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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필기구회사 파버카스텔의 교훈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창안한 개념이다. 각 분야의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우량 기업들을 일컫는다. 세계적인 독일 필기구 회사 파버카스텔 역시 히든 챔피언으로 꼽힌다. 파버카스텔 한국지사 역할을 맡고 있는 ㈜코모스유통 이봉기 대표를 9월13일 서울 용산구에서 만났다. 이 대표가 30년간 독일을 오가며 연필업계를 지켜왔기 때문인지 코모스유통의 기업문화는 독일을 많이 닮아있다.

▎독일 뉘른베르크 파버카스텔 본사가 있는 성.
1. 전통을 고수하라 | 고전 클래식의 힘

“이 연필은 딱 알맞은 굵기에 목공용 연필보다 부드럽고 질이 좋아. 검은색이 아름답고 특히 큰 그림을 그릴 때 아주 좋더라고. 이 연필은 부드러운 나무를 사용하고 겉은 짙은 녹색으로 칠했는데 하나에 20센트야.”

1883년 빈센트 반 고흐가 친구이자 스승인 네덜란드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여기에서 묘사된 녹색 연필이 바로 파버카스텔(FABERCASTELL) 제품이다. 지금도 출시되는 스테디셀러다. 파버카스텔의 전통은 1761년 창립 이후 256년간 단 한 번 망하지 않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필 회사’라는 명성까지 얻었다. 한국으로 치면 조선시대 영조 37년이니, 이 회사는 ‘유적’ 수준에 가깝다.

“파버카스텔은 꾸준한 ‘상속자’ 기질이 있습니다.” 이봉기 ㈜코모스유통 대표가 말했다. 파버카스텔은 올해 9대 오너 찰스 알렉산더 폰 파버카스텔이 바통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가족경영 회사다. 동그란 연필이 굴러가는 걸 막으려고 육각형으로 깎아 만든 평범했던 철학을 고집스럽게 지켜가고 있다. 전통적이라고 낡거나 고루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파버카스텔 제품의 품격은 남다르다. 11세기부터 시작된 전통, 중세시대 성이나 가문의 문장을 도입해 브랜드 특유의 고급스러움을 표현한 제품이 많다. 가족경영에서 리더는 바뀌어도 기업철학은 변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제품을 만든다. 그러면서도 제품의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파생되는 신제품들은 기능적으로 현대화돼 있지만 기존의 전통성과 품질은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작고한 파버카스텔 그룹의 8대 회장 안톤 볼프강 폰 파버카스텔 백작은 2011년 창업 250주년사에서 “전통이란 재가 아닌 빛을 살리고 지켜나가는 일”이라며 “중요한 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 내려오는 태도다. 스스로를 연결 고리로 보고 성장을 생각하기 이전에 회사가 장기간 존속하는 방법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2. 건강한 돈을 벌어라 | 사회적 책임


▎파버카스텔 연필을 생산하는 공장.
30여 년 전, 브라질 남동부에는 1만㏊의 소나무 숲이 만들어졌다. 산림의 3분의 1은 멸종위기 동식물을 위한 보금자리로 변모했다. 사막처럼 허허벌판이던 이 지역에 숲이 조성되자 동물이 뛰어다니고, 풍경이 바뀌었다. 연간 20억 자루라는 연필을 생산하는 파버카스텔은 해마다 15만t의 목재를 필요로 한다. 평균 18㎝ 연필을 이으면 지구로는 여덟 바퀴, 지구에서 달까지 닿는 거리다.

이 자원을 마련하기 위해 황폐한 땅을 개척하여 산림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처음 심은 소나무는 목재로 쓰려면 15∼20년이 걸린다. 단기적인 이익을 창출하기엔 긴 시간이다.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책임을 잘 조화시킨 ‘명품 사례’다.

나무를 베고 재목을 만들기 위한 제재소가 생겨나자 500여 개의 일자리가 늘었다. 또 이 숲은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축시키고 있다는 의미로 UNFCC(유엔기후변화협약)의 인증서를 받기도 했다. 현재 이 프로젝트는 브라질을 거쳐 콜롬비아로 번져가고 있다.

안톤 회장이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파버카스텔 잉크를 들이킨 영상은 화제를 모았다. 어린이용 제품에는 친환경 수성페인트를 사용하고 나무에는 방부제를 첨가하지 않는다. 파버카스텔 한국 시장의 소비자 40%가 어린이인 점도 이 때문이다. 이봉기 대표는 “미래 세대의 비용을 사용하여 이익을 창출하지 않는 게 회사의 철학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세계적인 화두로 떠오른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서 그들이 얼마나 진보적인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3. 先투자 後수확을 실천하라 | 직원이 재산


▎파버카스텔 공장 외관.
“곳간을 채운 뒤에 먹여 살릴 생각 말고 식구를 배부르게 하고 곳간을 채워달라고 요구하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이봉기 대표는 직원 복지 철학을 이렇게 빗댔다. 파버카스텔은 권위주의, 연공·연고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수평적 조직문화를 지향한다. 두 달 전 코모스유통은 4년 만에 사무실 내부를 완전히 개조했다. 실내 인테리어부터 직원들의 책상과 의자, 모든 자재들을 교체했다. 제품들은 물론 형형색색 필기구로 그린 예술작품들까지 사무실 벽면을 가득 채웠다.

직원들의 복리후생엔 더 신경을 쓴다. 회식과 야근이 없는 건 기본이다. 회의는 월요일 아침에 샌드위치를 먹으며 간단하게 한다. 퇴근시간도 앞당길 계획이다. 직원들이 마시는 물 한 잔도 허투루 생각하지 않으려 고급 생수를 구비해놓기도 한다. 1년에 한 번씩 전 직원이 해외 워크숍을 간다. 중국·싱가포르·일본 등 아시아 지역 위주로 다녀왔다.

이 대표는 더 널찍한 사옥을 찾는다며 욕심을 부린다. 최근 출산한 여직원이 늘면서 자녀들과 함께 출근할 수 있는 베이비시팅 룸을 만들 계획이다. 이미 파버카스텔은 1884년 세계 최초로 임직원 자녀를 위한 유치원과 유아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해는 파버카스텔이 직원들에게 연금제를 도입하고 사내 건강보험을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직원이 행복해야 좋은 제품이 나온다’는 지론은 지금까지 전 세계 파버카스텔 지사에 통용되는 가치다. 이봉기 대표는 ‘명품’의 조건으로 비유했다. “명품은 비용을 치르는 첫 순간만 비쌉니다. 직원들도 여러 해 직장에 만족해 병이 안 나고 근속하고 업무에 충실하면 회사에 궁극적으로 이득이 돼 돌아옵니다.”

4. 감성과 가치를 팔아라 | 아날로그의 기쁨


▎9월13일 파버카스텔 한국지사에서 이봉기 대표를 만나 명문 장수기업 파버카스텔의 비결을 들었다.
“불편함이 주는 행복감을 아세요?” 이봉기 대표는 이날 ‘아날로그’의 장점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인간은 아날로그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 가치를 사는 겁니다.”

예컨대 연필은 한 번에 써내려갈 수 없다. 연필심이 뭉툭하게 닳으면 깎아야 한다. 볼펜은 지울 수가 없어 미리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기구가 가진 불편함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쉼’이 바로 창의의 발원지라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편의성을 채우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있다면, 스스로 불편함을 감수하며 안정을 찾고 싶은 정서적인 욕망이 아날로그 정신이라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파버카스텔 연필은 명사들이 사랑한 필기구로도 유명하다. 고흐를 비롯해 괴테, 헤르만 헤세, 만화작가 칼 바크스, 독일 화가 파울 클레,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격대도 다양하다. 한 자루에 1000원부터 30만원 이상을 호가하기까지 한다. 지난해 9월 세계적인 패션 아이콘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와의 협업 작품인 ‘칼 박스 : 컬러스 인 블랙(Karl Box : Colours In Black)’는 2500개 한정품으로 한 통에 약 3000달러(한화 340만원)였다. 나무 연필한 자루가 세계적인 명품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건 그만큼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때문에 이봉기 대표가 공을 들여 집중하는 투자는 문화행사다. 부산국제영화제, 대관령 음악제, 통영 국제음악제 등을 협찬하거나 후원한다. 코모스유통 매출의 상당 부분을 투자하고 있다. 브랜드 자체가 문화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파버카스텔의 전략인 셈이다.

5. 한눈 팔지 않는다 |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파버카스텔 독일본사에서 한국식물화가협회 초청 ‘보타니컬아트’ 워크숍에 참가한 회원들.
파버카스텔은 한우물 경영으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커지면 본사를 대도시로 옮기고 공장은 인건비가 싼 해외로 이전한다. 계열사가 늘어나 다양한 산업의 품목으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파버카스텔은 두 세기 반이 넘게 고향을 지키며 지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이봉기 대표는 “‘평범한 일을 남들보다 더 잘해서 비범해지자’는 게 기업의 철학”이라며 “계열사를 늘리고 규모만 확장하면 오히려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답했다. 파버카스텔이 2008년 금융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숙련된 기술자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현재 파버카스텔은 연필 분야의 기술집약형 경쟁력으로 매년 7억 유로(1조원) 이상의 매출을 거둔다. 2005년 대비 2015년 파버카스텔은 독일에서 문구류 시장점유율 17%를 차지하며 1위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현재 14개국에 생산 공장과 23개국에 해외지사까지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용, 전문가용, 고급 필기구, 사무용품 등 4가지로 세분화해 특화된 상품은 3000개가 넘는 제품으로 글로벌 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다. 한 분야에 ‘올인’하는 전략이 가져온 성과다.

“인류가 망하지 않는 한 파버카스텔은 영원히 존속할 겁니다.” 이봉기 대표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히든 챔피언의 안정적인 ‘수성(守城)’은 분명해 보인다.

-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

201710호 (201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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