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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예술공간 ‘순화동천’ 탐방 

기품 있는 문화사랑방이 서울 한복판에 

나권일 기자 na.kwonil@joongang.co.kr
서울시 중구 순화동 덕수궁 뒷편에 자리잡은 순화동천(巡和洞天)은 자유롭게 찾아와 전시회도 관람하고 박물관도 둘러보며, 토론모임도 가질 수 있는 ‘도심 속 유토피아’다.

▎순화동천은 “책을 가운데 놓고 문화 장르를 통합시킨 인문학적인 놀이터”다. / 사진 : 김상선 기자
순화동천의 ‘동천(洞天)’은 노장 사상에 나오는 말로 신선이 사는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 한마디로 이상향이다. 서울 서촌에 있는 청전 이상범 화백 가옥의 편액도 ‘누하동천’(樓下洞天)이다. 청전은 서울의 한복판 자신의 집을 이상향으로 삼은 것이다. 순화동에서 동천을 꿈꾸는 주인공은 김언호(72) 한길사 대표다. 지난 41년간 인문·예술 전문 출판사로 자리매김해온 한길사를 이끌어온 김 대표는 1977∼78년 창업 초기에 원고지 뭉치와 씨름하며 밤을 새우던 추억을 잊지 못해 순화동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

현재 한길사 본사 사옥은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있다. 김 대표는 파주에서도 이미 서점 ‘책방 한길’과 갤러리 ‘북하우스’ 등을 운영하고 있다. 때문에 순화동천은 서울의 책 애호가, 지성인, CEO들과 가깝게 소통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김 대표는 순화동천을 구상하면서 단순한 서점이나 토론 공간을 넘어서서 새로운 개념의 다목적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책을 가운데 놓고 문화 장르를 통합시킨 인문학적인 놀이터”가 그가 구상한 콘셉트였다. 서울 한복판에 인문·예술적 삶을 지향하는 이들을 위한 ‘문화 유토피아’를 상상한 것이다. 순화동천이 박물관·갤러리·서점·강연장 등으로 두루 쓰일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문을 열게 된 이유다.

서점·박물관·미술전 등 다양한 이벤트


▎김언호 대표는 “대형 서점이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독자 중심의 담론 공간, 전시 공간, 이벤트 공간의 역할을 순화동천이 해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사진 : 한길사 제공
순화동천을 인문학의 오아시스로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덕수궁 롯데캐슬’ 1층 문화센터에 전용면적 1157㎡(350평) 규모로 마련된 넓은 공간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순화동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선 한길사가 지난 41년 동안 펴낸 3000여 종의 책을 만날 수 있다. 한길사가 펴낸 내로라하는 베스트셀러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한 쪽에는 전망좋은 카페가 있다. 커피와 음료 뿐만 아니라 병맥주도 판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지트’로 손색없다.

언제 방문하더라도 책과 관련한 특별한 전시 프로그램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책박물관이 있는데, 19세기 위대하고 아름다운 책의 장인 윌리엄 모리스가 출판공방 켐스콧 프레스(Kelmscott Press)에서 평생의 예술동지 에드워드 번 존스와 함께 펴낸 아름다운 책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책 삽화의 새로운 경지를 구현해냈다고 평가받는 책 미술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려낸 아름다운 고서들도 전시중이다. 19세기 프랑스의 풍자화가 스타인렌·질·윌레트·포랭 등 4인의 작품을 전시한 <권력과 풍자>전도 특색있는 전시다. 박물관 입장료는 6000원. 순화동천을 자주 찾는다는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순화동천에 오면 ‘생각의 힘을 키우는 독서’를 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며 “윌리엄 모리스전, 귀스타브 도레전, 권력과 풍자전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선행학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언호 대표의 사진 작품들을 모아 ‘탐서여행’이란 이름으로 전시 중인 책사진전도 흥미로운 공간이다. 전 세계 16개 도시의 22개 서점을 두 발로 직접 답사했다는 김 대표가 사진으로 포착한 책의 미학을 만날 수 있다. 책벌레이자 서점 마니아답게 카메라 앵글과 시선이 남다르다.

순화동천은 오늘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담론을 제공한다. 올 가을, 매주 목요일 순화동천을 찾는 사람들은 특별한 학술토론회를 경험할 수 있다. 바로 ‘한나 아렌트 학교’ 강의다.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우리에게 ‘악의 평범성’이란 말로 유명하다. 특별한 범죄자나 타고난 악인들이 악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의 평범한 사람들이 악인이 된다는 경고를 날린 독일의 여성 학자다. 한나 아렌트 학교는 한국아렌트학회가 한길사와 공동으로 8월부터 내년 2월까지 열린다. 아렌트학회장을 맡고 있는 김선욱 숭실대 교수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는 전체주의적 요소가 도처에서 목격된다. 순화동천에서 열리는 강좌가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이 많은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통찰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 아렌트 방 외에도 윌리엄 모리스 방, 플라톤 방 등 회의와 토론이 가능한 4개의 인문학당이 있다. 각 공간마다 30~60명까지 수용 가능하고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빔프로젝터, 음향 시스템, 화이트보드가 구비되어 있다. 김언호 대표는 인문학당이 서울 도심의 책 애호가와 CEO, 비즈니스맨들을 위한 소통과 지성의 공간으로 활용됐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우리 사회 리더들이 인문·사회·예술 콘텐트를 품격 있게 실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다.

“사회를 이해하는 통찰력” 얻을 토론회


▎순화동천 인문학당은 한나 아렌트 방, 윌리엄 모리스 방, 플라톤 방 등 회의와 토론이 가능한 4개의 공간이 있다.
순화동천은 아기자기한 예술의 공간이기도 하다. 아트갤러리와 한길책방은 60m의 긴 복도로 이뤄져있는데, 관람자의 동선을 따라 당대의 역량 있는 미술가들의 예술혼을 만날 수 있는 갤러리로 꾸며져 있다. 특히 ‘갤러리 퍼스트아트’ 공간은 정기적으로 작은 음악회를 열기 위해 김 대표가 힘들여 준비한 방이다. 이를 위해 김 대표는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구비해두었다고 했다.

김언호 대표는 “대형 서점이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독자 중심의 담론 공간, 전시 공간, 이벤트 공간의 역할을 순화동천이 해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나권일 기자 na.kwonil@joongang.co.kr

201709호 (2017.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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