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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년을 이끈 호기심 DNA 

독일기업에서 배운다-머크(MERCK)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약화학 회사’ ‘세계에서 최초로 액정을 발견한 회사’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지배구조로 이뤄진 가족 기업’ ‘세계 최고의 직장’ 3세기를 관통하며 ‘월드 베스트’의 수식어를 잇고 있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독일 기업 머크는 헬스케어, 생명과학, 기능성 소재 분야를 생산하는 장수 기업이다. 1668년 아주 작은 ‘천사약국(Engel Apotheke)’에서 시작한 머크 기업은 디스플레이, 항암제 개발로 영역을 확대하며 명망 있는 세계적인 그룹으로 우뚝 섰다.

▎ 1668년 ‘천사약국’으로 시작한 독일 기업 머크는 세계적인 바이오제약 기업으로 우뚝 섰다. / 사진:머크 제공
머크 그룹은 2018년 창립 350주년을 맞았다. 머크의 제품과 서비스는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 머크 제품은 디스플레이나 카메라용 부품 소재로 거의 모든 스마트폰에 들어간다. 긁힘 방지 코팅제에도 머크 제품이 포함돼 있다. 치료제들도 마찬가지다. 다발성 경화증 같은 신경 퇴행성 질환, 호르몬 질환, 불임, 류머티스 질환의 새로운 치료제는 출시됐거나 연구개발 중이다. 인류의 진보를 위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온 지난 역사를 바탕으로 머크는 지금도 선도적인 과학기술 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머크를 이끈 독특한 경영철학에 대해 글렌 영 한국 머크 대표에게 들었다.

1. 머크 가문의 기업 철학 |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1842년 대량생산 시스템을 도입하며 근대공장으로 재탄생한 독일 담스타트 머크 공장의 당시 모습.
명확한 전략과 기업의 가치는 직원을 몰입하게 한다. 글렌 영 한국 머크 대표는 머크 가문의 기업철학을 “Was der Mensch thun kann”(What people can do,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무한한 역량과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 오늘날의 머크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머크 가(家) 6대손 하인리히 엠마뉴엘 머크(Heinrich Emanuel Merck)는 1842년 회사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대량생산 시스템을 도입하고 현대식 제조업체로 도약하기 위한 기업가적 용기(Entrepreneurial courage)는 프리드리히 야콥 머크의 창업가 정신과 함께 머크를 떠받치고 있는 가치다. 글렌 영 대표는 “1970~80년대 한국의 고도 경제 성장을 이끈 ‘한강의 기적’에 코란도(Korean can do) 정신이 있었다면 머크의 세계화는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했다.

1853년 머크 고용 계약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계약서는 당시 노동 조건을 반영하고 있는데 고용주의 의무로 최소 20년 이상 일하면 소액의 연금을 지급하며, 종업원의 과실이 없을 경우 질병을 앓거나 다쳤을 때도 급여를 지급하도록 했다. 연금과 의료 급여 등 종업원 복지 제도가 이미 명문화된 것이다. 복지개념이 없던 1900년대부터는 학교와 탁아시설이 있는 마을을 만들고 세계대전 후 직원들에게 생필품과 양복, 손수건, 빗까지 지급해 온 것은 머크 가문의 오랜 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머크는 직원의 잠재력에 대한 투자를 목표로 삼고, 오랜 시간 진화를 거듭해 온 셈이다.

2. 계승과 혁신 | 전통과 개혁의 상반된 가치 동시 실현


▎글렌 명(Glenn Young) 한국 머크 대표. / 사진:김현동 기자
머크가 주목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전통과 개혁의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장수 기업임에도 역동적인 혁신으로 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1888년 세계 최초로 액정 물질을 발견하며 액정디스플레이(LCD) 기술의 초석을 놓았다. 그 외 안료, 스마트 윈도, OLED 디스플레이, 항암 치료, 유전자 편집 등에 대한 개발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삼성과 LG, SK가 주 고객사다. 6000여 명의 머크 연구진은 신기술을 모색하고 개발하고 있다.

글렌 영 대표는 “엠마누엘 머크의 ‘언제나 회사 이익을 가문의 이익보다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이어 “‘머크가(家) 사람들은 회사를 소유(owners)한 게 아니라 후대를 위해 신탁관리(trustees)를 맡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믿음을 가족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다음 세대가 물려받을 유산을 키우는데 더 큰 무게를 둔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혁신이 자칫 전통성을 해칠 수도 있지 않냐는 지적에 글렌 영 대표는 고개를 젓는다. “1668년 머크의 창립부터 후손들은 과학에 기반한 산업에 뿌리를 두고 정진했습니다. 66개국에서 활동하는 5만여 명의 직원을 통해 고품질 제품을 생산하고 신기술에 집중하고 있어요. 내실 있는 성장을 함께 추구하고 있습니다.”

혁신을 위한 인수합병도 과감하다. 2010년 머크에 이득을 안겨줬던 제품 유통과 복제약 부문 회사를 매각하고 생명과학 회사를 인수하는 과감한 시도는 머크 혁신의 좋은 사례다. 글렌 영 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세로노, 밀리포아, AZ, 씨그마알드리치 등 대형 M&A를 연이어 성사시켰는데 금액으로만 총 380억 유로”라고 말했다. 원화로 환산하면 47조원 수준이다.

기술혁신 투자를 위해 머크는 ‘머크 어워드’를 주관하고 있다. 머크 어워드는 2004년 한국정보디스플레이 학회가 주관하는 국제정보디스플레이학회(IMID)에서 제정된 기술논문상이다. 머크 그룹이 1904년부터 액정에 대한 연구로 디스플레이 기술의 과학적 업적을 지원하기 위해 2004년에 제정했다.

3. 지배구조 | 소유와 경영의 완벽한 분리


▎세계 최초로 액정을 발견한 머크는 OLED 신기술에도 앞장섰다. / 사진:머크 제공
머크는 책임 경영을 위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대표적인 회사다. 분리를 통해 투명한 지배 구조를 구축하면서 주식합자회사(KGaA)라는 형태를 찾았다.

주식을 발행하는 합자회사로 자본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동시에 경영권과 지배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해준다. ‘무한책임’ 경영 체제라고도 한다. 개인(소유주)이 기업의 채무에 대해 지분만큼이 아닌 모든 채무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머크 가문이 소유한 주식은 70%지만 100%의 책임을 진다. 쉽게 말해 유한책임회사는 회사가 망해도 가문이 유지될 수 있지만, 무한책임회사는 회사가 기울면 가문도 함께 망하게 된다. 이 독특한 기업 형태는 회사 운영은 혈연관계와 무관하게 유능한 경영인에게 맡기고 경영에 대한 감독은 가족의 직접적인 영향과 통제를 받도록 구축했다.

글렌 영 대표는 현재 머크뿐 아니라 (쌍둥이 칼로 유명한) 헨켈도 무한책임 체제라고 덧붙였다. 2012년 독일 최대 드러그스토어(약국과 잡화점이 결합한 형태) 체인인 슈렉커가 파산했을 때, 오너인 안톤 슈렉커가 자동차 키와 롤렉스 시계까지 검찰에 빼앗긴 것도 무한 책임회사였기 때문이다. 글렌 영 대표는 “무한책임이란 개념은 영미권에는 없어서 투자자들에게 설명할 때 애를 먹는다”며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야말로 독일 산업계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즉, 회사 경영이 머크 가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책임감 있는 행동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특히 가족이라도 차익을 목표로 지분을 팔 수 없다. 머크에서 수익이 나서 모회사인 E머크가 소유 지분(70.3%)에 해당하는 만큼의 배당을 받는다고 해도 153명의 E머크 파트너들에게 전부 나눠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렌 영 대표는 “파트너들에게 돌아가는 건 E머크가 받는 전체 배당수익의 30∼40% 정도고 나머지는 후대를 위해 전부 회사로 귀속시킨다”며 “후대를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패밀리가 자본 투자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투자가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4. 인재육성 | 세계 최고 수준의 업무 환경 제공


▎스마트폰 액정 소재는 대부분 머크에서 개발한다.
머크는 2017년 11월 세계적인 과학 잡지 사이언스 매거진이 선정한 ‘세계 최고의 바이오·제약 기업’ 중 하나로 꼽혔다. 이번에 발표한 ‘2017년도 과학 분야 최고 직장 조사’는 바이오테크, 바이오제약, 제약 분야 관련 종사자를 대상으로 했다. 이로써 전 세계 헬스케어와 생명과학 업계 상위 기업 20위에 4년 연속 이름을 올리게 됐다.

또 한국 머크는 국제 인사평가기관인 우수고용협회(Top Employers Institute)로부터 2년 연속 한국 최고 기업이자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고의 기업으로도 인증을 받았다. 우수고용협회(Top Employers Institute)는 인사부문 최우수 사례 조사 및 외부기관에 의한 감사 등 전 세계에 있는 회사들에 대한 평가를 매년 실시하고 임직원에게 최고 수준의 업무환경을 제공하는 기업에 대해 최고의 기업 인증서(Top Employer Award)를 발행한다.

그 중심에는 머크의 인재에 대한 남다른 철학이 작용한다. 글렌 영 대표는 “우리는 회사의 성장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인재, 글로벌 환경에서 근무하며 자신의 현재 역할을 넘어 스스로 개발하는 인재를 원한다. 회사와 함께 성장하고 살아갈 수 있는 직원은 본인의 분야에서도 전문가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스타트업과의 협력으로 인재 활용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머크 본사가 있는 담스타트의 이노베이션 센터에서는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통해 과학기술 스타트업과 전문성을 공유하고 각국의 직원들을 통해 혁신 프로젝트에 집중하도록 한다.

또 헬스케어, 생명과학, 기능성 소재 등의 분야에서 가장 유망한 창업 스타트업 지분 투자를 위해 머크의 벤처 캐피탈 역할을 하는 머크 벤처스의 펀드 규모를 3억 유로로 두 배 늘리기도 했다.

한국의 최대 장수기업은 121년 된 두산그룹이다. 한국 기업 평균 존속 기간은 30년에 불과하다. 350년을 세계 최고로 지켜 온 머크 그룹엔 기업의 교과서로 불리는 ‘머크 DNA’가 존재한다. 글렌 영 대표의 대답은 명료했다.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호기심이 지금의 머크를 이끌었다고 봅니다.”

-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

201801호 (201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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