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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8) 박태준 포스코(POSCO) 창업자 

제철보국으로 애국한 한국의 철강왕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 자료 협조 포스코 홍보실, 박태준 미래전략연구소 / 자문 한국경영사학회, (사)글로벌전략연구원
청암(靑巖) 박태준(1927~2011)은 포스코의 창업·건설·경영에 평생을 바친 불세출의 기업가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우향우 정신’으로 제철보국과 교육보국을 실천한 애국자이자 탁월한 경영성과를 이뤄낸 CEO이기도 했다. ‘한국의 철강왕’ 박태준의 기업가정신을 4가지 주제로 정리해 재조명했다.

▎청암 박태준은 ‘제철보국’의 기업가정신으로 포항제철의 창업 건설·경영에 평생을 바친 창업자다. / 포스코 제공
청암 박태준은 누구인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생전에 “박태준은 후세의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있는 교본이다”고 말했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청암이 타계하자 “스티브 잡스가 정보기술(IT) 업계에 미친 영향보다 박태준이 우리나라 산업과 사회에 남기신 공적이 몇 배 더 크다”고 평가했다. 국내 학계의 권위자였던 송 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기업인 박태준을 두고 “지(志)와 의(義), 그리고 렴(廉)과 애(愛), 이 4가지 선비 사상을 행위 규범으로서 실천한 ‘현장의 선비’”라고 칭송했고, 그 깐깐한 소설가 조정래조차 “한국의 경제 발전사 위에서 가장 크고 밝게 빛나는 인물”이라며 ‘마하트마 박’으로 칭하고 싶다는 말로 높이 우러렀다.

그런데 정작 생전의 박태준은 자신이 높이 평가받고 ‘철강왕’으로 불리는데 대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을 작곡하셨고, 저는 그분의 작곡에 따라 연주자들을 지휘했을 뿐입니다.” 그렇다. 박태준과 박정희 두 거인의 만남이 지금의 포스코를 만들어낸 것은 한국 현대사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박태준과 포스코에 대한 이야기는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1948년 서울 태릉의 어느 봄날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청년 박태준이 ‘건국(建國)에는 반드시 건군(建軍)이 필요하다’라는 결심을 굳히고 부산 국방경비대에 자원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그 무렵이다. 당시 박정희 대위는 사관학교 2중대장으로서 탄도학 강의를 맡고 있었다. 강의실에서 마주한 두 거인의 눈빛이 빛났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육사 생도 6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박태준의 영혼을 건드린 유일한 사람이 바로 열 살 더 많은 스승이요 선배인 박정희였다고 한다. 박태준은 6·25가 발발하자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에게 맡겨진 화천수력발전소 방어 임무를 무사히 완수해내고 가슴에 무공훈장을 세 개나 꽂은 박태준은 이때부터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신념을 가슴에 새겼고, 이는 그의 일생에 걸쳐 나침반이 된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운명적 만남


▎현장순시 중인 박태준 회장. 그는 임직원들에게 혹독한 자기검열은 물론 완벽주의를 추구했다. / 포스코 제공
장교 시절에 박태준은 부정부패와 타협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부정을 저지른 고춧가루 납품업자를 색출해 혼내주었고, 그와 관련된 군내 상관들의 압력도 단칼에 거절했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당시 박정희 사령관에게도 알려졌고,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하는 박정희의 인사참모로 발탁되는 인연으로 발전한다. 박태준은 5.16 직후에는 국가재건회의 의장이던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맡아 보좌했다. 이후 국가재건회의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1963년 민선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뒤 미국 유학을 가려는 박태준을 붙잡아 한·일국교 정상화 사전작업을 위한 일본 특사의 중책을 맡긴다. 이때 만들어진 일본 내 박태준의 네크워크와 협상력이 나중에 포스코 건설에 필요한 차관 도입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1963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을 대한중석 사장에 임명한다. 황경로·안병화·노중열·장경환·박종태·홍건유 등 4년 뒤 포항제철을 함께 설립하게 되는 평생의 동지들과 만나게 된 박태준은 부정부패와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회사를 1년 만에 흑자 회사로 바꿔놓았다. 대한중석 경영을 통해 박태준이 보여준 그 탁월한 성과를 박정희는 잊지 않고 있었다. 이는 포스코 창업을 위한 두 번째 운명적인 장면으로 이어진다.

1965년 6월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을 조용히 청와대로 불렀다. 조국 근대화를 위한 두 가지 큰 계획, 경부고속도로와 종합제철소 건설에 대한 중대 결의를 털어놓는다. “고속도로는 내가 직접 감독할 테니, 종합제철은 임자가 맡아.” 대통령의 그 한마디가 철강왕 박태준 쇳물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68년 4월 1일, 서울 한복판인 명동 유네스코회관 3층에서 39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기념식이 열린다. 바로 지금의 포스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식이다.

“포항종합제철의 모든 성공여부는 지금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직접적인 사명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의 잘못은 영원히 기록되고 추호도 용납될 수 없으며 가차 없는 문책을 받아야 합니다…” 박태준이 낭독한 포항제철 창립사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비장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마치 전쟁에 출정하는 장수의 출사표와도 같았다. 그것은 포스코 창업이 실로 국가의 대계(大計)였기 때문이다. 박태준의 기업가정신을 특징짓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이 여기에서 나온다. 박태준은 1978년 3월 28일 직원들을 위한 연수원 특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창업 이래 지금까지 제철보국이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쌀이 생명과 성장의 근원이듯 철은 모든 산업의 기초소재입니다. 따라서 양질의 철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하여 국부를 증대시키고,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곧 제철보국입니다.”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기 착공버튼을 누르는 청암 박태준과 박정희 대통령. 두 거인의 만남이 지금의 포스코를 만들어냈다.
제철보국은 철강 불모지에 포스코를 세워 세계 일류 철강기업을 키움으로써 조국 근대화의 견인차가 되겠다는 박태준의 다짐이자 평생의 사명이 된다. 박태준은 기업의 성패는 기업구성원, 즉 임직원의 정신적 자세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포항제철을 건설할 구성원을 선발할 때도 능력보다는 품성이 바른 사람, 경제적 이익보다는 제철보국의 사명감을 공유할 사람을 우선으로 뽑았다고 한다. 박태준의 애국심은 유별났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남북으로 갈라진 절대빈곤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엘리트 박태준에게는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어야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뼛속 깊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몇몇 학자들은 이런 박태준의 정신을 ‘무사심(無私心)과 순명(殉命)의 애국주의’라고도 했다. 포스텍(POSTECH, 포항공과대학교) 부설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는 개인인 ‘나’가 아닌 국가를 위한 성취를 지상과제로 여긴 그의 정신세계를 그의 이름을 따서 ‘태준이즘(TAEJUNEISM)’이라고 명명하고 있기도 하다. 애국심에 기초한 청암의 도덕성은 무서울 정도였다. 지근거리에서 박태준을 지켜본 황경로 포스코 2대 회장이 주저없이 “그분의 리더십의 근간은 청렴결백이었다”고 인정할 정도다. 실제로 청암은 포스코 주식을 단 한 주도 받지 않는 무서운 청빈정신을 보여주었다.

‘우향우 정신’으로 제철보국


▎1976년 5월 31일 포항제철 제2고로에 불을 붙이는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사장.
박태준의 기업가정신을 말할 때 ‘우향우 정신’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이는 청암이 임직원들에게 “목숨을 걸자. 조상의 핏값(대일 청구권)으로 짓는 것이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사무실에서 똑바로 걸어 나와 우향우 한 다음 영일만 앞바다에 몸을 던져야 한다”고 독려한 데서 비롯됐다. 영일만에서 우향우를 하게 되면 바로 동해바다다. 우향우 정신이란 ‘포항제철소 건설에 죽기 살기로 달려들고, 실패하면 바다에 빠져죽자’는 지독한 결기를 의미한다. ‘우향우’는 박태준을 상징하는 표어이자 전통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향우 정신으로 무장한 박태준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포항제철을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철저히 보호해주었고, 1968년부터 1979년 사이에 무려 13차례나 포항제철을 방문해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박태준에게만은 언제든지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는 특권도 주었다. 이런 특별대우가 포항제철 임직원들의 헌신을 한껏 끌어올리는 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우향우 정신은 한편으로 혹독한 자기검열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박태준은 그 잣대를 영일만 현장의 모든 임직원들에게 요구했다. 이대환 작가가 쓴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의 한 대목을 보자.

제강공장의 파일에 콘크리트를 먹이는 날이었다. 천우신조로 박태준은 지휘봉을 들고 마침 높다란 철구조물 위에서 그 작업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레미콘 트럭이 쏟아내는 콘크리트를 받아먹은 땅 속의 강철 파일들이 슬며시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가. 순간 그의 동공에 불꽃이 튀었다. 박태준은 즉각 공사를 중단시키고 불도저를 불러오게 했다. “밀어봐.” 불도저가 비스듬히 기운 파일을 건드리자 맥없이 쓰러졌다. 옆의 똑바로 서 있는 파일도 맥없이 쓰러졌다. 있을 수 없는,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책임자 나왓~” 책임자는 일본 설비회사의 하청을 받은 한국 건설회사 소장이었다. 박태준은 지휘봉으로 그의 안전모를 내리쳤다. 단번에 지휘봉이 두 토막 났다.

“너는 민족 반역자야. 조상의 혈세로 짓는 공장에서, 야! 저게 파일로 보이나? 저건 담배꽁초야, 담배꽁초! 천장의 전로에서 쇳물이 엎질러지면 밑에서 일하는 동료가 타죽거나 치명적 화상을 입는 거야. 그래서 부실공사는 적대행위야!” 비서가 건네준 두 번째 지휘봉이 부실공사 책임자의 안전모 위에서 또 부러졌다. 제강공장의 ‘꽁초 사건’은 바람을 타고 아주 빠르게 모든 현장으로 빠짐없이 번져나갔다.


포스코 건설과정에서 부실공사를 막고 안전제일의 생활화가 이뤄진 것은 이같은 우향우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태준은 군인의 기(氣)와 기업가의 혼(魂)으로 포스코 창업을 이뤄냈다. 전투를 수행하듯 기업을 일궜다. 기적이 일어나야만 공기 안에 제철소 건설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본 기술자들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통상적으로 4~5년 걸리는 제철소 건설을 착공 3년 3개월 만인 1973년 7월 2일 준공을 마쳤다. 박태준이 제철소 건설에 따른 공기를 앞당기기 위해 작업자들에게 하루 24시간 작업을 지시한 뒤 자신도 하루 3시간씩 자고 일어나 독려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박태준이 이렇게 목숨을 걸고 일으켜세운 포스코가 한국 자본주의의 자존심이 된 것은 당연하다. 창립 48년을 맞은 올해 포스코(회장 권오준)는 연산 4000만t의 조강 생산능력을 갖춘 세계 4위의 글로벌 철강 회사로 발돋움했다. 철강생산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는 기술 개발로 철강 공법의 혁신을 불러일으켜 기술 수출까지 하고 있다. 일본의 기술지원을 받아 영일만 허허벌판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초창기 역사에 비하면 상전벽해가 이뤄진 것이다.

뚝심의 캔두이즘(Can-doism)


▎박태준은 평생 동안 ‘무엇이든 세계 최고가 되자’, ‘절대적 절망은 없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10년 후의 자기 모습을 설계하라’ 이 4가지를 화두로 잡고 일생을 바쳤다고 회고했다.
포스코 포항제철소 정문에는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이라고 적어놓은 박태준의 문구가 지금도 걸려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내는 캔두이즘은 포스코와 박태준을 상징하는 두 번째 기업가정신이다. 우선 1960대 후반의 한국이 처한 여건에서는 종합체절소 건설 자체가 불가능한 사업이었다. 제철산업은 제선(쇳물 만들기), 제강(강철 만들기), 압연(금속가공), 열연(금속 성형)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전 과정을 모두 갖춘 철강공장을 일관 종합제철소라고 한다. 한국이 종합제철소 건설을 말하자 세계은행, 유럽과 미국, 일본 모두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에 비협조적이었다.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느니 자국의 철강을 가져다 쓰는게 더 경제적이라며 오히려 한국을 설득했다. 하지만 궁즉통이라고 했던가! 절망에 빠져 있던 정부 내부에서 대일(對日) 청구권자금 8천만 달러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하지만 대일청구권자금은 돈을 대는 일본이 사전에 자금의 사용처를 명시해둔 것이기 때문에 포항제철 건설자금으로 바로 활용할 수는 없었다.

이에 박태준 사장과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등 정부 관련 부처 관계자들이 일본의 내각 등 정책 결정자들을 상대로 끈질긴 설득 작업에 나섰다. 박태준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라는 논리로 설득에 나섰다. 북한이 도발하면 일본에도 심각한 위협요인이 되기 때문에 이를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이 한국의 경제발전을 도와야한다고 역설한 것. 일본 수상을 지낸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당시 자신을 설득하던 박태준을 기억하며 “박태준은 한국의 진정한 애국자다. 냉철한 판단력, 부동의 신념과 정의감, 깊은 사고력을 겸비한 그의 인품이 일본의 대한(對韓) 협력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박태준의 끈질긴 설득이 마침내 통했다. 박태준은 제철소 건설을 위한 외자 1억2370만 달러 중 대일 청구권 자금 6370만 달러, 일본수출입은행 차관 5000만 달러를 제철소 건설에 조달하기로 일본과 합의한다. 이런 고난의 과정을 겪고 나서야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소의 착공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일본의 ‘신일본제철’기술자들이 포항제철소 건설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1973년 6월, 포항제철소는 첫 번째 쇳물을 쏟아내는데 성공한다. 유럽과 미국이 ‘한국은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고 운영할 능력이 없다’고 단언했던 불가능을 박태준은 특유의 캔두이즘으로 해낸 것이다.

1987년 9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가 수행한 ‘포항종합제철의 국민경제기여 및 기업문화 연구’라는 연구서는 박태준이 왜 그토록 포항제철의 성공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는지에 대한 의문에 하나의 답을 준다. “만일 국내 수요가들이 포항제철 제품을 구입하는 대신 전량 수입했을 경우의 수입액에 대한 비용절감액을 보면 1979년에는 25.6%, 1982년에는 42.0%, 그리고 1985년에는 33.9%이어서 무려 예상 지출액의 3분의 1이나 됨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당시 포항제철이 ‘양질의 철강제품을 안정적으로 국제철강가격보다 30% 내지 40%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지 못했다고 가정한다면, 한국의 자동차산업도 조선산업도 전자산업도 번영을 누리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후일담이지만, 박태준이 포항제철을 건설하기 위해 세계은행에 차관을 신청했을 때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썼던 국제제철차관단의 J. 지퍼 박사는 1986년 박태준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시 내가 쓴 보고서는 정확했다. 다만 나는 한가지 실수를 했을 뿐이다. 그때는 한국에 박태준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한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된 것이다.”

덩샤오핑이 말했다는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1978년 8월 일본의 신일본제철을 방문한 덩사요핑이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 같은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요청하자 이나야마 회장은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으면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는 지을 수 없습니다.”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덩사오핑이 “박태준을 중국으로 수입하면 되겠군요!”라고 아쉬워했다는 그 일화다. 그러나 실제 덩샤오핑이 박태준 영입을 추진했다고 해도 청암이 그런 제안을 수락할리 만무하다. 박태준은 “조국이 나를 버려도 나는 조국을 버릴 수 없어!”를 늘 되뇌고 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1%까지 챙기는 완벽주의


▎1987년 5월 영국 금속학회 애터튼 회장에게 철강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베세머 금상을 받는 청암 박태준. 청암은 이 순간을 평생의 값진 보람으로 꼽았다. / 포스코 제공
박태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업가정신은 마지막 1%까지 챙기는 완벽주의다. 그는 한국 경제개발의 특징인 빨리빨리 정신에다 완벽주의까지 추구했다. 앞서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에 나오는 또다른 장면이다.

한창 철구조물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솔선수범이 몸에 익은 박태준이 90미터 높이의 제강공장 지붕으로 올라갔다. 주먹만한 대형볼트로 육중한 철구조물을 연결하는 작업에는 볼트를 확실히 조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수백 톤씩 나가는 장비들의 반복운동을 견디지 못한 철구조물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조여진 것은 머리 부분이 말끔히 떨어져나가고, 허술하게 조여졌거나 오차가 생긴 것은 머리 부분이 지저분하게 남는다. 문득 박태준이 걸음을 멈췄다. 철구조물에 남은 ‘볼트의 지저분한 머리’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당장 시찰을 중단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간부들을 집합시켜 불호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모든 볼트를 하나도 남김없이 일일이 확인하라! 잘못 조인 볼트는 머리에 흰 분필로 표시하라! 서울사무소에 연락해서 시공회사의 책임자를 즉각 현장으로 내려오게 하라!”

무려 24만 개의 대형볼트를 확인해 그 중 약 400개에 흰 분필이 칠해졌다. 그것은 모조리 교체되었다. 눈여겨 보지않았으면 언젠가 제강공장에 ‘붕괴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직원들 사이에 ‘섬뜩할 만큼 예리한 육감을 지닌 사람’, ‘남의 눈엔 멀쩡해 보이는 것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비정상의 눈을 지닌 사람’으로 불리게 되는 박태준. 그의 아주 특별한 감각은, 부실공사를 추방하여 포철의 미래에 느닷없이 덤벼들 큰 우환을 막아내는 예방주사 같았다.


박득표 전 포스코 사장은 이를 두고 “우리 임원들이 어떤 현장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회장님은 희한하게도 딱 집어내듯이 찾아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박태준은 이렇듯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도 임직원들에게 공을 돌리는 선공후사가 몸에 밴 겸손한 리더이기도 했다. 이런 박태준이었기에 광양제철소 건설을 위한 광양만 호안공사 때 “잠수복 가져와. 내가 들어가지”라는 박태준의 말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 스스로 차가운 겨울 바닷속으로 뛰어든 사람들이 바로 초창기 포스코 임직원들의 모습이었다. 박태준은 “이런 친구들 덕분에 광양만 호안 석축은 숱한 태풍에도 돌조각 하나 떨어지지 않고 말짱하다. 포스코 신화는 바로 이들 손으로 만들어낸 것이다”라며 예의 임직원들에게 공을 돌렸다.

박태준의 기업가정신은 미래를 내다본 인재 양성의 교육보국에서 그 마지막 빛이 난다. 박태준은 포스코 최고경영자로 재임한 25년 동안 포항과 광양에 유치원, 초, 중, 고교 14개교를 세우고 모두 일류 사학으로 키워냈다. 1986년에는 한국 최초의 연구중심 이공계 대학인 포스텍을 세워 세계적인 명문대학으로 육성했다. 포스텍 설립 뒤에는 포항방사광가속기 설립이 이어졌다. 나중에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박태준의 교육보국은 1970년 포철에 들어온 보험회사 리베이트 6000만원이라는 돈에서 출발했다. 그 돈을 받은 박태준이 청와대로 들고 가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것은 포철의 예산에서 빼낸 것이 아니고 공돈이니 통치자금에 보태 쓰시라”고 하자 박 대통령이 “임자 마음대로 써라”며 돌려주었다는 일화다. 박태준은 임원들과 협의해서 그 돈으로 제철장학회를 설립한다. 당시 제철장학회를 통해 처음 세운 교육기관이 포항의 효자제철유치원이다. 이렇듯 박태준이 시작한 ‘포항제철의 교육’은 그대로 한국 교육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인재양성으로 교육보국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퇴직 임직원들 위한 문화행사 ‘보고 싶었소! 뵙고 싶었습니다. 재회’ 입장에 앞서 자신과 포스코의 역사를 담은 추억의 사진전을 주의깊게 둘러보고 있다. / 중앙포토
포스코는 현재 박태준의 유지에 따라 ‘글로벌포스코를 이끌어갈 미래의 경영리더’양성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박태준은 2004년 12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평생 동안 ‘무엇이든 세계 최고가 되자’, ‘절대적 절망은 없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10년 후의 자기 모습을 설계하라’ 이 4가지를 화두로 잡고 일생을 바쳤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한 이 4가지가 앞서 살펴본 그의 기업가정신과 그대로 연결된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는 우향우정신의 제철보국으로, ‘절대적 절망은 없다’는 뚝심의 캔두이즘으로, ‘무엇이든 세계 최고가 되자’는 속도전 속에서도 마지막 1%까지 최선을 다하는 완벽주의로, ‘10년 후의 자기 모습을 설계하라’는 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보국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가 얼마나 탁월한 경영자이자 불세출의 기업가였는지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생전에 박태준은 평생의 가장 값진 보람으로 1987년 5월 ‘베세머 금상’을 수상한 것을 꼽았다. 영국인 베세머는 ‘전로(轉爐)제강법’을 개발해 ‘강철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인물이다. 이 제강법을 미국으로 들여온 인물이 바로 세기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다. 카네기 역시 철강업계의 노벨상이라는 베세머 상을 은퇴한 뒤인 1904년에야 받고 감격했다고 한다. 박태준은 1988년 5월에는 철강왕 카네기가 세운 미국 카네기멜런대에서 명예 공학박사를 받았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도 “장하네, 이 사람아. 일본 철강인도 못 받은 상을, 현역 기업인으론 세계 처음으로 받다니…”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베세머 금상과 카네기멜런대의 학위는 당대 최고의 철강회사를 이루겠다는 박태준의 오랜 꿈이 실현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의 평생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을 전세계 기업인들로부터 공인받은 것과도 같았다. 그 뒤 박태준은 정치의 길을 걸었지만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기업인의 영광은 퇴색되지 않았다.

2011년 9월, 노인 박태준은 포항제철 초기에 영일만 모랫바람 속에서 함께 고생했던, 퇴역한 현장 직원들과 재회하는 자리를 가졌다. ‘보고 싶었소! 뵙고 싶었습니다! 재회’ 행사에 모여든, 이제는 모두 노인이 된 400여 명의 동지들 앞에서 박태준은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포스코의 종잣돈이 대일 청구권자금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거기서 고도의 윤리성이 나온다, 포스코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와 기획에 의해 탄생했으며 그분이 나를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울타리가 돼 주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조업과 건설 중에 유명을 달리한 동지들을 항상 기억하자.”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강조했다. “포스코의 역사 속에, 조국의 근대화 역사 속에 우리의 피와 땀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인생의 자부심과 긍지로 간직합시다!”

그로부터 세달 뒤인 2011년 12월 13일 박태준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세운 포스코 용광로의 불은 한국 자본주의의 상징으로서 지금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 자료 협조 포스코 홍보실, 박태준 미래전략연구소 / 자문 한국경영사학회, (사)글로벌전략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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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호 (201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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