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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2) 미키타니 히로시 라쿠텐 회장 

e비즈니스로 글로벌경영 주도하는 신세대 경영인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미키타니 히로시(52·三木谷浩史) 라쿠텐(樂天)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일본의 신세대 경영인을 대표한다. 일본 최대 e커머스업체를 일군 그는 창업한 업종과 본인의 성격과 사업 스타일, 그리고 성장 과정까지 기존의 일본 경영인에선 보기 쉽지 않았던 개성으로 넘친다.

▎미키타니 히로시 라쿠텐 회장은 포브스 조사 기준 60억 달러 재산으로 기술산업 부문 세계 29위, 일본 부자 4위에 올랐다. / 바이두백과
우선 미키타니 회장이 창업해 운영하고 있는 사업 자체가 신세대적이다. 회원 수 1억 명, 출점 점포 4만 개로 일본 최대의 e커머스 기업인 라쿠텐이 그의 본거지다. 1만2981명의 직원이 일하는 이 회사는 2015년 12월31일 기준으로 연간 매출 7135억5500만엔, 영업이익 946억8900만엔, 총자산 4조2699억엔을 자랑한다. 그야말로 일본 굴지의 기업이다.

미키타니는 일본이라는 경영 환경에서 다분히 이단아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해 버블 세대의 엘리트 비즈니스맨으로서 왕도를 걸었지만 보장된 길을 과감히 걷어차고 창업의 가시밭길에 나선 것부터가 그렇다.

하버드 MBA 공부하며 기업가정신 체득


▎스페인 바르셀로나팀과의 스폰서 계약 조인식에 참석한 미키타니 회장. 그는 야구단을 운영하고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서 도쿄 필하모니교향악단의 이사장도 맡고 있다. / 바이두백과
그는 사실 성장 과정부터가 독특하다. 1965년 일본 간사이 지방의 효고(兵庫)현 고베(神戶)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 가서 2년을 살았다. 고베상과대학 금융학 교수로 일하다 예일대 연구원으로 도미한 아버지를 따라간 것이었다. 이때 배운 영어와 글로벌 감각은 미키타니가 창업과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데 평생 도움을 줬지만 멍에로도 작용했다. 귀국 뒤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심각한 ‘귀국 부적응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일본식 스파르타식 교육을 견디지 못한 그는 극심한 노이로제 증상을 겪다가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하지만, 부모의 정성으로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뒤 지독한 노력으로 적응에 성공했다. 미키타니는 이러한 청소년기에 대해 ‘용수철처럼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다시 튀어올랐다“라고 표현했다. 고베 명문인 아카시(明石) 고교에 진학한 뒤 테니스에 빠지면서 성격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뀌어갔고, 다행히 운동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선수로 활약하며 간사이 지역의 주니어부 16강까지 올랐다.

미키타니는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일본이라는 사회에 적응했다. 귀국 부적응 청소년이 모범 학생이 된 것이다. 고교 졸업 뒤 재수를 거쳐 1984년 도쿄의 히토쓰바시(一橋)대 상학부에 진학했다. 도쿄상과대학으로 출발한 이 대학은 도쿄대·교토대와 더불어 일본의 명문 국립대 중 하나다. 대학에 가서도 라켓을 놓지 않고 테니스부에서 활약했으며 3학년과 4학년 때 주장까지 지냈다. 스스로 대학생활의 95%를 테니스에 바쳤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테니스부 주장을 맡으면서 기업가에게 필요한 리더십을 길렀다고 회고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흥업은행(인수합병을 거쳐 현재 미즈노 은행)에 들어가 엘리트 은행원으로 탄탄한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은행에 들어가서도 테니스부를 이끌며 은행대항 테니스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일본의 엘리트 직장인과 차이가 없다. 그도 창업을 하지 않았으면 엘리트 은행원으로 취미인 테니스를 즐기며 조직의 한 부품으로서 인생을 평온하게 살 수도 있었다.

인생의 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사내 연수제도를 이용해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에 경영학 석사(MBA)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1991년 결혼을 한 직후였다. 물론 대부분의 일본 엘리트 직장인은 이런 기회를 스펙을 하나 더 쌓는 기회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미키타니는 이 기회를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로 만들었다. 미키타니는 하버드에서 미국의 기업가 정신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가 도미 유학을 떠날 무렵만 해도 일본의 분위기는 대기업에 근무하며 출세를 하는 것이 비즈니스맨의 왕도라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창업은 아주 비범하거나 대단히 절실하거나 회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는 풍조였다. 하지만 그가 유학을 떠난 미국이라는 나라의 가치관은 이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미국은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일으키는 사람이 훨씬 높은 평가를 받는 사회였다. 미키타니는 “자신의 사업을 운영할 수 없는 사람이나 기존의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며 당시 미국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가 MBA 유학을 하던 1990년대 전반 일본에서는 벤처나 기업가 정신이라는 말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진취적인 분위기는 일본의 전도양양한 경제 엘리트가 창업의 꿈을 꾸게 된 계기가 됐다.

은행원 그만두고 인터넷 쇼핑몰 창업

미국에서 목격하고 배운 이러한 기업가 정신은 그의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자극제가 됐다. 1993년 MBA를 받고 일본으로 돌아간 미키타니는 창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버드에서 국제 인수합병(M&A)을 중점적으로 파고들었던 그는 은행에 복귀한 뒤 기업금융개발부에서 M&A업무를 맡았다. 당시 고객 중 소프트방크 창업자 손마사요시와 유통업체 츠타야 창업자인 마쓰다 무네아키 등이 있었다. 미국에서의 MBA교육과 일본흥업은행에서 일본 신경제 창업자들과의 만남, 그리고 M&A 업무는 그렇지 않아도 야망이 컸던 그에게 결단을 채찍질했다. 1995년 창업을 결심하고 은행에 사직서를 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가장 큰 리스크는 돈과 지위를 일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인생을 후회하는 것이다.”

은행을 그만두기 직전에 그는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을 겪었다. 고향 고베와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한신 대지진이다. 이때 몇 명의 친구와 지인을 잃은 미키타니는 “인생은 유한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특히 고베에 살던 인생의 멘토 숙부와 숙모가 지진으로 한꺼번에 세상을 떠난 일도 인생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한 번뿐인 인생, 보장된 삶과 익숙한 편안함에 만족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회사를 그만두는 리스크보다 인생을 후회하는 리스크 쪽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계기였다. 그는 리스크와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 점을 일본인들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대기업에 취직을 하는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요리 사이트를 창업한 사람을 두고 주변에서 동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그는 당시 분위기를 회고했다. 그는 젊은 엘리트들이 도전적인 창업을 꺼리고 대기업 직장 생활에 안주하는 것은 한 사회와 국가가 활력을 잃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은행을 그만둔 미키타니는 친구 두 명과 함께 히비야에 있는 맨션의 방 하나를 사무실로 쓰면서 크림슨 그룹이라는 컨설팅 회사를 세웠다. 그때까지 쌓아올린 인맥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정보를 수집해 컨설팅 사업을 펼쳤다. 사업은 순조로웠지만 미키타니의 갈증은 그치지 않았다. ‘(다른 기업이나 사람의 주문을 받고 하는) 컨설팅 사업은 주체성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그는 다시금 변신을 노렸다. 컨설팅으로 모든 6000만엔을 종잣돈 삼아 그는 다음에 사냥할 새 비즈니스를 찾아 나섰다.

미키타니가 자신의 진짜 꿈을 실행에 옮긴 것은 1997년 2월이었다. 자금 마련과 함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준비까지 충분히 한 다음 창업에 나섰다. 용의주도함이 돋보이는 창업 과정이다. 당시 그가 찾아낸 사업 후보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당시 일본에서 막 유행하기 시작한 로컬 맥주(생산지에서 소비하는 개성 있는 맥주)를 취급하는 레스토랑 창업이었다. 둘째는 미국에서 본 천연효모를 이용한 제과제빵점 운영이었다. 셋째가 인터넷 쇼핑몰이었다. 하마터면 대형 맥주체인점인 빵집체인점 사장으로 성공할 수도 있었던 셈이다.

이 세 가지 후보 사이에서 고심하던 미키타니는 마침내 인터넷의 가능성을 믿고 인터넷 쇼핑몰 사업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주식회사 엠디엠’을 설립했다. 나중에 라쿠텐으로 이름을 바꾼 일본 최대 인터넷 상거래 업체다. 라쿠텐은 이 회사가 제공한 전자상거래 서비스의 이름이었는데 이를 회사 이름으로 쓰게 된 것이다.

거대 e비즈니스 그룹 라쿠텐 일궈내

하지만 전자상거래 시장은 블루오션은 아니었다. 사실 그가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미 NEC와 후지쓰 등 여러 대기업이 관련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먼저 진입한 업체가 있는 상황에서 미키타니는 이를 역전할 방안을 고심했다. 그는 기존 업체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 컨설팅 업체 운영의 경험을 살려 고객을 대상으로 상세한 조사 작업부터 진행했다. 그 결과 인터넷 쇼핑몰의 확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발견했다. 하나는 높은 출점료였다. 생산업체가 인터넷 쇼핑몰에 상품 판매를 의뢰할 경우 상당한 판매 수수료를 내야하는 것이 전자상거래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복잡한 판매 절차와 관리 과정도 문제였다. 이런 약점을 발견한 미키타니는 사이트 관리와 정보변경을 쉽게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고 쇼핑몰 출점 비용을 확 내렸다. 이를 통해 자신의 인터넷 쇼핑몰을 철저하게 이용자 중심으로 개혁했다.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오는 업체에 대해서는 입회비와 마진을 무료로 했으며 한 달에 들어가는 비용이 50만원밖에 안 되는 파격적인 우대를 했다. 판매자들에게 쇼핑몰에 스스로 사이트를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툴을 제공했다. 여기에 더해 일본 e비즈니스의 선두주자로서 그는 스피드 경영을 중시했다. 적극적인 마케팅 조사를 통해 변화하는 고객의 요구와 트렌드를 빠르게 파악해서 이를 신속한 의사결정을 통해 회사 비즈니스의 하나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과학적인 경영이 성공을 가져온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 미니타니는 대기업 쇼핑몰 사이트들을 차례로 누를 수 있었다. 2000년 자스닥에 상장했으며 창업 10주년을 맞은 2005년 출점수 1만5000점, 유통 총액이 연간 4000억엔에 이르는 일본 1위의 전자 상거래 업체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현재는 인터넷 쇼핑몰은 물론이고 금융업, 통신업, 신용카드·결제 서비스업, 포털 미디어, 여행업, 증권업, 프로스포츠 사업까지 진출해 있다. 해외 진출도 활발하다. 전 세계 210개 이상의 국가와 지역에서 인터넷으로 라쿠텐이 파는 일본 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 미키타니와 라쿠텐의 e커머스는 일본 제조업과 궤를 함께하는 운명 공동체인 것이다.

현재 미키타니의 재산은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의 2017년 3월15일 자료 기준으로 60억 달러에 이른다. 기술산업 부문에서 세계 29위의 부자다. 2016년 세계 부위 순위 228위이고 일본 4위에 올랐다.

이렇게 성장한 미키타니는 삶의 방식도 다른 일본 경영인과 차이가 두드러진다. 작은 집에 소박하게 사는 게 미덕인 일본에서 도쿄 중심가 시부야에 시가 4억9000만엔을 호가하는 호화 맨션에 사는 것부터가 그렇다. 실제 대부분의 시간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또 다른 저택에서 보내고 있다. 라쿠텐은 일본에 뿌리를 둔 것이지만 비즈니스를 글로벌로 해야 한다는 신념이 만든 생활 양식이다. 인터넷은 전 세계로 통하므로 비즈니스 영역은 당연히 글로벌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한때 일본 기업이라도 글로벌 기업을 지향한다면 국제 비즈니스는 물론 회사의 일반 업무도 영어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끊임없이 미래 먹거리 찾아 글로벌경영

경영에만 몰두하지 않는다는 것도 구세대 일본 경영인과 다른 점이다. 테니스 라켓을 놓지 않는 것은 물론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서 도쿄 필하모니교향악단의 이사장도 맡고 있다. 글로벌적이고 유연하며 문화중심적인 발상이 거대 e비즈니스 그룹인 라쿠텐을 이렇게 키운 힘이 됐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미키타니 회장이 2010년 사단법인 일본신경제동맹(Japan Association of New Economy, JANE)을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기반의 콘텐트 산업 관련 기업들이 참여하는 경제단체로 700여 개의 회원사를 거느리고 있다. e비즈니스나 IT비즈니스 등 이른바 신산업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촉진, 활성화해 국민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이 목적이다. 실질적으로는 일본 IT업계와 일본 정부가 서로 협력하는 단체다. 이 단체를 통해 업계는 정부의 경제부흥 관련 프로젝트에 협조하고 일본 정부는 IT 발전정책을 추진한다. ‘인터넷 사업 보국’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셈이다. 미키타니는 2011년 6월 제조업 중심의 산업사업 정책을 주장하는 일본경제단체연합에 반발해 탈퇴하고 일본신경제동맹에서만 활동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공격적인 글로벌 인수합병(M&A) 투자로 주목을 받고 있다. 글로벌 비스니스 분야에서 헌터, 즉 사냥꾼으로 불린다. 2015년 3월에는 교통 네트워킹 및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인 리프트(Lyft)에 3억 달러를 투자해 지분의 12%를 확보하고 이사 자리도 얻었다. 최근에는 GM과 손잡고 무인 택시 개발에 나서면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2014년에는 무려 10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의 온라인 리베이트 업체인 이베이츠(Ebates)를 인수했다. 지난 몇 년 새 미국에서 바이닷컴(Buy.com)을, 영국에서는 플레이닷컴(Play.com)을 인수하고 라이프스타일에 초점을 맞춘 소셜네트워크인 핀테리스트에도 1억 달러를 투자하는 등 글로벌 경영에 박차를 가해왔다. 2014년에는 인터넷 전화·메시지 서비스 업체인 바이버(Viber)에도 9억 달러를 투자해 관련 업계를 놀라게 했다. 물론 사들이거나 투자한 기업 모두가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록 실패를 겪어도 본사를 흔들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미키타니는 지금까지 이룬 업적이나 현재 벌이고 있는 사업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 사업을 찾아 끊임없이 전 지구를 뒤지고 있다. 기존의 일본 경영인과 확연히 차이 나는 신세대의 모습을 보이면서 새로운 일본 경영의 전통을 쌓고 있다. 미키타니의 성공을 유심히 관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채인택 -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201704호 (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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