 남기지 못할 경우 프랑스 왕위 계승의 1순위가 되기 때문이다.

코시모의 후원으로 꽃피기 시작한 서양문화

카페 왕조는 10세기 프랑크족의 카롤링거 왕국을 대신해 프랑스의 왕이 된 위그 카페의 후손으로 이뤄졌다. 카페 욍조는 발루아 가문과 부르봉 가문으로 분열하는데 모든 프랑스의 국왕은 이 세 왕조에서 나왔다. 이 중 발루아의 마지막 군주가 메디치 가문의 외손자이고 부르봉의 첫 국왕이 메디치 가문의 외손녀 사위인 셈이다.

신교도인 앙리 4세가 즉위하자 프랑스는 신구교도 간의 내전에 휩싸였다. 마르그리트는 가톨릭 세력의 편에 서서 남편의 왕위가 무효가 되도록 노력했다. 내전은 앙리 4세가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 국민의 인정을 받으면서 진정됐다. 1593년 수도인 파리에 입성한 앙리 4세는 1598년 가톨릭 외에도 칼뱅주의 개신교도 교파인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반포해 종교내란인 위그노 전쟁을 끝내고 국가통합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는 발루아 왕조의 프랑수아 1세와 함께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군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의 사후인 1658년 부르봉 왕조의 후손인 루이 14세가 퐁텐블로 칙령으로 이를 폐지하면서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가 됐다. 상공업자이자 기술자가 대부분으로 프랑스 경제를 뒷받침했던 위그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 영국, 독일, 북미 식민지 등지로 대거 망명했다, 이로써 프랑스 경제는 갈수록 피폐해졌다. 프랑스 혁명(1789년) 이후인 1802년에야 위그노에 대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됐다.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한 이듬해인 1599년 마르그리트와 이혼(형식적으로는 혼인무효)했다. 그는 1600년 메디치 가문 출신인 27세의 마리아 데 메디치(프랑스어로 마리 드 메디시스, 1573~1642)와 재혼했다. 앙리 4세는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지참금을 받아 피폐했던 국가 재정을 정상으로 회복하는 데 사용했다. 프랑스의 영토와 국민통합을 이뤄 대왕으로 존경 받는 앙리 4세는 메디치 가문의 ‘겹사위’인 셈이다. 앙리 4세가 광신적인 가톨릭 교도의 칼에 암살당하자 마리 드 메디시스는 9살의 아들 루이 13세를 왕위에 올리고 섭정으로 프랑스를 다스렸다. 부르봉 왕조는 루이 13세와 태양왕 루이 14세로 이어지면서 프랑스의 전성기를 이뤘으며 루이 16세가 1789년 대혁명으로 퇴위할 때까지 프랑스를 다스렸다.

이렇듯 메디치 가문의 힘은 18세기까지 전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그 힘의 원천은 코시모가 추구했던 바로 그 인문학과 문화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은 근대 들어 세계 경영에 들어갔다. 오늘날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고 있는 서양의 인문학과 문화예술은 코시모의 후원으로 꽃피기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훌륭한 부자는 역사를 만든다.

채인택 - 채인택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201609호 (201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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