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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유에프오 정현우 대표 

한국인 창업가 중국을 사로잡다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사진 지미연 객원기자
중국의 창업 생태계는 경쟁이 치열한 만큼 성공의 열매는 달다. 그런 시장에서 한국인 창업가 정현우 타타유에프오 대표의 성공 스토리가 주목 받고 있다. 위챗이 휩쓸고 있는 시장에서 소셜 메신저 서비스를 론칭해 중국 젊은이 1000만여 명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11월 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사무실에서 정현우 타타유에프오 대표를 만났다. 창업 4년 만에 130여 억원의 투자를 받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설명했다.
중국 13억 인구 중 9억60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쓰는 메신저가 ‘위챗(WeChat)’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설치한 국민 메신저인 셈이다.

위챗이 버티고 있는 시장에 ‘소셜 메신저’를 표방하는 서비스를 론칭해 중국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겁 없는 한국인 창업가가 있다. 1000만 명 가까운 중국 젊은이들이 한국인 창업가가 내놓은 서비스를 이용 중이다. 사진·동영상 등을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고, 채팅도 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사랑받고 있다.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면서 투자가들도 주목하고 있다. 2013년 7월 창업한 이후 지금까지 1200만 달러(약 132억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이 서비스를 뛰어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은 아직까지 없다. 아니 나왔다고 해도 이 서비스 앞에서 힘쓰지 못했다. 심지어 국민 메신저 위챗을 만든 텐센트도 이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10개월 만에 접어야 했다.

중국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는 소셜 메신저는 타타유에프오(tataUFO)이고, 이 서비스를 론칭한 주인공은 한국인 창업가 정현우(33) 대표다.

그가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10월 31일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주최하고 네이버 그린팩토리에서 열린 ‘중국의 한국인 2017’에서 연사로 나서 창업 분투기를 재미있게 설명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행사 다음 날 그를 만났다. 그는 “올해 말까지 1100만 명의 유저를 모으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타타유에프오의 의미에 대해서 “타는 ‘그, 그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창업을 준비할 때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말이 유행해서 이와 맞는 유에프오를 붙였다”면서 “타타유에프오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재미있는 문화를 즐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를 만나서 “위챗 같은 서비스가 있는데 어떻게 그 시장에 도전할 생각을 했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서비스가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중국의 소비시장을 이끄는 세대가 ‘지우링허우(九零后·중국에서 90년대 출생자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그들만의 문화를 공유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서 “위챗은 그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서비스를 내놓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지우링허우’ 타깃으로 하는 틈새시장 공략


▎1 0월 31일 네이버 그린팩토리에서 열린 ‘중국의 한국인 2017’에서 연사로 나서 창업 분투기를 재미있게 설명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위챗은 시도하지 못하는 타타유에프오의 장점이 있다. 동영상과 사진의 화질을 높인 것이다. 화질이 좋다는 것은 데이터를 많이 사용한다는 이야기다. 그는 “예를 들면 15초짜리 동영상을 위챗에 올리면 1메가 바이트 정도로 압축을 하지만, 타타유에프오는 훨씬 화질이 좋고 용량도 크게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9억 명 이상이 사용하는 위챗은 비싼 데이터 사용료 때문에 화질을 높일 수 없지만, 타타유에프오는 이게 가능한 것이다. 그는 “지우링허우라는 중국의 새로운 세대만을 위한 서비스 틈새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타타유에프오는 처음부터 소셜 메신저 서비스를 표방하고 나온 게 아니었다. 이 서비스는 2012년 베이징대에 재학 중일 때 웹서비스로 먼저 선보였다. 그때는 ‘소셜 미팅’ 서비스였다고 한다.

초기 타타유에프오는 매일 밤 10시에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콘텐트를 추천해주는 서비스로 시작했다. 2013년 7월 학교를 졸업하고 타타유에프오를 창업한 후부터 서비스가 진화를 하기 시작했고, 스마트폰 앱으로 출시되면서 점차 현재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큰 성장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매출은 없다. 그는 “투자금은 대부분 서비스 확대를 위해 사용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며 웃었다. 내년 후속 투자 유치를 계획하는 이유도 시장 선점을 위한 마케팅을 위해서다.

그는 사용자 1500만 명을 모은 후 비즈니스 모델을 본격적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바로 광고다. 그는 “중국 젊은이의 대학 진학률은 아직도 20%이고, 대학생은 졸업하면 좋은 직장에서 일하게 된다”면서 “우리 서비스 이용자들은 이런 면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소비자 계층이기 때문에 광고주에게도 매력적인 플랫폼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자신했다. 이와 함께 커머스 같은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도 준비 중이다.

타타유에프오 사무실은 중국 베이징 시에 있는 칭화대 부근에 있다. 이곳에는 50여 명의 임직원이 일하고 있는데, 한국인은 정 대표 혼자다. 타타유에프오의 유명세에 대해서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대학생에게 우리 서비스를 물으면 대부분 안다고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성공 뒤에는 말 못 할 어려움도 많았다. “중국에서 스타트업을 하는 것은 마치 아마존에서 생존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개인적으로 자금이 끊겨서 돈 빌려 월급 주고, 신용카드로 서버 비용을 내면서 버텼던 수개월이 가장 힘들었다”며 웃었다. “그때 중국 인맥과 투자자에게 개인적으로 빌려서 버텼는데,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고 고맙다”고 덧붙였다.

중국 창업 시장의 경쟁이 치열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조언도 했다. “너무나도 큰 시장, 그 시장에는 자본과 우수한 인재들이 넘친다. 야성미 넘치는 창업가들이 경쟁하는 곳에 꿈이 있다면 도전해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독특한 이력도 업계에서는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회사 대표로 일했다는 것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컴퓨터를 잘 다루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친구와 함께 ‘J&L컴퓨터연구소’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단 ‘연구소(?)’를 차리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PC통신에 올릴 정도였다. 그는 “사업은 아니고 재미로 시작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것도 회사 대표였단다. 그의 말을 빌리면 “중학생 때 HTML과 PHP 같은 코딩을 할 줄 알았는데, 우연찮게 회사 사이트를 만들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면서 “1998년 당시 일당 15만원을 받았는데, 여기저기에서 일을 부탁해서 아예 회사를 차렸다”고 한다.

VC에서 일하며 창업 꿈꿔


▎중국 베이징시 칭화대 부근에 있는 타타유에프오 사무실 모습. 이곳에는 50여 명의 임직원이 일하고 있는데, 한국인은 정 대표 혼자뿐이다. / 사진:최영진 기자·타타유에프오 제공
평일엔 수업을 듣고 주말에는 서울행 비행기를 타는 생활을 반복했다. 서울에서 일을 하고 계약서도 직접 작성했다. 그렇게 일을 하고 일요일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갔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그런 생활을 했고, 돈도 벌었다. “당시에는 돈을 쉽게 벌었던 시기였다”며 웃었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집중력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재능이 있었던 것일까. 1년 동안 하루에 3시간씩 자는 생활을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수학정석 교재도 2학년 겨울방학 때 처음 봤을 정도였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할 정도로 독하게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하고 서울의 한 유명 사립대학에 합격했다. “내신은 형편 없었다”며 웃었다.

만족하고 대학에 다녔다면 현재의 그는 없었을 것. 그의 눈은 이미 중국에 가 있었다. 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에 설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주류 사회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깨달았고, 아시아에서 뭔가를 해내고 싶었다”면서 “중국은 아시아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중국 유학을 택했다”고 말했다. 2006년 9월 중국 베이징대에 입학했다.

그의 독특한 이력은 인도네시아에서도 이어진다. 병역의무를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해외 파견으로 대체했고, 그는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주에 컴퓨터 전문가로 파견됐다.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인도네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주는 ‘인터넷 버스’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구글 버스를 참고해 아이들에게 컴퓨터 교육을 시키자는 아이디어였다. “7개월 동안 혼자서 그 버스를 만들어서 테스트까지 한 후에 후임에게 물려주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미래에 대한 준비를 철저하게 해놨다. 그의 꿈은 대학 졸업 후 미국 유명 대학에서 MBA 과정을 밟는 것. 그리고 유명 컨설팅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코스대로 삶을 준비했던 것”이라며 웃었다.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벌써 미국 회계사 자격증을 따놓았고, MBA 과정 입학을 위한 서류도 모두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그런 그가 탄탄대로의 미래 대신 창업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후 다시 복학하기까지 6개월이 남았다. 자신의 전공인 금융과 특기인 IT 분야를 결합해보고 싶었던 것. 벤처캐피털을 떠올렸다. 당시 임지훈 카카오 대표가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에서 수석심사역으로 일하고 있던 때였다. 우연히 임 대표의 블로그 글을 읽고 일해보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다. 며칠 후 답장이 왔고, 면접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투자사에서 심사역으로 일하면서 요즘 잘 나가는 창업가들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스타트업의 세계가 정말 놀라웠고, 멋있는 창업가들을 보면서 창업에 대한 꿈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그동안 준비했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에 도전한다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다. 베이징대로 돌아간 후 방황을 해야만 했던 것. 매일매일 바쁘게 살았던 그는 한 학기 내내 ‘혁신과 창업’이라는 수업만 듣고 빈둥대기 시작했다. 그 이유에 대해 “원래 준비했던 것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그는 창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이력은 독특하지만 관통하는 게 하나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낸다는 점이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하든 믿어준 부모님이 있었다”며 웃었다. “만들고 싶고,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게 젊음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게 중요한 것 같다”며 웃었다. 현재의 그를 만든 키워드는 ‘주체적인 삶’이었다.

-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사진 지미연 객원기자

201712호 (201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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