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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BES 400] 아메리칸드림은 건재하다 

 

MONTE BURKE 포브스 기자
TV화면에서, 정치집회에서, 심지어 의회에서조차 이민자를 곱게 보는 눈길은 없다. 그러나 포브스 400대 부자 순위에서는 훈훈한 러브스토리가 펼쳐진다. 미국 외 국가에서 출생한 부자가 전체의 10%를 상회하며 사상 최고의 수치를 기록한 것이다. 미국의 기업가정신 그리고 일자리 창출에 청신호를 보내며 말이다.
토마스 피터피(Thomas Peterffy)는 1944년 9월 30일 부다페스트의 한 병원 지하에서 태어났다. 소비에트연방의 공습때문에 어머니가 이곳으로 피신해 피터피를 출산한 것이다. 소비에트연방 덕분에 나치점령으로부터 해방된 헝가리는 위성국가로 전락하여, 공산주의라는 또다른 이름의 억압체제하에 신음하게 된다. 귀족 출신이었던 피터피와 그 가족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헝가리에서 우리는 죄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피터피의 말이다. 젊은 피터피는 이 감옥에서 벗어나 미국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꿈을 꾸었다. 20세가 되던 해, 피터피는 탈출계획을 세웠다. 피터피는 헝가리인에게 서독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기 위한 단기비자가 허용된다는 점을 이용했다. 당시 불법으로 미국행을 감행한 수백만의 이민자들처럼, 피터피는 비자가 만료된 이후 고국 헝가리로 돌아가지 않고 대신 미국으로 떠났다. 1965년 12월 피터피는 뉴욕시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내렸다. 수중에 동전 한 푼 없었고 영어도 할 줄 몰랐다. 여벌옷, 측량지침서, 계산자, 그리고 조상의 그림 한 점이 담긴 여행가방이 전재산이었다.

피터피는 헝가리 출신 이민자들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던 스패니시 할렘(Spanish Harlem)에 정착해 누추한 아파트를 전전했다. 조금은 두려웠지만, 행복했다. 피터피는 “고국을 등지고 문화가 다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미국으로 온 것은 큰 결심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정말 내가 뿌린대로 거둘 수 있고, 능력과 성공하고자 하는 의지가 한 개인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미국은 무한한 기회의 땅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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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호 (201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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