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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오밍, 농구스타의 귀향 

 

RON GLUCKMAN 포브스 기자
고국 중국을 등지고 떠나버릴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와는 달리, 전설의 농구선수 야오밍의 마음 한 켠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명성과 재산을 자선사업에 활용하겠다는 계획이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2009년에는 상하이 구석구석 눈길이 닿는 곳마다 야오밍을 볼 수 있었다. 고향 상하이 곳곳에 세워진 수백 개의 광고판에서 휴스턴 로케츠의 수퍼스타이자 중국 최고의 농구선수 야오밍이 등장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 광고는 농구게임을 홍보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이번에 야오밍에게 주어진 미션은 상어를 구하는 것이었다.

동물보호단체인 와일드에이드는 상어보호캠페인의 대변인으로 야오밍을 내세웠다. “샥스핀 요리에 ‘노’라고 말하세요!”라고 설득하는 야오밍의 말에 중국 대중은 귀를 열었다. 곧 샥스핀이 식당 메뉴에서 사라졌다. “60% 정도 감소했으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성적이지요.” 상어보호캠페인에 대한 야오밍 자신의 겸손한 평가이다.

몇 년 후, 야오밍은 또다른 성전에 나섰는데 이번에는 상아무역을 반대하는 캠페인이었다. 상아무역이 지하경제로 숨어들자, 야오밍은 거구의 몸을 직접 끌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다시 한 번 자신의 명성을 동물보호 캠페인에 활용했다. 다큐멘터리 촬영이 진행되었고, 아기 코끼리 한 마리와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키 7.6피트(231.6㎝)의 장신 농구선수 야오밍의 사진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야생동물보호단체들은 이 캠페인이 단기간에 코끼리 상아 채취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고취하는데, 그리고 중국정부로 하여금 상아시장에 더욱 강력한 규제를 가하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운동선수인 야오밍이 누리는 인기의 수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36세의 야오밍은 중국 내에서 마오쩌둥 주석보다 더욱 높은 유명세를 자랑한다. 수년간 올스타 자리를 놓치지 않은 야오밍은 부상을 입으면서 2011년 북미 NBA 리그의 활동을 접어야 했지만, 본국 중국에서는 스포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상하이로 돌아온 야오밍은 10대 시절 몸담았던 농구구단 샥스를 인수했다. 지난 2월에는 중국농구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야오재단 설립해 오지의 농구 꿈나무들 지원

야오밍은 야오재단을 통해 이들 아동이 농구선수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농구코트, 농구화 그리고 농구훈련도 제공하며 이들 아동에게 성인과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 중국 오지에서 활동하는 야오재단(연간예산은 대략 250만 달러 정도이다)은 13세 이하의 아동에게 농구 장비 및 훈련을 제공한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코치교육을 시킨 후 체육교육 프로그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학교에 파견한다. 남학생 및 여학생으로 구성된 농구팀은 지역 및 지자체 경기를 치루며, 주말 동안 진행되는 플레이오프경기, 올스타 이벤트 그리고 ‘자상한 거인’ 야오밍을 직접 만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자리로 행사가 마무리된다. “저희 모두 어젯밤 잠자리에 들 수 없었어요.” 작년 청두에서 만난 마징이 털어놓은 이야기이다. 쓰촨성 오지에 자리한 마을 판즈화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마징은 기차로 14시간을 여행해 학교의 농구팀을 끌고 행사에 참석했다. 학생들 대부분 대도시를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고 놀이공원에 놀러갈 계획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아이들은 온통 마음이 부풀어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야오밍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답니다!”

올스타전에는 중국농구협회 및 미국농구협회인 NBA 선수들 모두 출전한다. 작년에는 유타재즈의 조지 힐이, 2015년에는 골든스테이트워리어스의 포워드 포지션인 드레이몬드 그린이 출전했다. “야오밍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출전할 겁니다.” 조지 힐의 말이다.

도착하자마자 야오밍에게 모든 관심과 주목이 쏟아졌지만, 야오밍은 여느 수퍼스타와 달리 인내심 있고, 겸허하며 만면에 미소를 띄운 모습으로 시종 일관했다. 의자 하나를 가져와 자리에 앉은 야오밍은 그제서야 어느 정도는 일반인처럼 보이는 사이즈로 줄었지만,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치 올림픽 경기의 메달이 걸린 경기인 양 자신의 청소년팀을 열정적으로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특유의 유머를 선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아동이 사이드라인에서 3점슛을 시도하자, 야오밍은 마치 농구공을 막으려는 것처럼 거대한 팔을 뻗었고, 관중들로부터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경기가 끝나고 사진을 찍는 시간이 시작되었고 야오밍은 몇 시간 동안 포즈를 취했다. “사람들을 돕는 것은 올바른 일입니다.” 야오밍은 NBA의 지역사회 프로젝트를 통해 개인적으로 사회공헌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알게 되었다며 말했다. 야오밍은 지역주민들의 집에 음식, 게임 혹은 한 번은 매트리스를 기부하러 방문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움을 받은 어떤 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분의 눈을 통해, 그분의 반응을 통해 침대가 생겼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어떤 이들에게는 중요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같은 경험은 야오밍의 삶에서 사회공헌이 중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야오밍은 야오재단을 설립하고 장애인 올림픽 등의 사회공헌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제가 이같은 방식으로 사회공헌활동을 진행하는 이유는 직접 사람들을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선수범의 힘을 믿습니다. 눈을 마주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마음이 진심으로 맞닿는 것, 이것만이 실제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야오밍은 “그리고 나 자신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위대한 농구선수가 되는 것은 아마도 야오밍이 태어난 순간부터 주어진 운명이었던 듯하다. 야오밍의 부모는 모두 스타 농구선수였다. 아버지 야오즈위안은 신장 6.10피트(208㎝)로 최고의 센터 포지션선수였으며, 어머니 팡펑디의 신장는 6.2피트(188㎝)였다. 야오밍은 장차 뛰어난 농구선수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랐다. 야오밍이 10살 되었을 무렵, 신장은 5.5(167㎝)피트가 넘었고 체육영재학교로 전학했다. 그리고 2002년 휴스턴팀이 야오밍을 1순위로 드래프트하면서 야오밍은 드래프트 우선순위로 지명된 최초의 외국인선수가 되었다. 야오밍의 데뷔전을 둘러싸고 중국 농구팬들은 뜨거운 기대감을 드러냈고 미국의 평론가들은 회의론을 펼쳤다. 찰스 바클리는 야오밍이 첫 시즌 출전경기에서 19점 이상을 득점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야오밍이 8번째 게임에서 벌써 220점을 득점하면서 벌로 당나귀 엉덩이에 입맞춤하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NBA 최고의 선수 샤킬 오닐은 야오밍을 무시하며 잘난 체 했다. 그러나 야오밍은 동요하지 않고 겸손함과 유머로 대처했다. 샤킬 오닐이 뛰는 마이애미 히트와 치룬 첫번째 경기에서, 마이애미 히트는 8000개의 포춘쿠키를 나누어주었다. 사실 중국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포춘쿠키였기에 이는 잘못된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야오밍은 미국식 특별간식인 포춘쿠키를 맛있게 먹었다고 말하며 유머로 대처했다. 샤킬 오닐은 야오밍과 처음으로 만난 자리에서 짓궂게 굴었으나, 중국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야오밍은 올스타 투표에서 샤킬 오닐을 제쳤다.

상하이 샥스팀 인수, 중국농구협회장 맡아

야오밍은 NBA에서 활동하는 기간 게임당 평균득점 19.2점, 리바운드 9.2개의 기록을 남겼다. 야오밍이 거둔 성공은 고국 중국에서 농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고, 더 나아가 농구게임의 글로벌화를 촉진시켰다. 작년 야오밍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을 때, 샤킬 오닐이 야오밍이 명예의 전당 쟈켓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제서야 전당에 입성했다는 것 자체도 야오밍의 성품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이다. NBA 선수들이 명예의 전당 후보로 고려되기 위해서는 5년 동안 은퇴한 상태여야 한다. 사실 야오밍은 이전에 중국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2012년 이미 자격을 갖춘 상태였다. 하지만 그 당시 야오밍은 자신이 이처럼 영광스러운 대열에 합류하기에 아직은 시기가 너무 이르다며 고사했다.

야오밍은 처음부터 이런 스타일을 견지했다. “야오밍은 인내심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리버 타운(River Town)』을 비롯해 중국을 주제로 한 여러 권의 베스트 셀러를 낸 작가 피터 헤슬러의 말이다. <뉴요커>지의 중국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피터 헤슬러는 첫 시즌 내내 야오밍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 누가 그런 압박을 견뎌내면서도 그토록 품위있게 대처할 수 지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홍콩에서 오랫동안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팀 누난은 야오밍을 10대 시절부터 지켜보았다. “야오밍은 진짜배기입니다. 모든 장애물을, 그것도 매우 잘 극복해냈지요.” 팀 누난의 말이다. “저는 수많은 운동선수들은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선수도 야오밍만큼 민낯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토록 편안해 하는 선수는 없었습니다.”

야오밍은 미국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새로운 음식을 즐겼고, 비디오게임을 하고, 영어를 배웠으며 모든 것을 스폰지처럼 흡수했다. 야오밍은 고국 중국에서 뜻깊은 일을 하겠다는 목표를 절대 잊지 않았다.

중국으로 돌아온 야오밍은 2009년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던 상하이 샥스팀을 인수했으며 이후 팀의 운영을 개선했다. 야오밍은 선수 훈련 및 연봉 조건을 개선하고 팬층을 확대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은 야오밍이 회장직을 맡은 이후 중국농구협회가 빠른 시일 내 규모를 확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야오밍은 현재 중국농구협회가 재무상태가 열악하고 강력한 팬층이 부족했던 10년전의 NBA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시간이 걸릴 겁니다.” 야오밍의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현재 기회의 문이 열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단주들이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야오밍이 미국에서 활동하던 시절, 중국의 농구선수들은 형편없는 급여를 받으며 그렇다할 특전도 누리지 못했다. 체육관 시설은 노후하여 연기로 가득했으며, 선수들은 버스로 장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함께 방을 쓰거나 기숙사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피터 헤슬러는 보통 크기의 침대에 몸이 맞지 않았던 야오밍이 장신의 체구를 지탱하기 위해 침대 옆에 캐비닛을 붙이곤 했다고 기억한다. “야오밍은 결코 불평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야오밍은 소속팀과 모국을 위해 코트를 누비며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시즌이 끝날 때마다 중국으로 돌아가 국가팀 소속으로 경기에 출전했다. 이같은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와 대중은 야오밍의 일거수일투족에 의문을 제기하며 끈질기게 괴롭혔다. 야오밍은 17세 때 만난 최초이자 유일한 연애상대 그리고 마찬가지로 스타 농구선수였던 예리와 결혼했고, 부부가 딸인 야오친레이를 낳은 것은 중국 전역의 화제였다. 그러나 중국의 온라인 채팅 사이트에서는 딸을 미국 휴스턴에서 낳기로 한 부부의 결정에 대해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 야오밍이 중국을 등지고 더 큰 스타덤과 보상을 위해 미국으로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팽배해있었다.

하지만 야오밍은 NBA에서 활동하던 초창기부터 사회공헌가로서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야오밍에게 이같은 영감을 불러넣어준 이는 같은 로케츠팀에서 활동했던, 그리고 그 역시 장애물을 극복하고 성공을 이룩한 농구선수였던 디켐베 무톰보였다. 무톰보는 고국 콩고에서 병원을 짓고 장학금을 제공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무톰보는 제게 사회공헌이라는 아이디어의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사회공헌을 또 다른 차원에서 실행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야오밍의 말이다. “사회공헌도 결국 경영입니다. 경영을 통해 더욱 효율적으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습니다.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농구선수로 활약하면서 학업에 소홀했던 야오밍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부과정을 수료하는 중이다. 야오밍은 비즈니스 경영을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야오밍은 다양한 파트너십과 후원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스포츠매니지먼트사도 소유하고 있다. 야오밍이 중국농구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된 후, 많은 이들이 미국 NBA를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데 일조한 데이비드 스턴에 야오밍을 비견하고 있다. 야오밍이 “국영기업인 중국농구협회를 민영화해 아시아 최대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프로 농구리그로 만들 것이다”라는 것이 나이키 중국사업부의 마케팅임원을 지낸 바 있고 현재 상하이에 기반한 ‘주스포츠’의 공동소유주인 테리 로즈의 말이다.

중국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 리더로 부상

야오밍은 중국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품고 있다. 바로 대중이 농구를 좋아하게 만들고, 천천히 차세대 농구선수들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야오밍은 이 같은 노력을 펼쳐왔다. 2012년 야오밍은 47개 학교에서 유소년 농구리그를 창설했다. 작년에는 380개 학교에서 농구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희망학교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수천 명의 아동에게 농구를 소개했다. 야오밍이 말했다. “농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면서 저는 행복을 느낍니다. 스포츠는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야오밍의 행보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 생각한다. “야오밍은 ‘위대한 힘에는 위대한 책임이 따른다’라는 원칙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야오밍을 옆에서 지켜본 테리 로즈의 말이다. “향후 10~20년 동안, 아마도 야오밍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 리더로서의 위상을 한층 공고히 할 것입니다.”

- RON GLUCKMAN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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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호 (2017.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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