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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와인 생산의 엔진’ 그리스 북부 와인 

세상 어떤 품종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강력한 개성 

정수지 와인21닷컴 기자·사진 Studio Adapter 윤동길
그리스 와인이 한국에 수입된 건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한번 맛을 본 사람들마다 강한 끌림을 느꼈다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스 와인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확신마저 생겼다. 최근 들어, 국제 와인품평회에서 상을 휩쓸면서 와인전문가들의 호평과 관심을 한 몸에 받기 시작한 그리스 북부 와인을 만나러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스 북부 와인은 척박하고 바람 부는 데서 포도가 자라야 자연스레 생산량이 줄면서 더욱 고품질 와인이 된다.
그리스 북부 여행은 테살로니키(Thessaloniki)에서 시작해야 한다. 현대적인 건축물과 그리스, 로마, 비잔틴 문명이 남긴 유적과 몰려든 관광객들로 사시사철 활기에 차있다. 테살로니키 사람들의 패션감각은 아테네 사람들보다 높다. 대학들이 몰려 있어 젊은이들이 많고 레스토랑, 와인 바, 나이트클럽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테살로니키는 디저트 문화가 발달해서 거리 곳곳에서 계피와 달콤한 설탕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특히 중심가 딤 구나리(Dim Gounari) 거리에 위치한 엘레니디(Elenidis) 과자점은 57년 역사를 자랑하는 맛집이다. 전통 과자인 ‘트리고나 파노라마토스(Trigona Panoramatos)’를 파는데 삼각형 모양의 페이스트리에 연유 맛을 내는 커스터드 크림을 넣어 달고 맛있다. 그리스 국민 커피인 차가운 프라페(Frappe)를 함께 먹으면 꿀맛이다.

시노마브로, 그리스 최고 품질의 레드 와인


▎알파 이스테이트 에코시스템 시노마브로 올드 바인 리저브.
테살로니키를 떠나 그리스 북부 나우싸(Naoussa)로 향했다. 흰 눈이 덮인 신들의 산 올림푸스(Mount Olympus)가 양 날개를 길게 늘인 채 서있다. 그리스의 산들은 연둣 빛 풀이 자라는 산, 짙은 초록빛 나무가 무성한 산, 회색이 감도는 올리브 빛 민둥산 등 각기 다양하면서도 산세가 험준하다. 민둥산이 있는 건 땅 아래에 대리석이 있어 풀이 못 자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우싸에서 가장 오래된 끼르야니(Kir-Yianni) 포도원에 도착했다. 봄 햇살을 받으며 싹을 틔운 포도나무들 사이로 울긋불긋 꽃이 핀 사과, 아몬드, 체리 나무가 포도원을 보듬고 있다.

끼르야니는 그리스 북부 대표 레드 품종인 시노마브로를 가장 잘 아는 와인생산자다. 시노마브로(Xinomavro)는 그리스어로 ‘시고 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우싸의 대표 와이너리 끼르야니와 부타리(Boutaris)는 1970~1980년대 15인의 포도재배자와 와인 양조전문가를 모아 시노마브로에 가장 적합한 재배 및 양조방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 노력의 결과인 나우싸의 시노마브로는 그리스 최고 품질의 레드 와인이 되었고, 해외 시장에서 특히 호평 받고 있다. 당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현재 자신의 와이너리인 아르가티아(Argatia)를 운영 중인 여성 와인메이커 하룰라 스핀씨로풀루 박사는 “시노마브로의 매력은 세상 어떤 품종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강력한 개성”이라며 “와인은 선드라이드 토마토, 올리브오일과 같은 풍미를 내죠. 이런 향을 내는 와인은 다른 곳엔 없다”고 자랑했다. 수십 년에 이르는 장기 숙성 잠재력이 있다는 것도 강조했다. 끼르야니 기아나코호리(Gianakochori) 2000년산을 시음했다. 시노마브로에 메를로(Merlot)가 섞인 와인은 무려 17년이나 숙성됐다. 와인은 두드러진 미네랄, 강렬한 흙 내음, 감초, 말린 쑥과 대추 향이 가득하며, 선드라이드 토마토 향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나우싸에서 베르미오 산(Mount Vermio)을 넘어 아민데오(Amyndeo)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 중 끼르야니 와이너리의 사마로페트라(Samaropetra) 포도원은 산꼭대기에 있고, 사방으로 멀리 떨어진 산들이 담을 치듯 서있다. 포도원과 산들 사이엔 평원과 넓은 호수가 여기저기 보인다. 일교차가 심하고 추워서 화이트 품종을 주로 키우는데, 이렇게 척박하고 바람 부는 데서 포도가 자라야 자연스레 생산량이 줄면서 더욱 고품질 와인이 된단다. 끼르야니 파랑가(Kir-Yiannis Paranga) 스파클링 와인을 시음했다. 시노마브로와 샤르도네가 섞인 스파클링 와인은 입 안에서 기포가 톡톡 터질 때마다 살구와 복숭아 풍미가 상큼하게 전해진다. 아민데오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알파 이스테이트(Alpha Estate)의 바르바야니(Barbayiannis) 포도원에는 모래 땅에서 손가락을 모아 위로 편 듯 독특한 모양으로 자라는 93년 이상 된 시노마브로 나무가 있다. 모래땅을 밟자 마치 모카 빵 껍질을 손가락으로 누른 듯 발자국이 찍혔다. 와인산지를 많이 다녀도 이런 고목을 실제로 만나기는 어렵기에 경외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93년된 고목의 열매로 빚어낸 올드 바인 리저브


▎손가락을 모아 위로 편 듯 독특한 모양으로 자라는 93년 이상 된 시노마브로 나무.
알파 이스테이트 에코시스템 시노마브로 올드 바인 리저브(Alpha Estate Ecosystem Xinomavro Old Vine Reserve) 2013년산은 바로 이 고목의 열매로 만든 와인이다. 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린 덕에 잘 익은 자두 풍미에 선드라이드 토마토 향이 진하고 입에선 감칠맛이 가득하다.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을 것 같은 와인이다. 포도원을 돌아보고 베고리티다(Vegoritida) 호수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다. 레스토랑 벽면 가득 빨갛고 큰 고추를 가공한 파스타, 피클, 소스들이 진열되어 있다. 물어보니, 근처 플로리나(Florina)지역이 빨간 고추로 유명 하단다. 전채요리로 다진 양배추와 당근으로 속을 채운 고추 피클이 나왔는데, 식초에 설탕대신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포도즙으로 단맛을 주었다고 한다. 아삭아삭 씹히는 질감에 자연스런 단맛을 지녀 자꾸만 피클로 향하는 손길을 멈출 수 없었다.

차로 그리스 북동쪽을 향해 3시간 남짓 달려 드라마(Drama)에 도착했다. 청록빛 호수, 담배 창고를 개조한 그림 같은 호텔, 보랏빛 라일락이 흐드러진 꿈 같은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드라마는 공간 자체가 신비롭고 아름다워 금방 사랑에 빠진 듯 마음이 한없이 들뜬다. 마을 중심을 뒤로 하고 코스타 라자리디(Costa Lazaridi)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양조장 안으로 들어가니 심지어 바닥에 물이 빠지는 홈마저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다. 드라마는 세계적으로 대리석 산지로 유명하다. 이 와이너리 주인장이 대리석 사업으로 성공한 뒤 취미로 와이너리를 운영한다고 한다. 코스타 라자리디는 와인 외에 그리스 전통 증류주 치푸로(Tsipouro)와 발사믹 식초를 한정 생산한다. 치푸로는 와인을 양조하고 남은 포도찌꺼기를 증류한 술이다. 높은 알코올 도수에 비해 깔끔하고 부드러운 질감과 목넘김이 좋다. 코스타 라자리디는 그리스 예술가들과 협업해 올림픽 경기 등 특정한 주제로 그려진 아름다운 레이블을 전시한다. 코스타라자리디 아메티스토스 퓌메(Costa Lazaridi Amethystos Fume) 2016년산은 국제 품종인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감귤향이 아주 탁월하고 강한 신맛을 누그러뜨려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다음으로 방문한 파블리디(Pavlidi) 와이너리는 흰 돌을 쌓아 십자가를 새겨 놓은 민둥산 팔라크로(Falakro)산 기슭에 위치한다. 빨간 모자를 쓴 와인메이커 파나기오티스 키리아키디스의 안내로 양조장에 들어서니 단숨에 와인메이커의 성품이 읽힌다. 보통 양조장에 들어서면 어딘가 술 내음이 나기 마련인데, 이곳은 무취에 가깝다. 그간의 취재 경험으로 이런 사람이 와인에 들이는 공은 대부분 상상 이상이라 이 집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파블리디 와이너리는 포도의 섬세한 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온이 낮은 밤에 포도를 수확하고, 양조장으로 이동한 포도를 서늘하게 냉장 보관한다고 한다. 포도가 자신의 무게에 눌려 나온 즙으로만 와인을 만드니 당연히 생산량은 매우 적고 와인의 맛과 품질은 탁월해진다. 파블리디 테마 시라(Pavlidi Thema Syrah) 2013년산은 말린 자두와 차 잎, 후추 향을 낸다. 입에서는 역시 감칠맛이 풍부한 부드러운 레드 와인으로 완성도가 높다.

지하 셀러에 유화작품처럼 진열된 드라마 와인들


▎나우싸의 대표 와이너리 부타리의 역사와 함께한 와인들. 수십 년 이상 숙성됐다.
드라마의 드라마틱한 노을을 마주하며 달려간 곳은 와인 아트 이스테이트(Wine Art Estate). 와인메이커 아키스 파파도풀로스(Akis Papadopoulos)가 일행을 반긴다. 건축가인 그의 아버지와 토목가인 아버지 친구가 만나 취미로 와이너리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와인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1995년 설립된 와인 아트는 그동안 와인 품평회 수상 경력만 250회, 루프트한자 항공의 퍼스트클래스 와인에 2번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거대한 미로 같은 지하셀러엔 상장들을 모아놓은 공간이 따로 있을 정도다. 설립 초기 그리스 화가가 레이블 작업을 해줘 아름다운 유화작품처럼 진열된 와인들이 보인다. 일행과 저녁 식사를 하던 아키스는 깜짝 와인으로 와인 아트 이디시마 드리오스 아시르티코(Wine Art Estate Idisma Drios Assyrtiko) 2010년산을 열었다. 그리스 산토리니 섬의 대표 품종인 아시르티코는 그리스 북부에서도 잘 자란다고 한다. 이 품종의 와인은 산미와 미네랄 풍미가 워낙 강해서 출시 초기엔 일반애호가들이 쉽게 즐기기 어렵다. 이에 와인 아트 와이너리는 오크 통을 절묘하게 사용해 강한 산미를 둥글리고 복합성을 더했다. 그는 아시르티코가 5년 이상 숙성되면, 더 폭발적인 향과 맛을 낸다고 말한다. 7년 숙성된 와인은 꿀, 밀납, 배숙 향이 시원하게 나며 말할 수 없이 긴 여운을 보여준다. 그는 이어 와인 아트 네비올로(Wine Art Estate Nebbiolo) 2009년산을 내놓았다. 네비올로는 이탈리아 북서부 대표 레드 품종인데, 그리스 드라마에서 키운다니 신기했다. 의심 반 기대 반 와인 잔을 들어 향을 맡는다. 이럴 수가! 오직 1300병만 만들었다는 이 와인은 감초와 잘 익은 체리 향을 내며, 입안을 싹 감싸는 유연함을 보여준다. 모르고 마셨다면 이탈리아 네비올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토착 품종 말라구시아를 되살려낸 게로바실리우


▎와인메이커 파나기오티스 키리아키디스. 실험정신과 장인정신이 가득하다.
마지막 여정은 에파노미(Epanomi)에 자리한 게로바실리우 와이너리(Ktima Gerovassiliou)다. 멸종 위기의 그리스 토착 품종 말라구시아(Malagousia)를 구원해 이를 그리스를 비롯 해외 시장에서까지 최고의 화이트 와인 대열에 올려놓은 와이너리다. 이곳 와인 박물관엔 고대 와인 병, 와인 관련 기구들, 주인장의 방대한 코르크 스크류 콜렉션이 전시 되어있다. 소장품들은 테살로니키 대학 박물관학과의 도움으로 진열되어 체계적이며,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보는 즐거움이 크다.


▎와인메이커 에반겔로 게로바실리우. 말라구시아 토착품종을 되살렸다.
푸른 유리로 만든 초승달 모형의 조형물이 서있는 포도원 모습은 웅장하고 멋스럽다. 와이너리 주인장이자 와인메이커인 에반겔로 게로바실리우(Evangelos Gerovassiliou)와 일행이 와인 시음을 시작할 즈음, 아들이 들어와 인사를 건네며 아버지를 돕는다. 아들은 프랑스 보르도에서 양조학 공부를 하고 돌아와 이제 막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인자한 눈으로, 아들은 존경의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는데 말하지 않아도 깊은 사랑이 느껴진다. 게로바실리우 말라구시아(Gerovassilou Malagousia) 2016년산은 아주 잘 익은 흰 복숭아, 시트러스, 꽃 풍미를 지니며, 산미가 높아 아주 상큼하다. 와이너리에서만 맛볼 수 있는 뮤제오 5(Museo 5) 2015년산은 비오니에, 샤르도네, 소비뇽 블랑, 아시르티코, 말라구시아 5종을 섞은 와인이다. 잘 익은 복숭아 향이 가득하며, 마치 풍선 껌을 씹는 듯 화사하고 향기롭다.

나우싸, 아민데오, 드라마, 에파노미는 분명 그리스 북부라는 한 구역에 있지만, 풍경도 기후도 당연히 생산되는 와인의 종류와 스타일도 너무나 달랐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처럼 온몸을 촉수로 만들어 와인뿐만 아니라 날씨의 맛, 와인을 만드는 사람, 땅과 하늘, 포도나무가 주는 느낌을 받아들인 시간이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그리스 와인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 와인을 한두 번 접해본 와인 애호가라면, 그리스 와인이 갖는 개성만점 매력과 무한한 잠재력, 그리고 그리스 와인의 가치와 성장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국내에서도 더욱 많은 그리스 와인들을 접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그리스 와인을 위하여 그리스식 건배를 건넨다. 야마스(Yamas)!

- 정수지 와인21닷컴 기자·사진 Studio Adapter 윤동길

201705호 (2017.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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