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멤버십

CEO&People

Home>포브스>CEO&People

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18) 아우구스투스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연 로마제국의 國父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영어의 8월(August)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서 유래한다. 로마의 국부(國父)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달에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로마제국의 시황제(始皇帝) 아우구스투스는 가장 위대한 로마황제로 평가된다.
로마제국의 ‘시황제(始皇帝)’는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기원후 14)다. 41년간 통치한 그는 가장 위대한 로마 황제로 평가된다.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100여년에 걸친 내전을 종식시켰다. 평화가 찾아오니 번영이 따라왔다. 국제 무역이 활성화됐다. 중국산 비단이 인기를 끌었다. 위대한 정치가·행정가였다. 건설자로서는 도시경관을 바꾸는 거대 토목사업과 도로·다리·정부청사 건설에 열심이었다. 학술·문예를 장려해 로마 문화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로마 공화국(기원전 509~기원전 27)이 허물어진 자리에 그가 세운 로마제국은 1453년 동로마제국이 망할 때까지 1500년간 지속됐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본명인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100~기원전44)의 양자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름이 세 번 바뀌었다. 기원전 63~44년에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기원전 44~27년에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기원전 27년에서 기원후 14년까지는 아우구스투스였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둘은 혈연 관계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외할머니가 카이사르의 누이였다. 마침 적통 아들이 없는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를 점찍었다. 하지만 피붙이라고 해서 모두 대업을 물려받는 것은 아니다. “될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다. 또 아무나 ‘떡잎’만 보고 떡잎이 다 자란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를 ‘꿈나무’로 눈여겨본 결정적인 계기는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45년 스페인 원정에 참가한 것이다. 난파에도 불구하고 적진을 통과하는 등 천신만고 끝에 카이사르 군대에 합류했다. 카이사르의 눈은 정확했다.

카이사르가 발탁한 꿈나무


▎아우구스투스의 관저 내부. 통치 기간에 로마제국의 영토는 거의 2배로 확장됐고, 새로운 건물을 건립해 로마의 경관을 바꿔 놓았다. / 사진 : 김환영
이메일 같은 편리한 연락·소통 수단이 없는 시대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사망한 다음에나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자신이 양자로 선정됐으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요즘 말로 치면 ‘고수익, 고위험(high return, high risk)’이었다. 잘못하면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많은 주변 사람들이 유언장 내용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권유’하거나 ‘경고’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용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의 ‘무모한’ 결정이 그의 인생과 로마사 전개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카이사르의 사후, 아우구스투스와 레피두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기원전 82~30)는 기원전 43년 3명의 집정관으로서 ‘삼두 정치’ 시대를 개막했다. 셋은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을 그리스까지 추격해 패퇴시켰다. 이 셋은 ‘부모 자식 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권력을 11년동안 나눠가졌다.

단순하게 보면 경쟁력은 이쪽의 장점·단점과 저쪽의 장점·단점을 적절히 더하고 뺀 결과다. 아우구스투스는 타고난 지략가는 아니었다. 대신 그에게는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돈이 있었다. 유능한 지휘관들을 부하로 확보했다. 레피두스는 큰 변수는 아니었다.(그는 기원전 36년 망명을 떠나야 했다.)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하였던 안토니우스는 검증된 지휘관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18세에 불과한데다 키가 작고 건강 상태도 안 좋은 아우구스투스를 만만하게 봤다. (아우구스투스는 키높이 신발을 신었다.) 아우구스투스에게서 구상유취(口尙乳臭)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모두 처단하는 냉혹한 인물이었다. 물론 시대의 모든 군벌들이 그와 같았지만.

술을 너무 좋아한 안토니우스에게는 사랑도 화근이었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1년 사랑과 정치가 부적절하게 뒤섞인 관계를 클레오파트라(기원전 69~30)와 맺는다. 로마인들은 안토니우스가 사랑한 클레오파트라의 정치적 야심을 경계했다. 클레오파트라 때문에 안토니우스까지 혐오의 대상이 됐다. 그가 진정으로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졌는지 아니면, 자신의 야망을 채워줄 이집트라는 거대한 돈줄을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2년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기원전 69년~기원전11년)와 이혼한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전쟁을 선포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지배권을 확립했다. 알렉산드리아로 쫓겨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해오자 자살한다. 안토니우스가 먼저 자살했다. 상당수 사학자들이 클레오파트라가 아우구스투스를 유혹하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 자질 상의 모든 장단점을 떠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어무어니해도 오래 사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 골골하고 병석에 수시로 누었지만 당시로서는 장수했다. 소화기능이 평생 좋지 않았는데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위험한 전투는 피하는 치사한 면도 있었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하다’를 넘어서는 진리는 ‘오래 사는 자가 강하고 오래 사는 자가 이긴다’가 아닐까.

로마제국의 ‘첫째 시민’


▎악티움 해전.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지배권을 확립했다. / 사진 : 김환영
영어의 7월(July)은 율리우스(Julius)카이사르, 8월(August)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서 유래한다. 다수 다른 유럽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달에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체제는 ‘공화정의 탈을 쓴 제정(帝政)’이었다. 그는 정치심리 조작의 천재였다. ‘오직 아우구스투스만이 로마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대중의 마음에 심어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절대권력을 바치도록 유도했다. 그는 권력을 더 많이 쌓을수록 요즘으로 치면 ‘주권재민’을 외쳤다. 그의 대후배인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자신이 ‘프랑스 황제’가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의 황제’라는 꼼수 말장난을 친 것처럼,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로마의 ‘국가의 첫째 시민(Princeps Civitatis, 프린켑스 키비타티스)’으로 자처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가들을 포함해 누가 봐도 그는 로마제국 초대황제다. 아우구스투스를 ‘우상화’시키기 위해 수많은 조각품을 세웠지만, 그의 중년이나 노년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은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최초의 상비군을 창립했다. 통치 기간에 로마제국의 영토는 거의 2배로 확장됐다. 새로운 건물을 건립해 로마의 경관을 바꿔 놓았다. 세제를 개혁해 국가 재정을 탄탄하게 만들었다. 경찰·소방·우편 제도를 확립했다. 선거부정을 단속했다. 출산을 장려했다. 결혼을 의무화했다. 부부가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을 법으로 금했으며, 3명 이상의 자식을 낳는 부부들에게 혜택을 줬다. 38세 이상 남성으로 비혼 상태인 경우 추가로 세금을 부과했으며 유상상속도 못하게 했다.

민족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쓴 베르길리우스(기원전70~19), 풍자시·서정시로 유명한 호라티우스(기원전 65~기원전 8), 괴테와 바이런에 영향을 준 프로페르티우스(기원전 50께~기원전16께)를 후원했다. 권력자는 문화·예술을 후원해야 한다는, 서구의 풍조 또한 그가 길을 제시했다. 하지만 특히 베르길리우스는 ‘정문(政文) 유착’의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치와 문학이 만난 결과는 요상했다.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단테와 함께 서양의 3대 서사시 작가다. 라틴어로 쓰인 최고의 걸작인 『아이네이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기반을 다지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최고의 유산은 평화였다. 200여 년간 지속된 ‘로마의 평화(Pax Romana, 팍스로마나)’는 그가 대권을 장악한 기원전 27년부터 마지막 오현제(五賢帝)이자 『명상록』으로 유명한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가 사망한 기원후 180년까지를 일컫는 기간이다. 상대적으로 전쟁이 뜸한, 패권국이 유지하는 평화를 일컫는 ‘영국의 평화(Pax Britannica, 1815~1914)’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의 평화(Pax Americana)’, 심지어는 앞으로 도래할 수 있는 ‘중국의 평화(Pax Sinica, 팍스 시니카)’까지 모두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평화에 대한 오마주라고 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년 ‘국부(國父, Pater Patriae)’라는 호칭을 받았다. 로마제국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던 미국인들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1732~1799)을 국부(father of his country)라 불렀다. (미국의 진정한 라이벌은 옛 소련이나 중국이 아니라 로마제국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국부’로 불러야 한다는 논란 또한 그 뿌리를 파헤쳐 올라가면 아우구스투스가 나온다.

그리스도교와 아우구스투스 사이에는 여러 흥미로운 커넥션이 있다. 우선,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가 기원전 6~4년에 태어났다고 본다. 어쨌든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태어난 것이다.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살던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낳은 것은, 신약성서의 복음사가 누가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때 호구 조사령이 없었다며 누가복음 기록이 잘못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리스도교의 부흥에 기여하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의 옳고 그름을 바리사이파 사람이 물었을 때, 예수는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한번 보자고 한다. 동전에 나오는 카이사르는 어느 카이사르였을까. 예수를 함정에 빠트리고 싶었던 사람들이 가져온 데나리온 한 닢에 새겨진 황제의 얼굴은 아우구스투스 혹은 그의 후계자 티베리우스(기원전 42~기원후 37)였다. 인구조사·세금·화폐주조는 아우구스투스가 제국의 기초를 다진 3대 수단이었다. 신약성서는 이 세 가지가 ‘예수 운동’과 충돌한 현장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가 오랜 내전 때문에 도덕적으로 피폐했다며 대대적인 일종의 ‘종교기반 도덕재무장’ 운동을 펼쳤다. 간통을 법으로 금지했다. “내 딸과 잠자리를 하지 않은 로마 남자가 있느냐?”며 딸 율리아까지 외딴 섬으로 추방했을 정도다. 『사랑의 기술』과 같은 서사시로 사랑과 섹스의 즐거움을 노래한 오비디우스(기원전 43~기원후 17) 또한 흑해에 있는 식민지로 유배시켰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소문난 바람둥이었다. 그는 자신의 불륜의 대상들이 모두 정적들의 아내였으며 불륜의 목적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종교를 정치에 십분 이용했다. 로마가 다시 위대해지려면 전통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며 신전 82곳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발렌타인데이의 기원인, 루페르칼리아 축제 같은 종교 행사도 복원했다. 집권 초반 핼리 혜성이 하늘에 나타나자, 아우구스투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양부인 카이사르가 신이면 자신은 ‘신의 아들’이라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암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로마의 전통 종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아우구스투스의 시도는 간접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부흥에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 기원전 12년 그는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 대신관)의 자리에 오른다. 폰티펙스막시무스는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의 비공식 타이틀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자 원로원은 그를 신(神)이라고 선포했다. 그는 살아있을 때도 사실상 신으로 숭배됐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 황제들이 ‘참칭’하던 신(神), 신의 아들 타이틀을 박탈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마케도니아 총독이었다. 어머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3번 결혼했는데,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아들이 없었다. 그의 뒤를 이은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세번째 아내인 리비아가 결혼 전에 낳아 가지고 온 아들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연사한 게 아니라 아들 티베리우스를 황제 자리에 앉히려는 리비아에게 독살당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전혀 증거가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임종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내 배역을 잘 연기했는가? 그렇다면 내가 무대에서 나갈 때 박수쳐 달라.”

아우구스투스의 인생

기원전 63년 출생
기원전 45년 카이사르의 스페인 원정에 참가
기원전 43년 로마 집정관(consul)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주동자인 브루투스·카시우스 군대를 패배시킴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원로원이 부여
기원전 12년 대신관(Pontifex Maximus)으로 선출됨
기원전 8년 8월(Sextilius)이 그의 이름 아우구스투스로 대체됨
기원전 2년 로마의 국부(Pater Patriae)라는 호칭을 원로원으로부터 받음 기원후 14년 별세, 국가 수호신이 됨

아우구스투스의 말말말

● 나는 벽돌의 도시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만들었다.
● 무슨 일이든 충분히 잘 해낸 일은 충분히 빨리 해낸 일이다.
● 나는 내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다.
● 누구나 놀라운 삶을 살고 싶어한다.
● 무지개를 바란다면 우선 비를 처리해야 한다.
● 연습은 모든 일의 스승이다.
● 신중하게 서둘러라.
● 우리가 이룬 위업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에게 목소리라는 게 있는 한 살아남을 것이다.
● 젊은이들이여 ‘젊었을 때 늙은이들이 경청하던’ 이 늙은이의 말을 들어보시라.

김환영 -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images/sph164x220.jpg
201709호 (2017.08.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