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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버크 루이비통 회장 

세계에서 가장 균형 잡힌 럭셔리 

이도은 기자 lee.doeun@joongang.co.kr·사진 김경록 기자
프랑스 럭셔리 패션 브랜드 루이비통은 세계 브랜드 가치 20위를 자랑한다. 브랜드의 대표 유산 1000여 점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회 참석을 위해 서울을 찾은 마이클 버크 루이비통 회장을 만났다.

▎마이클 버크 루이비통 회장. 그는 “루이비통의 가치는 제품의 아름다움·서비스· 팀워크·비전 등을 아우른다”며 “경영이라는 게 단순히 상업적인 접근만이 아닌 일종의 여정”이라고 말했다.
루이비통은 헤리티지(유산)를 중시하는 동시에 ‘혁신’을 최고 가치로 삼는다. 브랜드의 출발부터가 그러하다. 1854년 자신의 이름을 딴 매장을 낸 루이 비통(1821~1892)은 위가 둥글어 여러 개를 쌓기 힘든 여행용 트렁크를 바닥이 평평한 사각 형태로 바꾼다. 공간이 좁은 철도 여행이 앞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에서였다. 이후로도 브랜드의 행보는 비슷하게 이어진다. 1890년대 자동차, 1900년대 항공 등 새로운 교통수단이 나타날 때마다 끊임없이 변모하는 트렁크를 선보인 것이다. 세계 브랜드 가치 20위(자산가치 32조4000억원)에 오른 핵심이 여기에 있다.

대표 유산 1000여 점을 한 자리에

6월8일부터 8월27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전시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 루이비통’은 이를 한 눈에 확인시켜주는 자리다. 트렁크의 변천뿐 아니라 당대 탐험가·예술가·사회명사 등을 위한 맞춤 트렁크, 현존하는 가장 비싼 작가 데미언 허스트, 일본을 대표하는 쿠사마 야요이, 논란을 몰고 다니는 사진 작가 신디 셔먼 등 아티스트와 협업한 액세서리 등 브랜드의 대표 유산 1000여 점을 한 자리에 모았다. 전시는 2016년 파리에서 시작된 세계 순회전으로, 도쿄를 거쳐 서울을 찾았다. 7일 오프닝 행사 참석차 방한한 마이클 버크(60) 루이비통 회장은 인터뷰에 앞서 직접 전시를 설명하며 ‘혁신적 브랜드’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1986년 LVMH에 입사한 이래 펜디·불가리 CEO를 거쳐 2012년 루이비통 경영 수장이 됐다.

전시를 마련하게 된 계기는.

2년 전에도 ‘시리즈’라는 전시를 했다. 2013년 디자이너를 마크 제이콥스에서 니콜라 제스키에르로 교체하면서 새 인물의 비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 역시 대부분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엔 반대다. 루이비통의 유산과 역사, 기원 등을 보여주는 동시에 내일을 조명하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육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런웨이에서 보여주는 신제품이 과거와 이어져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전시의 주인공인 옛날 트렁크가 현재에 시사하는 바는 뭔가.

혁신이란 가장 먼저 하는 것, 정확하게는 모방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이다. 또 무엇보다 실패를 두려워 말아야 한다. 아까 전시장에서 본 그 파란 트렁크를 기억하나? 1916년에 만든 건데 검정·갈색밖에 없던 트렁크에 파란색을 입혔다. 비밀이지만 당시 이를 사는 사람이 없어 소량만 만들다 끝났다. 상업적으로는 대실패였다. 하지만 루이비통이 초창기부터 혁신적 마인드를 지녔다는 걸 보여주는 중요한 제품이다. 파란색은 이미 존재하는 컬러였지만 이것을 트렁크에 입힌 건 루이비통뿐이었으니까. 최근 루이비통이 미국 현대작가 제프 쿤스와 협업한 마스터 컬렉션(핸드백에 루벤스·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명화를 찍어낸 가방)도 비슷하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혁신은 이를 감수해야 한다. 챔피언이란 그 자리에 가기까지 몇 번은 좌절하지 않나. 이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게 수장으로서의 내 임무다.

혁신의 요체는 창의성과 대담함


▎8월27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전시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루이비통’ 전시회.
제프 쿤스 이전에도 루이비통의 협업은 모험처럼 보인다.

루이비통은 초기부터 외부에 열려 있었다. 1920년대 이미 예술가들이 만든 향수병이 나왔다. 이는 쿠튀르 하우스(고급 맞춤)가 아닌 럭셔리 하우스이기 때문이다. 꼭 인 하우스 디자이너의 스케치만이 아니라, 고객 하나하나가 디자이너가 돼 맞춤 트렁크를 만들었다. 협업에서도 혁신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창의성과 대담함이다. 너무 쉽게, 복사해 붙이는(Ctrl+C, Ctrl+V) 식은 안 된다.

카피와 관련한 이야긴가.

구찌 2018 크루즈 컬렉션 일부가 1980~90년대 할렘 출신 디자이너 대퍼 댄(Dapper Dan)을 모방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실제로 구찌 옷을 보면, 루이비통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댄이 루이비통의 과거 LV 로고로 작업한 옷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물론 댄과는 아무 논의도 없이 구찌가 벌인 옳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도 구찌 디자이너가 빈티지를 보고 그것이 왜 1980년대와 연관이 있는지, 왜 대퍼 댄이 루이비통 모조품을 만들었는지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우리의 협업은 이런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제프 쿤스와의 협업은 2년이 걸렸다. 명화가 있는 박물관에 일일이 협조를 구하고, 각 작품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보여주겠다는 프로젝트의 의미를 설명했다. 얼마 전 손잡았던 스트리트 캐주얼 브랜드 ‘슈프림’도 마찬가지다. 트렁크 하나를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들이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2년간 소통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서 ‘올바른 방식’이 아니면 되겠나.

‘디지털 세상’의 핵심이 뭘까.

대중이 모든 걸 알고 있다. 특히 주 소비층이 된 밀레니얼 세대는 진실성(authenticity)을 중시한다. 가르치려 들고 해석해 주기보다 직접 전달되는 정보를 선호한다. 내가 아무리 루이비통에 대해 이야기한들, 친구들끼리 이 브랜드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한국의 카카오톡 같은 플랫폼이 중요한 이유다.

럭셔리 브랜드로서는 도전 아닌가.

디지털로의 전환은 30년 넘게 럭셔리 업계에 근무하면서 가장 큰 변화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디지털이 그렇게 혁신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30년 전에는 ‘도매(wholesale)’로 고객과 소통을 했고, 그 다음에는 소매(retail)가 추가됐다. 그리고 이제 디지털이 더해진 것뿐이다. 디지털이 생겼다고 기존의 도·소매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고객을 만나는 길이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고 할까. 오히려 중시해야할 건 디지털은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소통이 편해졌다 해도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럭셔리 브랜드는 사람들의 감각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령 아까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트렁크의)나무 냄새가 났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 온라인 판매에는 어떻게 대응하나.

루이비통은 1996년 이미 루이비통 닷컴(louisvuitton.com)을 만들면서 럭셔리 업계에서 가장 먼저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파란색 트렁크’처럼 좀 많이 이르긴 했다(웃음). 당시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정보를 찾고 싶어해서한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온라인 판매를 좋고 나쁘다로 접근하면 안된다. ‘고객이 원한다’가 중요하다. 온·오프는 경쟁이 아니라 공존이다. 실제 두 플랫폼을 모두 이용하는 고객의 구매액이 한 곳만 이용하는 고객보다 평균 3배 정도 많다. 하지만 온라인이 아무리 중요해도 고객과 대화가 절단되는 상황에까지는 가고 싶지 않다. 알리바바에는 제품을 론칭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인가.

제품의 아름다움·서비스·팀워크·비전 등을 아우른다. 흔해 보이는 이러한 가치가 브랜드를 계속 트렌디하게 만드는 힘이다. 경영이라는 게 단순히 상업적인 접근만이 아닌 일종의 여정이다.

“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

현 경영자로서 루이비통의 최고 혁신을 꼽는다면.

무조건 앞으로 할 다음의 것이다. 아, 어쩌면 아주 오래 전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과 일하기로 결정한 날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웃음)

두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1979년 프랑스 경영대학원 EDHEC를 졸업할 무렵 아르노가 운영하던 부동산 개발업체 페리넬(Ferinel)에 지원했다. 보통 MBA를 마치면 유니레버나 로레알 같은 글로벌 기업이나 금융권으로 가는 게 맞았지만 나는 다른 길을 택했다. 미래보다 사람에 끌렸다. 아르노와 그의 아버지 장(Jean), 그 외 매니저급 인사를 포함한 회사 운영진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현실성 없는 몽상가들이었지만 꿈꾸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부동산 회사의 경험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우리가 팔던 집이라는 게 결국 사람들이 구매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집이 나의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설명해주는지, 개발자는 얼마나 명성이 있는지를 보고 결정하는 일이다. 집 한 채가 곧 그들이 누구이고, 친구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지향하는가라는 사회적 지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럭셔리와 흡사하다. 또 아름다움과 디자인을 각각 건축으로, 패션으로 가져오고 고객의 요구를 맞춰야 한다는 점도 같다. 페리넬도 루이비통도 성공하게 된 이유는 확실히 안다. 창의와 혁신, 고객과의 관계라는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LVMH에서 여러 브랜드를 거쳐 왔다. 루이비통만의 강점은 뭔가.

나는 자식이 다섯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마치 그 중에 누가 가장 예쁘냐를 묻는 것 같다. (웃음) 루이비통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균형 잡힌 럭셔리다. 과거에서부터 현재·미래까지 모든 것을 동시에 하고 있다. 또 컬렉션과 전시, 남성복과 여성복, 예술가와 힙합 뮤지션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다. 고객 역시 세대별·지역별로 다양하게 고루 퍼져 있다. 마치 오케스트라나 다름 없다. 그리고 다양한 소리를 ‘음악’으로 바꿔주는 지휘자, 그것이 나의 역할이다.

- 이도은 기자 lee.doeun@joongang.co.kr·사진 김경록 기자

201707호 (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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