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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의 ‘세계의 컬렉터’] Cabinet de Curiosité Jean Chatelus 

호기심의 방, 장 샤틀루 

박은주 전시 기획자
프랑스 컬렉터, 장 샤틀루의 집은 유럽 여러 박물관 관장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 곳이다. 한 작품을 대여해주면 그 작품이 돌아오기 전에 다른 작품을 대여해달라는 요구가 잇따른다. 박물관에서 대여하고자 하는 작품을 고르는 그의 안목 뒤에는 기름진 토양이 되었던 긴 여정이 있었다.

▎장 샤틀루 서재
세기를 달리하면서 컬렉터들의 유형은 점차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19세기 세관 행정원, 빅토르 쇼케(Victor Chocquet)는 드루오 경매장에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지독히 빠져 있던 들라 크루아, 쿠르베, 도미에, 르누아르, 마네, 모네, 세잔의 작품을 구입했다. 당시 강렬히 거부당했던 인상주의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그가 세상을 떠난 1891년 후 그의 작품 대부분은 미국의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3년 뒤인 1904년에 선박회사 회장이었던 안드레 르벨은 지인들과 함께 곰가죽 컬렉터 클럽을 운영했다. 회원 13명은 미술상 볼라르의 도움으로 당시 가장 아방가르드한 젊은 작가들의 아틀리에를 방문하면서 마티스, 피카소, 세잔, 피사로, 고갱, 고흐 등 작가들을 지원해주는 특별한 삶을 누렸다. 20세기 들어 컬렉터들에게 공간의 의미는 하나의 자유로운 민주주의적 공간으로 탄생했고 더불어 부를 축적하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시작했다.


▎장 샤틀루(Jean Chatelus)
컬렉터들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졌다. 특히 개인 컬렉터들이 중요한 작품들을 기증하거나 대여해주지 않으면 박물관의 미술사적 회고전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 컬렉터, 장 샤틀루의 집은 유럽 여러 박물관 관장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 곳이다. 한 작품을 대여해주면 그 작품이 돌아오기 전에 다른 작품을 대여해달라는 요구가 잇따른다. 박물관에서 대여하고자 하는 작품을 고르는 그의 안목 뒤에는 기름진 토양이 되었던 긴 여정이 있었다.

이탈리아 자전거 여행에서 만난 바로크 예술


▎장 샤틀루 원시미술(primitive art) 컬렉션
장 샤틀루의 조부모는 섬유 산업에 종사했고 집 안에 예술이 차지할 공간은 전혀 없었다. 그는 문학, 예술, 과학, 사회 등 모든 분야의 책을 섭렵했으며, 늘 호기심이 넘쳤던 소년이었다. 그는 리옹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로마 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예술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술서적과 이태리 여행은 그를 예술의 현장으로 이끌어주었다. 점차 바로크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독서광에게 초현실주의(surrealism)와 원시미술(primitive art)의 발견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인연이었다.


▎왼쪽: 시멘트가 들어 있는 닫힌 가죽 가방 Chiharu Shiota 중앙: 성모상 Mounir Fatmi
장 샤틀루는 1968년 소르본대학에 프랑스 역사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관심이 많았던 초현실주의와 원시미술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뒤, 냉전 시대에 원시미술 작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고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취향과 잘 맞았다. 아프리카 마스크를 포함한 원시미술 작품들에 심취해 있을 때, 불현듯 프랑스에서 Quai Branly 박물관이 설립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2006년 설립). 케 브랑리 원시박물관은 원시미술 자체가 골동품처럼 인식되는 공간을 설립한 것으로 장에게는 낙심스러운 현실이었다.


▎David Altmejd
그는 그때 원시미술을 이어갈 열정을 잃었다. 원시미술 전문 갤러리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전문가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는 작품을 구입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구입한 작품들은 원작 증명서(certificate) 혹은 작품의 족보와 같은 소장기록(provenance)이 없었다.

다양한 취향으로 세계 미술 안목 높여가


▎줄리아 셰어의 참대 작품
다행스럽게도 2004년 메종 루즈 재단(Maison Rouge Fondation)에서 있었던 전시 [은밀함, 문 뒤의 수집가 L’intime, le collectionneur derrière la porte]에 장이 초대받으면서 원시미술 전문가를 통해 한결같이 원작이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었다. 장은 지금 그의 집을 메우고 있는 원시미술 작품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작품들을 정리했다. 실제 그의 집을 방문한 지인의 가족 중 어린아이들이 보고 느닷없이 울음을 터트리기도 한다는 괴기적인 느낌의 아프리카 마스크는 장에게는 온전하게 중립적인 느낌일 뿐이다.

만약 장이 모든 열정을 초현실주의와 원시미술에만 쏟아부었다면 이런 현실 앞에서 매우 당혹스러웠을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취향은 다양했다. 1968년부터 그는 브람 반 벨드(Bram Van Velde)의 작품을 포함해 여러 작가의 석판화, Artist Book, Gravure, 뉘아지스트(Nuagistes)라고도 불리는 에꼴드파리 작가 르네 뒤비에(René Duvillier), 프레드릭 벤라드(Frédéric Benrath) 등의 작품을 구입했다. 작품들 사이에 있는 오래된 가구는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것들과 스칸디나비아산 가구들이다. 장은 작가 아틀리에 방문과 파리 비엔날레에서 콤바스 등의 다양한 작가를 알아가며 안목을 높여갔다. 그리고 석판화와 드로잉 작품에도 매력을 느꼈다. 프랑스 작가들 중에서는 강한 인상을 주는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의 드로잉 몇 점을 컬렉션 초기에 각각 500프랑에 구입했었다(우연히도 인터뷰를 한 날 파리 현대미술관에서 장 포트리에 회고전을 하고 있었다).


▎빔 델보예의 [문신 돼지]와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등이 있는 거실
당시에 파리에는 현대미술이 자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장식미술 박물관에서 장 뒤뷔페(Jean Dubuffet)의 아르브뤼(Art Brut, 가공되지 않은 원시적 미술로, 앵포르멜 미술운동의 토대가 된 이념) 등 생존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반면 뒤셀도르프와 퀼른에는 흥미로운 현대미술 전시들이 있었다. 그는 기차 여행을 하며 독일의 전시들을 보러 다녔고 이 여행은 스위스를 거쳐 밀라노, 튜린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그의 컬렉션에는 강렬한 표현주의적 독일풍 미술품들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40여 년 전 그가 컬렉션 초기부터 프랑스 주변 국가들의 갤러리들을 직접 방문하면서 발로 뛰어가며 높여간 안목은 이렇게 기초부터 탄탄했다.

그러던 중 갤러리스트, 마티아스 펠스(Mathias Fels)의 제안으로 1970년 1회 아트 바젤을 방문했다. 10개 국가의 90개 갤러리가 참여했던 아트 바젤은 진정한 예술 애호가들의 천국이었고 갤러리스트들은 이곳에서 흥미로운 정보들을 수집하며 우정을 쌓았다. 페어는 평안했고 여유가 있었으며 예술을 주제로 끝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의 대다수 갤러리스트가 보이는 상업적인 태도에 깊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아트 바젤의 흥미로운 경험은 그를 베니스 비엔날레와 1972년 카셀 도큐멘타로 향하게 했고 그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현대미술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다. 점차 현대미술 작품들이 원시미술 작품 사이에서 공간을 메워갔다.

생존작가들의 작품들도 초현실주의적이며 괴기하고 강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선택되었다. 특히 장의 관심을 끌었던 작가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작가, 아놀프 레이너(Arnulf Rainer)와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다. 니치의 사진 작품들은 1960~70년대에 신체를 소재로 동물의 시체에서 피를 모아 뿌리거나 흘리는 등 폭력적이고 파격적인 행위예술을 기록했다. 점차 그의 컬렉션은 시그마 폴케(Sigmar Polke), 슈 윌리엄스(Sue Williams), 신디 셔먼(Cindy Sherman), 백남준, 마이크 켈리(Mike Kelly),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조엘 피터 윗킨(Joel-Peter Witkin), 안드레아스 세라노(Andreas Serrano), 조안나 바스콘셀로스(Joana Vasconcelos), 프란츠 웨스트(Franz West),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 빔 델보예(Wim Delvoye) 등으로 이어졌다.

비디오 예술가의 작품이 개인 침대로


▎밀랍과 여러 재료로 제작된 성녀 팔로메나 조각상
그는 빔 델보예처럼 유머가 넘치고 지성적인 벨기에 작가들을 좋아했다. 문신이 된 박제 돼지 [프리실라]는 거실에서, 18세기 프랑스인이 가구를 만드는 방식으로 조각된 실제 크기의 콘크리트 믹서(bétonnière) 작품은 개인 보관소에서 늘 그를 반긴다. 장은 호기심 강하고 늘 탐구하는 벨기에 컬렉터들도높이 평가했다. 수백여 점에 이르는 작품들의 미래에 그가 몇 년 전에 내린 결론은 벨기에 사립 박물관 기증이었다. 그러나 박물관과 협상 과정에서 벽에 부딪쳤다. 기증을 결정하고 난 후 장이 고인이 되기 전에 몇 점의 작품 판매를 원할 경우 박물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결국 기증은 실행되지 못했다.

원시미술에 열정이 많은 장은 지금도 설치와 조각작품을 선호하며 개념미술 작품은 늘 뒷전이다. 거실문을 열면 관람자를 반기는 첫 번째 작품은 괴기한 매력을 풍기는 데이비드 알트메드의 조각이다 . 알트메드를 구입하는 데는 행운의 여신이 도와주었다. 2014년 파리의 현대미술관 전시를 보고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후에 뉴욕에서 경매가 있었다. 전시에서 같은 작품을 이미 보고 감동받았었기에 작품을 보러 굳이 뉴욕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전화 경매로 구입했다. 그 이후 런던에서 알트메드의 대형 설치 작품을 구입할 기회가 또 한 번 있었지만 장의 아파트에 들여올 방법을 찾지 못했고 분해한 이후에는 재 설치가 불가능한 작품이어서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또 한 점의 다른 작은 조각작품이 있다. 그는 이렇게 한 작가에게 빠지면 그 작가의 작품을 여러 점 구입했다.

컬렉션 경험이 점차 쌓이면서 갤러리와 박물관의 기획으로 준비된 개인전을 기다렸다가 구입했다. 비록 개인전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신진 작가들보다 가격이 높지만 그가 선택한 수집 방법이다. 예를 들어 그가 매일 수면을 취하는 침대는 ‘감시’라는 주제를 다루는 미국의 비디오 예술가 줄리아 셰어(Julia Scher)의 작품으로, 대형 전시 이후에 수집을 결정했다. 전시장에 있던 침대의 크기가 장의 집에 들어가지 않아서 특별히 작가에게 의뢰해 크기를 맞춘 작품이다. 침대의 사면 기둥에는 작은 TV 모니터가 달려 있어서 작가가 제작한 비디오 작품이 방영되는 이색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런 공간에서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그의 멘탈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독서광이던 소년은 이제 여든이 되었고 여전히 독신이다. 한때는 부모님이 남긴 유산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갤러리를 해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순수한 컬렉터로만 남기로 결정한 후 평생 동안 아트 컬렉션을 향한 열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는 매일 전시를 보러 다니고 카탈로그를 읽고 온라인으로 쏟아지는 정보를 탐독하고 있다.

그는 50년 동안 변치 않고 신체미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성과 죽음을 주제로 저속하고 종교적이며 키치적인 작품들을 고집하는 장의 집에 들어설 때마다 그의 작품들이 던지는 메시지들이 가슴에 꽂힌다. ‘가장 더럽고 추한 것이 가장 성스러운 것이다! ’

※ 박은주는… 박은주는 1997년부터 파리에서 거주, 활동하고 있다. 파리의 예술사 국립 에콜(GRETA)에서 예술사를, IESA(LA GRANDE ECOLE DES METIERS DE LA CULTURE ET DU MARCHE DE L’ART)에서 미술 시장과 컨템퍼러리 아트를 전공했다. 파리 드루오 경매장(Drouot)과 여러 갤러리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유럽의 저명한 컨설턴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2008년부터 서울과 파리에서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는 한편 유럽 예술가들의 에이전트도 겸하고 있다. 2010년부터 아트 프라이스 등 예술 잡지의 저널리스트로서 예술가와 전시 평론을 이어오고 있다. 박은주는 한국과 유럽 컬렉터들의 기호를 살펴 작품을 선별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201804호 (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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