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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맨 신화' 김국현 이니스트에스티 대표 

원료의약품 제조에서 신약 개발까지 

최영진 기자 cyj7@joongang.co.kr·사진 김경록 기자
원료의약품 제조로 일본과 대만 등 해외 진출에 성공한 이니스트에스티. 원료의약품 유통으로 시작해 원료의약품 제조, 그리고 신약 개발에 도전하면서 성장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대비하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해 12월 경기도 용인시 분당수지에 있는 이니스트에스티 본사에서 만난 김국현 대표는 샐러리맨의 성공신화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이 정도 매출을 올렸으면 됐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회사는 몰락한다. 기업은 언제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살아남는다.”

한국의 원료의약품(API, 완제의약품을 제조하는 데 사용되는 원료) 업계에서 중견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김국현(58) 이니스트에스티 대표의 말이다. 지난해 12월 경기도 용인시 분당수지에 있는 이니스트에스티 본사에서 만난 김 대표는 샐러리맨 신화를 대표하는 기업인이다.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원료의약품 유통기업과 제조기업 그리고 완제의약품 기업 3개를 운영하는 중견기업인으로 성공했다. 그가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던 것은 조그마한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년 수십억 매출 올리던 제약회사 판매팀장


1970년대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했던 학생들은 상업고등학교를 많이 택했다. 상고를 나오면 은행에 취직할 수 있고, 이후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의 학생들이 상고를 꿈꿨던 이유다.

전남 해남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김 대표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가정형편에 대학을 꿈꾸는 일은 가당치 않았다. 공부는 계속하고 싶었다. 목포상고를 택한 이유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한마디로 상고 체질이 아니었다. 숫자가 자신과 잘 맞지 않았던 것.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은 상고를 나와 은행에 취직했지만, 그는 다른 일을 찾아야만 했다. 1975년 상고 졸업 후 해군에 다녀왔다. 번듯한 옷을 입고 깨끗한 사무실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것이 제약회사 동화약품이다. 1982년 부채표로 상징되는 가스활명수, 후시딘 같은 약으로 유명한 동화약품에 입사했다. 김 대표는 “나는 제약업계에서 이렇게 오래 일하게 될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제약업계는 매력적인 분야다”고 말했다.

그는 동화약품에서 ‘잘나가던’ 원료의약품 판매팀장이었다. 의사와 약사들을 상대로 판매부터 수금, 관리 등을 모두 맡으면서 1인 5역을 해냈다. 심지어 그는 직원 한 명과 함께 한 해에 매출 100억원을 기록해 회사를 놀라게 했다. 동화약품이 ‘동화약품을 빛낸 100인’에 ‘김국현’이라는 이름을 넣었을 정도다. 김 대표는 “샐러리맨으로 일할 때도 월급쟁이가 아니라 내 사업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하지만 샐러리맨으로 정년퇴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 사업을 하고 싶다’는 갈망이 줄어들지 않았다. 회사 역시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치킨 대리점을 해보고 싶다”면서 사표를 던졌던 그에게 회사는 “회사를 다니면서 해봐라”고 말할 정도였다.

1994년 독립을 결심하고, 동우약품이라는 원료의약품 유통업체 설립 준비를 마쳤다. 그래도 회사는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 사표를 내고도 자그마치 3년이 지나서야 회사를 나올 수 있었다. “독립하겠다는 결심은 했지만, 회사가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 좀 힘들었다. 그래도 독립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다”고 김 대표는 회고했다. 회사가 어쩔 수 없이 그의 사표를 수리한 것은 동우약품 사업자등록증과 사무실 계약서를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직속상관이었던 임원은 그 서류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한 후에야 사표를 수리해줬다. 회사와 이런 ‘밀당’을 한 이유에 대해 “앞으로도 계속 약밥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친정인 동화약품에서 좋게 나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1994년 9월 1일 동우약품 일을 시작했는데, 8월 30일까지 동화약품에서 일하고 나왔다”며 웃었다.

서울 대림동의 한 지하사무실에 동우약품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사장인 김 대표와 전화를 받고 사무를 담당하는 여직원 한 명이 전부였다.

당시 한국의 제약업계는 원료의약품의 9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이다. 제약업계에서 10년 넘게 일했던 탓에 인적 네트워크는 좋았다. 원료의약품을 수입해서 제약업계에 파는 일은 빠른 시간에 자리 잡아갔다. 그는 “6년 만에 100억원의 매출을 올렸으니까 빠르게 성공한 것”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일본과 대만에서 인정받는 원료의약품 제조기업


▎김국현 대표는 2014년 JRP를 150억원에 인수해 원료의약품 유통부터 제조, 완제의약품 제조까지 할 수 있는 중견 제약기업으로 키웠다.
연매출 100억원은 상징성이 크다. 기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원료의약품 제조를 준비했다. 김 대표는 “원료의약품을 수입해서 유통하는 것만으로는 미래를 대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며 원료의약품 제조에 뛰어든 이유를 말했다.

2000년 충북 음성에 원료의약품 제조기업인 동우신테크(현 이니스트에스티)를 설립했다. “그때 이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다들 말렸다”고 그는 웃었다. 당시 대형 제약업계는 원료의약품 개발에 뛰어들지 않았다. R&D 비용과 시설투자비 등을 생각하면 수입해서 사용하는 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기업이 원료의약품 제조에 뛰어드는 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제약업계에 신뢰감을 줄 수 있는 기술력을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가 해외로 눈을 돌린 이유다.

2002년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목표는 일본 시장이었다. 업계 관련 전시회가 있으면 무조건 부스를 만들어 회사를 알리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시장이고 품질조건만 맞추면 수출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서 “일본 기업은 거래가 시작되면 문제가 없는 한 거래처를 바꾸지 않는다는 것도 일본을 선택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같은 해 6월 연구전담요원 2명이 있는 기업부설연구소도 만들었다. 기업부설연구소는 현재 중앙연구소로 확대 개편됐다. 경기도 성남과 충북 음성에 4개팀 30명이 일하고 있다.

2004년 초 일본 제약업계에서 대형 상사로 꼽히는 바이토와 코아상사가 이니스트에스티의 손을 잡았다. 당시 수출을 했던 원료의약품은 고혈압치료제의 원료인 테모카프릴이었다. 김 대표는 “테모카프릴 제조 기술을 인정받으면서 일본 업계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재 이니스트에스티의 수출 효자 품목은 항궤양제에 사용되는 ‘레바미피드’와 우울증치료제에 사용되는 ‘둘룩세틴’, 전립선비대증치료제 원료의약품인 ‘나프토피딜’ 같은 제품이다. 특히 레바미피드의 경우 이니스트에스티가 고순도 정제기술을 개발한 후 제조에 성공한 제품이다. 일본 제약업계에 수입되는 레바미피드 원료 중 이니스트에스티의 비중이 가장 높다고 한다. 매년 55t이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그는 “이 제품을 계기로 일본의 납품처와 거래품목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국내 발기부전 치료제 시장에서도 이니스트에스티는 유명하다. 얼마 전 이슈가 됐던 한미약품의 팔팔정과 구구정의 원료인 실데나필과 타다라필을 만들고 있다. 특히 구구정의 경우 한미약품이 유럽과 중국에 수출등록을 진행 중이다. 김 대표는 “이렇게 되면 우리는 원료의 약품을 유럽과 중국에 팔 수 있는 수출길이 열리게 된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당뇨병성 신경병증 치료제 치옥트산, 뇌혈관 질환 개선제 아세틸엘카르니틴 등이 국내에서 많이 판매되고 있다.

이니스트에스티는 2007년 100만불 수출탑 수상을 시작으로 2015년에는 1000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할 정도로 수출 비중을 늘려나가고 있다. 연 매출의 40%가 수출에서 나올 정도로 비중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김 대표는 “국내 시장도 중요하지만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한국 기업의 살길이다. 앞으로도 해외 시장 개척에 공을 많이 들일 것이다”고 말했다. 매년 매출액의 10%를 R&D에 투자했고, 기술력을 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4년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바로 신약 개발이다. 제약업계 모두가 꾸는 목표지만, 누구도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어려운 일이다. 김 대표도 “신약 개발은 막대한 돈과 기술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정도다.

김 대표는 2014년 JRP(진로제약)를 150억원을 주고 인수했다. 인수 후 JRP는 이니스트바이오제약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김 대표는 “진로제약은 매출 중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잘나간 제약업체였지만, 진로그룹의 경영악화와 변화하는 환경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면서 “JRP 인수로 완제의약품 40개를 만드는 기업이 됐고, 신약 개발에도 뛰어들 수 있게 됐다”고 자랑했다. 또한 “완제의약품 회사와 원료의약품 제조 기업이 만나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며 “글로벌 제약 기업으로 가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대표가 현재 공을 들이고 있는 시장은 미국이다. “미국에서 터졌다 하면 대박”이라고 말할 정도다. 2015년 오송생명과학단지에 글로벌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의약품 및 의료기기를 제조 생산하거나 수입할 때 제품의 안전 등 기준에 적합하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식약처가 인증을 하는 것) 규정에 맞는 표적항암제 전용 원료의약품 제조소를 준공한 바 있다. 이는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미국 LSK 바이오 파머사와 양해각서 체결

2015년 10월에는 한국 제약업계가 주목하는 미국발 소식이 전해졌다. 이니스트에스티와 글로벌 제약회사인 미국 LSK 바이오 파머사와 표적항암제의 비임상·임상시험용 시료 공급과 대량생산을 위한 원료의약품 생산 및 공급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는 것. 당시 대통령의 방미 일정에 동반한 경제 사절단에 참여해 이룬 성과다. 김 대표는 “2014년부터 경제사절단에 참석하고 싶다고 신청해 목표를 이뤘다”고 설명했다. “양해각서 체결 내용처럼 사업이 계속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LSK 바이오 파머사는 미국 유타주에 본사가 있는 글로벌 제약회사다. 이니스트에스티는 BTK 저해제(항암제에 사용되는 원료의약품의 한 종류)를 공급하게 된다. 공동 개발 중인 표적 항암제는 현재 전임상단계로 동물 실험을 통해 약효와 독성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니스트에스티는 비임상시험용 시료 공급의 공정 개발을 완료했고, 대량생산도 준비 중이다. 만일 전임상 단계가 성공한다면 임상으로 진입하게 된다. 김 대표는 “미국 제약사와 공동연구를 진행해 미국 의약품원료 시장에 진출하는 첫 사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임상 단계로 진입하게 되면 이니스트에스티는 100억원대 원료의약품을 수출하게 된다. 오송생명과학단지에 지은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원료의약품 유통(이니스트팜)부터 제조(이니스트에스티), 신약 개발(이니스트바이오제약)에 이르는 라인업을 완성했다. 2015년에는 각자 이름을 가지고 있던 기업들의 CI를 이니스트로 변경했다. 김 대표는 “JRP를 인수하면서 그룹의 모습을 갖췄다”고 말했다. 3개 기업의 매출을 모두 합하면 1000억원이 넘고, 2017년에는 15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올해는 아토피 치료 보조 화장품을 시작으로 신제품들을 속속 내놓을 계획이다. 이런 결과물을 가지고 2019년에 코스닥에 상장한다는 목표다.

- 최영진 기자 cyj7@joongang.co.kr·사진 김경록 기자

201702호 (20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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