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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16)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도전하는 CEO라면 콜럼버스처럼 떠나라 

김환영 중앙일보 심의실장 kim.whanyung@joongang.co.kr
오늘의 세계를 만든 인물들은 거의 누구나 사후 평가 측면에서 부침을 겪었다. 잊혀졌다가 다시 재조명을 받으며 각광받는다. 그 정도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만큼 심한 인물은 없다. 미국 독립혁명기에 콜럼버스는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 됐다. 하지만 20세기, 21세기에 그는 불세출의 영웅에서 살인마로 전락했다.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그린 콜럼버스 초상화(1519). 세계를 만든 인물들 가운데 콜럼버스만큼 부침이 심한 인물은 없다. / 사진 : 김환영
미국 혹은 미주 대륙 전체를 지칭하는 말은, 이탈리아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의 이름에서 따온 ‘아메리카(America)’다.(중남미 사람들도 엄연히 아메리카노스(Americanos), 아메리카인이다.) 하지만 역시 이탈리아 탐험가로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에서 유래한 ‘컬럼비아(Columbia)’ 또한 미국·미주를 지칭하는 역사적 표현이다. 덜 쓰이는 아메리카의 동의어다. 특히 시적인 표현으로 사용된다. 비록 컬럼비아가 미국 국명이 되지는 못했지만 대신 수도 이름으로 채택됐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DC는 ‘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의 약자다. 오하이오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도도 컬럼버스다. 아이비리그 명문 컬럼비아대학도 그의 이름을 담고 있다.

불세출의 영웅에서 살인마로 전락하기도


▎콜럼버스는 자기홍보에 능했다. 서쪽으로 가는 항해를 장밋빛으로 잘 포장한 덕분에 그의 두 번째 항해에서는 17척의 배와 1200명의 인력을 확보했다. 작품은 에마누엘 로이체가 그린 여왕을 만나는 콜럼버스(1843). / 사진 : 김환영
오늘의 세계를 만든 인물들은 거의 누구나 사후 평가 측면에서 부침을 겪었다. 잊혀졌다가 다시 재조명을 받으며 각광받는다. 그 정도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만큼 심한 인물은 없다. 사후 16세기 초반까지는 거의 무시됐다. 16세기 중반에는 역경을 이겨낸 비전으로 역사를 바꾼 인물로 부활했다. 18세기에는 영국과 거리를 두려는 미국인들이 콜럼버스를 미국 정체성 근거의 한 요소로 삼았다. 미국 독립혁명기에 콜럼버스는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 됐다. 19세기 말 가톨릭 신자들인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에게 콜럼버스는 영감과 롤모델의 원천이었다.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는 컬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400주년을 맞아 <신세계>(1893)를 작곡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프랑스 사람들이 그를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그가 성인이 되는 데 필요한 기적이 없었다. 또한 그에게 아들 페르디난드를 낳아준 정부(情婦) 베아트리스 엔리케스 데 아라나와의 관계도 문제시됐다.

20세기, 21세기에 그는 불세출의 영웅에서 살인마로 전락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인도(人道)에 반(反)한 죄(crime against humanity)를 지었다. 대략 1970년 대에 콜럼버스에 대한 공세가 본격화됐다. 문화다원주의의 부상이 한 몫 했다. 매년 10월 두 번째 월요일인 ‘콜럼버스의 날(Columbus Day)’은 미국의 연방 공휴일이다. 공휴일 폐지 운동도 있다. ‘콜럼버스의 날’은 인디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짓이라는 것이다. 콜럼버스 깎아내리기에 또다른 충분한 근거는 그가 미주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1만4000년 전부터 북미의 인디언과 중남미의 인디오가 이미 미주 대륙을 발견해 살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진출한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남미에 도달했다. 뒤를 이어 1000년께 레이프 에이릭손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에이릭손은 오늘날의 미네소타까지 도달했다. 한편 한 인디언 여성이 아이슬란드로 이주해 정착하기도 했다. 에이릭손은 콜럼버스를 아메리카를 ‘재발견’한 사람으로 떨어뜨렸다. 마르코 폴로가 13세기 중엽에 알라스카 땅을 밟았다는 설도 있다. 어쩌면 1405~1435년 세계의 대양을 누빈 중국의 정화(鄭和, 1371~1434) 원정대도 콜럼버스의 선배다. 정화가 1421년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주장이 있다. 어쨌든 요즘은 ‘조우(遭遇, encounter)’라는 중립적인 표현이 ‘발견’을 대체했다.

역사적 위인들은 신화에 휩싸여 있다. 콜럼버스도 마찬가지다. ‘콜럼버스의 달걀’은 압축적으로 콜럼버스의 업적을 상징하지만, 꾸며낸 이야기다. 그의 항해 자금을 대기 위해 이사벨 1세 여왕(1451~1504) 자신의 보석을 팔았다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콜럼버스가 지구가 편평하다는 당시 사람들의 믿음을 거슬러 동인도에 가려고 했다,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는 가톨릭 신학자들이 콜럼버스의 계획에 반대했다는 말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실제 항해를 해야 하는 선원들이나 당시 교육받은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리콘밸리를 연상시키는 콜럼버스 스토리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콜럼버스의 귀환(1839). 1492~1503년 4차례의 항해를 통해 콜럼버스는 쿠바·아이티·마야 문명을 발견했다. / 사진 : 김환영
콜럼버스는 미스터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어떻게 스페인 카스티야 왕실을 설득해냈는지 불확실하다. 생전에 그린 초상화가 없기에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가 묻힌 장소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그의 일기와 서신이 거의 다 사라졌기에 그의 인생을 재구성하기 힘들다. 콜럼버스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숨겼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상 중 일부가 유대계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가 ‘동인도’를 향해 떠난 1492년 8월2일은 스페인의 유대인들이 개종과 처형 중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데드라인이었다.

콜럼버스의 성공 덕분에 1492년은 한때 세계의 3분의 1을 지배한 스페인의 제국 건설이 시작된 해가 됐다. 동시에 콜럼버스는 세계화의 선구자다. 토머스 프리드먼처럼 그가 대서양을 건너 미주 대륙을 발견한 1492년을 세계화의 기점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콜럼버스의 삶을 조명하면 유럽이 세계의 나머지를 앞서게 된 이유가 일정부분 파악된다. 그에게는 아이디어가 있었고 그 아이디어의 가치를 인정받아 ‘펀딩’을 받을 수 있었다. 카스티야의 군주들은 엄청난 고위험 고수익 프로젝트에서 가능성을 본 것이다. 콜럼버스의 성공 스토리는 실리콘밸리를 연상시킨다. 콜럼버스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그 시대의 벤처 기업가였다. 벤처 기업가는 CEO로서 거짓말은 안되지만 적절한 과장은 구사해야 할 때가 있다. 콜럼버스는 자기홍보에 능했다. 서쪽으로 가는 항해를 장밋빛으로 잘 포장한 덕분에 그의 두 번째 항해에서는 17척의 배와 1200명의 인력을 확보했다.

키가 183cm였던 그는 학구적인 인물이었다. 지리서·역사서 등 방대한 독서를 했다. 특히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쓴 『동방견문록』을 콜럼버스는 책의 여백에 메모를 해가며 꼼꼼하게 읽었다. 그가 남긴 글을 분석해보면 문체와 단어 선정, 글씨체로 보아 콜럼버스는 어려서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독서를 통해 내린 결론과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아니었다. 보고 싶은 것만 봤다. 그가 발견한 것은 동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을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콜럼버스가 자신이 발견한 땅의 ‘실체’를 3번째 항해부터는 알았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뱃사람의 길에 들어선 그는 지중해·서아프리카, 그리고 아마도 아일랜드까지 가봤다. 1478~1484년께 서쪽 해상루트로 동인도로 가겠다는 구상을 갖게 됐다. ‘동인도(東印度)’ 즉 “인도·인도차이나·말레이제도를 포함하는 지역”은 황금과 향신료가 기다리고 있는 땅이었다. 그는 특히 독서를 통해 유럽에서 중국으로 가려면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치는 것보다 대서양으로 가는 게 더 빠르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1477~1485년 리스본에 체류한 그는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영국·이탈리아 왕실을 설득하는 작업에 나섰다. 1483년 계획안을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에게 제출했다. 거절당했다. 포르투갈은 희망봉을 거쳐가는 동쪽 루트에 집중했다. 그의 구상을 수용한 것은 스페인의 카스티야 왕국이었다.

우여곡절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책결정자들은 ‘위원회’를 꾸린다. 위원회의 전문가들 또한 서쪽으로 가면 동인도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다만 서쪽 뱃길이 더 빠르다는 콜럼버스의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콜럼버스는 아시아까지 3900km만 가면 된다고 계산했다. 실제 거리는 2만 km다. 이사벨 1세가 고해신부의 조언을 듣고 불가 결정을 내렸으나 남편 페르난도 2세가 찬성 쪽으로 돌아섰다. 이 공동군주들은 콜럼버스와 1492년 4월 항해를 허용한다는 산타페 협약을 체결했다. 콜럼버스는 성공할 경우 ‘대양 제독’이라는 호칭, 그가 발견해 스페인에 편입시킬 땅의 부왕·총독 자리와 수익의 10%를 보장 받았다. 1492년 세 척의 배(니냐·핀타·산타마리아)로 그는 항해 5주 만에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 섬에 도달했다. 1492~1503년 4차례의 항해를 통해 그는 쿠바·아이티·마먀 문명을 발견했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영웅은 ‘영웅적인 일을 달성한 보통사람’이다. 보통사람은 약점이 많다. 콜럼버스는 위대한 탐험가·항해가였다. 밤하늘만 슬쩍 보고도 뱃길이나 날씨를 예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반대로 항해가로서도 그가 무능했다는 주장도 있다.) 행정가로서는 의문이 남는다. 원주민들뿐만 아니라 그의 부하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무자비한 폭정에 대한 소식이 1499년 국왕의 귀에까지 전달됐다. 특히 그가 인디오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세례를 금하고 있다는 보고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1500년에 결국 해임된다. 그는 옹졸했고 남의 공을 가로채기도 했다. 육지를 처음 본 사람이 종신연금을 받게 돼 있었는데 1492년 10월 12일 아침 2시에 “육지다!”라고 처음 외친 것은 망보고 있던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라는 선원이었다. 연금을 가로챈 컬럼버스는 훗날 자신이 몇 시간 전에 육지의 불빛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탐험가·항해가였던 콜럼버스의 도전


▎콜럼버스는 어려서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쓴 『동방견문록』(사진)을 책의 여백에 메모를 해가며 꼼꼼하게 읽었다. / 사진 : 김환영
콜럼버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제, 징기스칸, 히틀러, 나폴레옹과 더불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살인마 반열에 올라 있지만, 동시에 여러 고장에서 서로 차지하려는 인물이기도 하다. 출신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이탈리아반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다는 게 정설이지만 반론도 있다.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아르메니아 등이 그의 출신 지역으로 제시된다. 제노바 출신의 콜럼버스와 미주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다른 인물이라는 설도 제기됐다. 콜럼버스의 조상이 스코틀랜드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사실 콜럼버스의 머리칼은 금발 혹은 붉은 색이었고 30세 나이에 백발이 됐다.

콜럼버스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는 복잡 미묘한 문제다. 지금 남아있는 그의 글에는 예수·마리아·성인들과 성경구절 인용으로 가득 찼다. 황금과 노예를 찾아 나선 콜럼버스였지만 신(神)이 자신에게 소명을 부여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스도교 전파는 그에게 중요한 항해 목적이었다. 그가 황금 찾기에 혈안이 됐던 이유는 이스라엘에서 무슬림들을 몰아내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예수의 재림 전에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의 성지로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중세 신학자들의 문헌을 바탕으로 예수의 재림이 155년 남았다고 믿었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작용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1492년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 스페인은 종교적인 열정으로 불탔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자행했다. 어쩌면 그가 초래한 ‘환경학살(ecocide)’는 한가한 이야기다. 그는 인디오들을 학살했다. 노예로 팔았다. 어린 여자 아이들을 성노예로 팔았다. 집단 자살하는 인디오들도 있었다. 가톨릭 교리상 신자를 노예로 삼을 수 없었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세례를 금지했다. 도망가는 노예들은 산 채로 불에 태웠다. 그가 통치한 히스파니올라는 그가 도착하기 전 인구가 300만이었으나 도착 후 20년 만에 인구가 6만으로 줄었다. 50년 후에는 수백 명 남았다. 물론 학살 보다는 병균이 큰 원인이기는 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신앙과 행위 사이의 모순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못했을 수도 있었다.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는 광란의 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야만을 무기삼아 그들의 문명을 전파했다. 가톨릭 교회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시작한 만행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당시 일부 유럽인들은 인디언·인디오가 아예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람이 아니라면 세례를 줄 필요도 없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노예로 삼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바오로 3세 교황(재위 1534~1549)은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내용이 담긴 교황 칙서 《하느님의 초월성(Sublimus Dei)》을 1537년 공포했다. 인디오들을 노예로 만들려는 유럽 군주들의 정책을 단죄한 것이다. 중남미에서 가톨릭 교회는 압제자들의 편에 서기도 하고 고통 받는 인디오들을 대변한 유일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성공 거두고 이름 남겼지만 개인적으론 불행해

교회는 항상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었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가톨릭 교회를 탄압했다. 교회가 진보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일부 가톨릭 신학자들은 ‘해방신학’을 전개시키며 피압박인 편에 섰다. 해방신학에 상대적으로 부정적이었던 전임 두 교황에 비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방신학을 수용하려는 제스처를 보이고 있다. 신화와 다르게 콜럼버스가 가난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기 연민과 회한에 빠진 채로 54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했을 때 이를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최고경영자(CEO)들은 냉정하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 소위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도전은 미지의 세계로 향해 떠나는 것이다. 인공지능(AI)이나 생명공학의 발전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없다. 전혀 보장할 수 없는 길이다. 일단 가는 것이다. 원래 목표인 아시아가 아니라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일도 많을 것이다. 콜럼버스는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는 불행했다. 사생활도 없이 자신의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앞으로 수십년 간 여러 혁명이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1550~1800년에 중남미는 전세계 은의 80%, 금의 70%를 생산했다. 눈앞에 이미 시작된 혁명에서도 금맥이 발견될 것이다. 콜럼버스라면 그 길을 갈까. 아마 갈 것 같다. 불교에서는 집착을 버리라고 하지만 그는 집착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불행하게 된 것일까.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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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호 (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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