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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해설가’ 차경남 변호사와의 대화 

CEO의 마음 공부는 노장사상으로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차경남 변호사(60)는 ‘고전해설가’다. 벌써 8권이나 인문학 책을 낸 저술가로 특히 노장사상이 CEO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경기도 하남시에서 활동하면서 제주도·청주·서울 등지로 강연을 다니는 차 변호사를 6월30일 서울 중구 순화동 중앙일보 7층에서 인터뷰했다.

▎차경남 고전해설가는 변호사이자 저술가이고 명강사다. CEO들에게 영감을 주는 ‘재야의 고수’다.
차경남 고전해설가가 최근 『인문학으로 만나는 몸 공부』, 『인문학으로 만나는 마음공부』를 펴냈다. 차 변호사의 인생 역정으로 판단한다면, 그는 ‘기인’의 반열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연세대 정치외교 학과를 졸업한 그는 회사를 다니다가 적응을 못하고 33세 나이에 뛰쳐나왔다. 본인의 말을 인용한다면 “먹고살려고” 사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아내의 격려가 큰 도움이 됐다. 공부 시작 7년만인 마흔에 고시에 붙었다.

동서양의 철학을 연구해 책을 집필하고 강의·강연도 하지만 그는 변호사도 겸하고 있다. 인터뷰가 있었던 그날도 아침에 중앙법원 재판에 갔다고 했다. 『인문학으로 만나는 마음공부』는 그가 쓴 8번째 책이다. 첫 책은 2011년에 나왔다. 1년에 한 권 정도 쓰는 셈이다. 맨 처음 낸 책은 장자에 대한 책이었다. 장자 시리즈를 세 권을 냈다. 그 다음 노자 관련 세 권이 나왔다.

차 고전해설가의 독자들 또한 범상한 분들은 아니다. 어떤 분들은 “어떤 분인지 꼭 이야기 좀 하고 싶다”고 찾아와 사인을 받고 강의도 수강한다. 이 인터뷰 기사가 재미 있었다면 유튜브를 방문해 ‘차경남’을 쳐보시라. 현재 685개의 강의가 올라가 있다.

동시대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저술 활동

책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가 드니까 뭔가 좀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는 책이 안 써졌다. 그래서 용문산 밑에 갔더니 싼값에 별장을 쓰라는 분이 있어서 1년 계약을 했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 혼자 차를 몰고 가서 2박 3일이나 1박 2일 정도로 첫 책을 어렵게 쓰기 시작했다. 완성된 원고를 들고 우리나라 유수 출판사에 문의를 했지만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책 내준다는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서 제가 반성을 좀 했다. ‘내 의문과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좀 다를 수 있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 사상을 가장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매개가 뭘까’ 생각해보니 ‘우화’ 위주로 돼 있는 장자가 있었다. 장자 시리즈 3권 이후로 총 8권을 썼다.

책을 쓰는 과정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저도 어려서부터 철학의 숭고한 영역, 인간의 정신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뭔지 궁금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은 소통의 문제였던 것 같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 衆妙之門)’이라는 결론을 맺는다.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자아를 가두고 있는 벽을 늘 자꾸 깨뜨리는 공부를 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자꾸 밝아지려고 하고, 남보다 똑똑해 지려고 한다. 그런 길을 가지 말고 자기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가며 점점 더 높고 높게 되면, 결국에는 어떤 근원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게 노자·장자의 메시지로 파악된다. 사람마다 책 쓰는 목표가 다르겠지만 궁극은 동시대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인문학을 해도 크게는 서양파·동양파로 나눌 수 있다. 차 변호사는 서양과 동양의 융합하고 종합하는 입장인 것 같다.

제가 어렸을 때 공부해보니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 너무 달랐다. 그게 좀 이해가 안됐다. 동서양 사람들이 비록 언어는 달리 쓴다고 하더라도, 궁극의 도나 진리는 단일한 하나의 거대한 세계 안에서 소통이 돼야 할 텐데, 그게 막혀 있다는 게 어린 마음에도 답답했다. 물어볼 사람도 없다 보니 이런 저런 책 속에 파묻혀 나름 고생도 좀 했다. 서양철학을 나름대로 많이 공부했는데 노장을 통해서 서양철학의 결정적인 결함 같은 것을 이제 좀 알게 됐다. 큰 틀을 놓고 정리 해보니 동서양 철학도 실은 근원적으로 하나의 무언가를 추구했다. 서양에서는 그 경지에 이른 어떤 큰 혜안을 가진 큰 스승들이 없다 보니, 문자 위주의 형이상학적·관념적 공부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포장됐다. 우리는 노장사상으로 어떤 핵심의 심부에 들어가서 바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런 차이가 있다고 본다.

노장사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소통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노장에만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기독교 등 모든 종교가 결국에는 소통의 문제를 다룬다. 노장은 서양 철학이 논하지 못하는 소통의 문제를 지금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면이 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때부터 이미 인간 마음에 대한 이해가 노자·장자하고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 사회가 이성적인 담론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두다 보니, 인간의 초월적 의식에 대한 이해가 떨어졌다. 플라톤이 말했던 학문에는 인간 본질에 대한 학문이 빠졌다. 서양철학의 인간 마음 이해에 반론을 처음 제기했던 사람이 칸트라고 생각한다. 노장사상은 기원전 4세기에 인간의 본질을 논하면서 마음의 한계를 그때 이미 다 이야기했다. 인간의 마음은 플라톤의 생각과 달리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에는 근원적인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구조가 내재돼 있다. 저는 그렇게 보고 서양철학을 비판하면서 전체를 통으로 완성해 보려고 했다.

독단·독선·아집을 스스로 제거하라


▎차경남 저자가 펴낸 『인문학으로 만나는 몸 공부』, 『인문학으로 만나는 마음공부』·글라이더 펴냄.
강의할 때 무엇을 강조하는가.

노자는 ‘학(學)’과 ‘도(道)’를 구분한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로고스(logos)’와 ‘로직(logic)’을 구분하는 것이다. 로직은 로고스에 대한 해석일 뿐이지 로고스일 수는 없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로고스다. 플라톤의 5대 학문은 로직일 뿐이라고 저는 이해한다. 학교 공부라는 것은 계속 로직을 배우는 것이다. 학교에 가면 오늘은 몇 페이지, 다음날에는 또 몇 페이지를 진도로 나간다. 계속 추가적이고 부가적인 방식으로 뇌에 개념이 누적된다. 그래서 노자가 ‘학일익(學日益)’이라고 했다. 학문이라는 것은 나날이 더하는 것이다. 노자는 또 ‘도일손(道日損)’이라고 했다. 도는 나날이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면 무위에 도달할 수 있다. 손(損)이라는 오류를 제거할 수 있는 자기 혁신이다. 독단·독선·아집을 스스로 제거하는 게 노자의 핵심이다. 저는 강의할 때 우리가 학교 공부하듯이 지식이나 개념을 공부하지는 말자고 강조한다. 하나를 모르더라도 마음을 열면서 몸과 마음의 때를 닦는 그런 공부를 하자는 것이다. 서양철학자 이름 외우고 개념 몇 개 아는게 철학이 아니다. 내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져 사물을 뚜렷이 볼 수 있으면 된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도덕경』이 설파하는 진리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사람들은 『도덕경』에 대한 이론(異論) 없는 공통의 이해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21세기에는 해석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노자가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라고 했다. 우리 인간은 뭔가를 보는 순간 개념 정의를 해야 살 수 있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가 정의(定義·definition)를 내리지 않고 강의를 끌고 갈 수 있을까. 제가 보기에 노자는 ‘맨 처음 정의를 정하는 그 순간’이 바로 인간의 지적 오류가 발생하는 지점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의 바다를 우리는 서해라고 한다. 우리가 서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지식’을 완성시키는 순간 대립이 끼어든다. 우리의 서해는 중국인들이 보면 ‘동해’다. 동(東)과 서(西)에 대한 어떤 잘못된 개념이 대립을 부추긴다. 노자는 가장 폭넓은 경지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지식화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노자의 이러한 경고는 20세기 초반 비트겐슈타인이나 후설을 통해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여야 한다’는 말로 부활했다. 서양 또한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자만, 어떤 지식에 함몰되는 독선적인 인간 이성의 버릇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종교나 철학과 견주었을 때 노장사상에는 어떤 차별성· 경쟁력이 있는가.

불교나 기독교·이슬람은 신도수도 많고 거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없이 다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노자·장자는 조직이 없다. 2500년 전에 생긴 노장사상이라는 진리의 샘이 오염이 안 된 채로 그대로 있다. 누구나 그것을 건져 마실 수가 있다. 노자는 권력자들에 대한 굉장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다. 『도덕경』은 『논어』보다 훨씬 강력한 비판서다. 『논어』는 어느 정도 정치와 결탁한 상태다. 자신의 근본적인 도그마나 이념을 다 내려놓으라는 게 노자의 이야기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에서 노장이 차지하는 구실과 의미는?

원불교에서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말한다. 저는 이 말이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서양과 동양이 서로 반반씩만 쥐고 문제를 일으켰던 것 같다. 서양은 인간 마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모르는 가운데 물질에 대한 이해가 너무 왕성하게 됐다. 서구화된 사회가 외형적으로는 발전했지만, 인간 본질을 도외시하다 보니까 히스테리·신경증 같은 정신적인 문제가 터졌다. 프로이트적인 연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 동양은 인간 마음에 너무 심취하다 보니 객관적인 세계를 너무 무시했다. 결국 동양인들은 물질이 없어서 굶어 죽고, 서양인들은 정신이 피폐해져서 정신적으로 취약해졌다.

노자에 건강한 처방이 있다. 『도덕경』을 펼치자 마자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가 나온다. 어느 누구, 어느 조직, 어느 집단이 ‘도(道)’를 슬로건처럼 내걸고 주장하건 그것을 의심해 보라는 것 아닌가. 한때 효험이 있었고 진리로 통용됐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똑같이 진리인 체 행세하며 모든 선을 독점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독선이 된다. 노자·장자는 교조화된 독트린의 지배를 거부한다. 우리는 노장에 순수한 상태로 접근할 수 있다. 노자의 사상은 불교 명상 수련자들이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과 통한다. 언어의 세계를 가지고 진리를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언어를 떠나야 서로 진정한 소통이 된다. 제가 말하는 소통은 언어적인 소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내세우면 서로 싸움이 난다. 서로 ‘내가 가진 것이 도’라고 하기 때문이다. 노자가 처음부터 자기 책을 펼친 사람에게 ‘도가도비상도’라고 한 이유는, 우리가 어떤 독선이나 아집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때로는 머리를 쉬게 해주고 무위자연으로


▎우리는 100년 전에도 노바디(nobody) 였고 앞으로 100년 후에도 노바디다. 잠시 70~80년 동안 섬바디(somebody)로 살다 죽는 것 아닌가. 섬바디로 살지 말고 노바디로 살라.”고 고전해설가 차경남이 주는 메시지다.
노장사상에서 일상생활이나 직장생활에서 당장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면?

노자·장자는 결국 우리에게 무위(無爲)를 말하려고 온 분들이 아닌가 싶다. 우리 인간은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호모사피엔스가 된 건데, 요즘 들어서는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에 괴롭다. 머리가 아프고, 불면증이 오고, 우울증에 빠지고, 분노조절장애가 온다. 자기 생각에 스스로 함몰되지 않고 컨트롤할 수 있는 정도의 인격 도야가 필요한 상황이 왔다. 지나치게 진척된 산업사회에서 근원적인 답을 주는 게 노자·장자다. 그들은 유위와 자기(自欺)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머리를 쉬게 해주고 무위자연이라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

어떤 조직·기관·그룹을 이끌어야 하는 숙명에 충실하게 부응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 예컨대 대통령이나 CEO들은 노자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노자의 모든 것은 무위로 풀 수가 있는 것 같다. 어떤 국면이건, 노자는 유위나 자기가 개입되면 올바르지 않다고 본다. 노자의 무위는 부모자식 사이, 학교, 회사에서 발생하는 소통의 문제를 ‘치대국약팽소선(治大國若烹小鮮)’이라는 말로 푼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작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다’는 이 말을 많이들 자유방임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노자가 말로 나타내지 않은 어떤 기준도 있다.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들을 최대한 자유방임 상태로 놓아두는 것은 맞다. 자꾸 뒤적이면 작은 고기가 부서질 수 있다. ‘자유롭게 놓고 지켜보라’는 뜻인 것 같은데, 어떤 마지노선도 있다. 고기를 뒤집다가 부서져서도 안되지만 고기가 타서도 안 된다. 부모마다 자식 키우는 방식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부모와 자식 사이의 원활한 소통의 관계는 ‘지적질’ 같은 개입이 아니라 ‘신뢰’를 통해 발전한다. 고기가 불에 타는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부모가 정말 애정을 가지고 방임 상태로 지켜보는 게 노자 방식의 소통 기술이다.

포브스 독자들에게 특별히 한 말씀 들려달라.

지금 우리 삶이 너무 팍팍하고 어려운데,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자꾸 섬바디(somebody)로 살려고 해서 그런 것 같다. 우리 인간의 삶을 크게 바라보면 우리는 100년 전에도 노바디(nobody)였고 앞으로 100년 후에도 노바디다. 잠시 70~80년 동안 섬바디로 살다 죽는 것 아닌가. 출생과 사망이라는 혼돈 때문에 우리는 섬바디로 한정되어 우리 안에 있는 우주적인 노바디의 밝은 씨앗들을 보지 못한다. 노바디의 성품을 잊지 않고 자기의 한계를 늘 내려놓고 넘어서려고 하는 게 노자가 말한 무위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201708호 (2017.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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