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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의 와인 이야기(13)] 와인의 품질을 크게 향상시킨 AOC 제도 

 

이석우 와인 칼럼니스트 sirgoo.lee@joongang.co.kr
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와인의 생산과 판매에 관련된 법규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원산지 표시 규정 등 법규를 들먹이는 순간, 요술처럼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버린다.

▎원산지 명칭 통제 제도인 프랑스 AOC에 따른 와인 라벨 읽는 방법.
와인이 유리병에 담겨서 팔리기 전에는 암포라나 나무 배럴 같은 대형 용기에 담겨서 유통되었다. 와인을 담은 대형 용기는 유통상인들의 손을 거쳐, 유럽 각지의 레스토랑이나 주점 등 소매상에게 배송되었다. 소매상은 손님들에게 이 와인을 잔이나 작은 용기에 옮겨 담아 팔면서 돈을 받았다. 이 때 유럽의 소매상들은 오늘 현재 대한민국에서 영업하고 있는 횟집 가게 주인들과 같은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중국산 양식 광어를 국내 자연산 도다리라고 팔면, 열갑절 돈을 더 받을 수 있을텐데….” 대단한 미식가가 아니라면, 접시에 담긴 생선회가 중국산 양식 광어인지 국내 자연산 도다리인지 알 길이 없다. 20세기 이전에 유럽의 주점에서 와인과 마주 앉은 소비자 역시 마찬가지 처지였다.

AOC 제도는 프랑스 와인에서 시작


▎1. 이탈리아 산 귀도(San Guido)에서 생산한 2011년산 사시까이아(Sassicaia). 프랑스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로 사용했고, 약간의 카베르네 프랑을 섞는다. / 2. 이탈리아 안티노리(Antinori)에서 생산한 1995년 산 티냐넬로(Tignanello). 이탈리아 토착품종인 산지오베제(Sangiovese)를 주로 사용하고, 프랑스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과 카베르네 프랑이 약간 섞인다.
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 덕분에 유리병이 대량생산되면서, 와인이 “샤토 오브리옹”이라고 적힌 레이블을 단 유리병에 담겨 나오게 되었지만, 뭔가 여전히 찜찜했다. 주점 주인과 같은 소매상들이 손님들을 속일 여지는 줄어들었지만, 와인을 병입하는 일을 맡게 된 도매상들이 정직하게 와인 원산지를 표시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메뉴나 레이블에 표시된 와인의 원산지를 속이는 비양심적인 상행위 때문에 사람들은 고급 와인을 불신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와인의 품질이 향상되기 어려운 상업적 환경이 지속되었다.

“병 레이블에 표시된 생산지 정보가 정확해야 한다.” 와인 관련 법규가 바로 잡고자 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필록세라가 포도밭을 황폐화시킨 직후 프랑스에서는, 남프랑스와 이탈리아, 혹은 북아프리카에서 생산된 싸구려 와인이 고급 와인으로 둔갑하여 팔리는 일이 빈번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1930년대 프랑스의 와인생산자들은 원산지 명칭 통제(Appellation d’Origine Controlee; AOC) 제도를 법제화하기에 이른다. 이 법에 따라 병 레이블에 “샤토네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라고 적혀 있으면, 프랑스 론(Rhone) 지역의 샤토네프 뒤 파프 마을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이 들어있어야 한다.

AOC 제도가 점차 발전하면서, 생산지 표시에 대한 규정들이 생산 방식에 대한 규제로까지 확산되었다. 유럽의 오랜 와인양조 전통에 따라, 특정 지역에서는 특정 품종으로만 와인을 만들어 왔다. 그 지역에서 혹시라도 다른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게 되면 역사와 전통, 그리고 떼루아(terroir)에 반하는 행위로 여겨져서 금기시 되었다. 이런 전통에 따라, AOC 규정에는 지역마다 허용되는 포도품종이 명시되어 있다. AOC 와인들의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포도나무의 재배 방식이나 면적당 최대 수확량도 정해져 있다.

AOC 제도 덕분에 프랑스 와인의 품질이 크게 향상되었고, 소비자들은 프랑스 와인에 표시된 레이블을 믿고 마시게 되면서 매출도 늘어났다. 프랑스 AOC 제도의 성공으로 인하여 이 제도는 와인뿐만 아니라 치즈, 버터, 육류 등 다른 식료품으로 확산되었으며, 이탈리아, 스페인 등 다른 유럽국가에서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이외의 와인 생산국에서도 유사한 제도가 도입되었다. 소위 ‘신세계’ 와인생산국이라 일컫는 미국,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는 생산지역과 와인 품종 간의 상관관계나 전통이 유럽에 비해 취약했기 때문에, 와인 레이블에 지역 대신 품종을 표시하게 되었고, 지역을 표시하는 경우에도 사용된 품종이나 재배 방식에 대한 규제가 존재하지만, 유럽에 비해서는 완화되어 있는 편이다.

와인의 품질과 소비자 신뢰를 동시에 향상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던 AOC 제도는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오히려 와인산업의 발전을 옭아매는 낡은 규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포도 재배와 양조 기술의 발전에 따라 신세계 와인생산국들을 중심으로 다양하고 과감한 실험들이 시작되었다. 이는 특히 미국이라는 커다란 시장이 와인에 눈을 뜨면서 와인소비가 급격히 늘어난 원인도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와인생산자들은 어느새 시대에 뒤떨어진 AOC 제도의 각종 규제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사용할 수 있는 품종이나 재배 방식이 워낙 엄격했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었다.

AOC 제도 밖의 고품질 와인도 많아

보다 자유롭게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 AOC 제도로부터 ‘탈옥’해서, 제도권 밖에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AOC 제도에서 허용되지 않은 품종의 와인을 사용하거나 인정되지 않은 재배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면, 와인의 등급이 ‘강등’된다. 즉, 특정 지역을 표시하지 못하게 되어 ‘테이블 와인’과 같은 일반적인 표기를 하거나, 보다 넓은 와인생산지역을 레이블에 명시해야 한다. 레이블을 보면 낮은 등급의 와인이지만, 가격이나 품질은 매우 높은 와인들이 출현하게 된 배경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이탈리아의 ‘슈퍼 토스칸’(Super Tuscan) 와인들이다. 이탈리아의 와인 원산지 명칭 통제(Denominazione di Origine Controllata; DOC)에 따르면, 토스카나 지역을 레이블에 명시한 와인들은 산지오베제 등 이탈리아 토착 품종들을 사용하여 와인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슈퍼 토스칸 와인들은 프랑스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등을 사용하여 양조된다. 1968년 첫 상용 빈티지가 생산된 산 귀도(Tenuta San Guido)의 사시까야(Sassicaia)가 슈퍼토스칸 와인의 효시로서, 이탈리아 토착 품종 없이 카베르네 소비뇽 등 프랑스 보르도 품종만으로 만들어졌다. 출시 당시에는 DOC 등급을 받지 못하고 그보다 낮은 등급으로 선보였지만, 높은 품질 덕분에 최고 등급 와인보다 몇 배 비싼 가격에 팔리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와인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규제가 어느덧 와인의 품질 향상을 방해하는 족쇄가 되어버렸지만, 최고의 와인을 생산하겠다는 의지를 꺾지는 못했으니, 와인 애호가로서는 얼마나 다행인가.

이석우 - 카카오 공동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 편집국 디지털총괄 겸 조인스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번역서 『와인력』을 출간한 와인 마니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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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호 (2017.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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