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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시간’이 흐르는곳, 이스라엘 와이너리를 가다 

 

박지현 기자
성서에서 언급된 포도주의 생산지와 예수가 바다 위를 걸었다는 갈릴리 호수 근처를 지나다 보면, 종교를 떠나 동화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 든다. 고대의 결을 함께한 이스라엘 와인은 역사의 단절과 이음새를 반복하며 다시금 새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유서 깊은 시간을 머금고 천혜의 자연으로 빚어낸 이스라엘 와인은 젊고 경쾌하면서도 고결한 풍미가 돋보였다.

▎이스라엘은 좋은 와인을 만들기에 알맞은 기후와 기술을 갖고 있다. 골란하이츠 와이너리의 포도원 전경.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세기 9:20~21

기원전 2000년 성경 속 노아(Noah)는 포도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프랑스가 구세계 와인, 칠레가 신세계 와인이라면 성경 속 배경지인 이스라엘은 고대를 대표하는 지역이다. 고고학자나 역사 학자들은 이스라엘을 ‘포도와 와인의 요람’이라 부른다. 모슬렘이 지배하면서 1천년간 와인 생산은 중단됐지만, 실제 와인 생산지로서 이스라엘은 유서가 깊다. 와인(Wine)의 어원은 히브리어 야인(YAIN)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근원에 대한 자부심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기원전 1600년경 만들어진 와인 저장고가 갈릴리(Galilee)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황무지에 펼쳐진 기적의 이야기로 가득한 곳이다. 한편 세계에서 가장 아픈 역사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끝없는 종교 갈등으로 십자군 전쟁,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대인 학살, 아랍과의 전쟁, 여전히 접경지와 분쟁을 겪는 이곳은, 찬란한 햇살만큼이나 치열한 삶의 터전이다.

사실 칠레, 이탈리아, 프랑스 와인이 주를 이루는 한국에서 이스라엘 와인은 여전히 생소하다.


▎갈릴리 호수 전경이 보이는 오가닉 와이너리인 로템(Lotem).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여행할(성지순례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면 와인을 맛보며 중동, 정확히는 동지중해의 고대와 현대를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좋은 와인을 생성하기에 알맞은 테루아르(Terroir)와 재배 기술을 갖추고 있다. 지중해성 기후라 여름엔 덥고 건조하고, 겨울은 짧고 습하다. 고산 지대엔 간혹 눈도 내리고, 남쪽 네게브는 반건조 사막이다. 전체적으로 강수량이 적어 관개농업은 필수적이다. 이스라엘은 세계 최초로 생활하수를 재활용할 만큼 첨단 관개 시스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스라엘 면적은 남한의 5분의 1 정도로 매우 작은 나라다. 그중 포도 생산지의 규모는 총 5500헥타르이며, 북쪽부터 갈릴리(Galilee), 숌론(Shomron), 삼손(Samson), 유대 언덕(Judean Hills), 남쪽 네게브(Negev) 총 5개 산지로 나뉜다. 길게 뻗은 지형과 높이에 따라 기후 차이가 커서 포도 수확은 7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와인메이커 선택에 따라 다르다.

이스라엘에서 재배하는 포도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중심으로 보르도 블렌드, 그르나슈와 시라, 지중해성 블렌드 와인으로 생산된다. 이스라엘에는 현재 상업 와이너리 60개, 부티크 와이너리 300여 개가 있다. 대형 와이너리 4개 정도가 전체 와인 생산량의 70% 수준인 연간 500만 병을 생산한다.

유대인이 정착해 다시 심은 포도 씨앗


▎친환경 재배로 대형 와이너리의 혁신을 일군 갈릴마운틴 (Galilmountatin)의 포도밭.
유구한 역사에도 이스라엘 와인 생산은 네 차례 변혁을 맞았다. 이스라엘 와인의 근대화는 19세기 말엽으로 본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돌아오면서다. 유대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모세 몬테피오레(Moses Montefiore)는 척박한 땅에 포도를 재배하려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와인산업이 꽃핀 건 1882년 프랑스의 부유한 은행가였던 에드몬드 로스차일드(Baron Edmond de Rothschild)가 현대적인 포도주 공장을 건설해 이스라엘 정부에 기증하면서부터다. 카멜(Carmel) 와이너리는 이스라엘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큰 와이너리다. 카멜의 와인 셀러(celler)는 포도와 오크 향이 깊게 배어 있어 마치 역사의 숨결을 그대로 보존한 듯한 형태다. 더운 날씨에 보관하기 어려웠던 와인들을 동굴 안에 들여보내며 생산을 이어온 흔적이다.


▎요즘 와이너리들은 방문객들을 위해 내부 인테리어도 신경 쓴다.
이스라엘 와인은 전통적인 종교적 제조법을 간직하고 있다. 코셔(Kosher) 와인은 정통 유대교에서 명시한 방식에 따라 농사지은 포도로 만든 와인을 뜻한다. 사실 이스라엘 와인 전체 생산량에서 코셔는 40%이고, 일반 와이너리가 60%지만 주요 수출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스라엘 와인=코셔’라는 편견을 갖기 쉽다.

코셔로 인증받으려면 매우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파종 후 최소 4년이 지난 포도나무의 열매로 만들어야 하며, 포도원은 7년째 휴작해야 하며, 포도나무 사이에 다른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지 않아야 한다. 정통 유대교인이 아니면 오크 배럴을 만져서는 안 되고, 직접 생산에 관여할 수 없다. 코셔 방식을 지키는 와이너리에서는 하나같이 하얀 수염을 기른 유대교인들이 양조장 내부에서 졸졸 쫓아다니며 “절대 만지지 말라”며 잔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코셔 와인은 논란을 거듭하고 있지만, 뒤늦게 발을 디딘 와인 생산이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코셔 덕분이기도 하다. 코셔를 중심으로 전 세계 유대교인들에게 수출되는 물량이 꾸준히 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포도는 프랑스 수입품종이 많다.
‘현대’로 언급되는 이스라엘 와인은 30년 전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983년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운 골란 하이츠(Golan Heights) 와이너리가 품질혁명을 이끌면서부터다. 미국처럼 기술 혁신과 품질향상, 와인의 다변화 등이 급격히 이루어졌는데, 특히 캘리포니아 와인메이커 피터 스턴(Peter Stern)을 컨설턴트로 고용하면서 혁신을 이끌었다.

과학 기술로 무장한 이스라엘 와인 생산자들도 전통과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변화를 일궈내고 있다.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브라브도 앤 야인(Bravdo & Yayin) 와이너리는 아예 과학자를 와인메이커로 영입해 재배기술에 첨단 양조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 고급화를 겨냥한 소규모 ‘부티크(Boutique)’ 와이너리 붐이 일면서 이스라엘 와인산업은 또 한 번 변화를 맞았다. 길고 면적이 작은 지역인 만큼 포도의 다품종 소량화가 필연적인 이스라엘식 생존방식이다.


▎이스라엘의 전통 와인제조방식인 코셔(Kosher). 정통유대교인들만 직접 생산에 참여할 수 있다.
부티크 와이너리는 독특하고 와인메이커의 취향이 적극 반영돼 있다. 에란 피크(Eran Pick)는 2016년 이스라엘 최초이자 유일한 마스터 오브 와인(MW) 자격 보유자다. 티조라(Tzora) 와이너리 와인메이커인 그는 “타닌 함유량이 적고 깔끔하고 드라이하면서 풍미가 있는 맛을 추구한다”고 했다. “좋은 포도를 잘 골라내고 기후변화에도 예민하게 대응하는 기술력이 중요하다”는 그는 이스라엘 와인의 캐릭터를 “특정한 지역만 고집하지 않고 다양성과 역동성을 가진 젊은 와인”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에서 공식 친환경(Organic) 로템(Lotem) 와이너리는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경을 자랑한다. 갈릴리 지역은 성서에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돼 있다. ‘이스라엘의 토스카니’라고 불리는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가장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의 일부를 보여준다. 많은 유적지와 아름다운 자연 풍광 덕분에 갈릴리는 인기 있는 휴양지로 손꼽힌다. 와이너리 테이블에 앉아 뜨거운 햇살을 담아 올리고 있는 올리브나무들과 갈릴리 호수를 바라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다.

대령으로 전역한 전투병 출신 와인메이커 요나단 코렌(Yonatan Koren)은 늘 ‘실험적’ 와인을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양조장 내엔 24시간 음악이 흐르고, 와인 이름도 VIVACE, ALLEGRO, PIANO 등 음악 용어의 일부를 차용했다. 서로 다른 빈티지끼리 섞는 과감한 시도도 서슴지 않는 그는 “안 될 게 뭐 있나?”라고 반문하며 “와인의 퀄리티가 좋다면 어떤 시도도 괜찮다”고 자부한다. 요나단은 “와인은 토질과 환경이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철학과 아트와 사람과 음식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상당수 부티크 와이너리가 각자 경쟁하는 게 아니라 키부츠와 같은 지역농장을 활용해 협업하며 상생하는 것도 특징이다. 키부츠는 공동체 생활을 원하는 젊은 개척자들이 설립한 곳이다. 집단노동, 공동소유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이스라엘의 사회적 기업형태로 자리 잡았다. 때로는 지적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고용해 재배에 동참하도록 한다. 튤립&마이아(Tulip&Maia)와 키쇼어(Kishor) 와이너리는 이러한 마을 공동체로서의 목적을 강조하기도 한다.

수입품종만 있는 건 아니다. 다부키(Dabouki), 마라위(Marawi), 비투니(Bittuni) 같은 토착 품종을 블렌딩해 사용하기도 하는데, 세계 시장에서 인기를 얻는 중이다. 르카나티(Recanati) 와이너리는 그야말로 현재 이스라엘의 시대상을 잘 반영한다. 토착 품종인 마라위와 비투니 포도원은 과학자들과 함께 발견한 고대 와인생산지로, 고고학적인 의미가 깊은 곳이다. 베들레헴과 맞닿아 있어 팔레스타인 재배자가 관리한다. 와인 메이커인 길 샤츠버그(Gil Shatsberg)도 이스라엘인이라 포도원엔 들어갈 수 없다. 샤츠버그는 “군인들이 포도원 주변을 둘러싼 어두운 새벽에 포도를 따는 건 우리에겐 일상”이라며 “삶은 원래 치열한 것”이라며 웃는다. 맑은 물처럼 투명한 마라위 화이트와인은 시트러스 향을 띠고 청량감과 미네랄 풍미가 강하다.

지속가능성 기댄 현대 와이너리


▎포도 열매도 모두 손으로 고르는(Hand-picked) 부티크 와이너리 암포레(Amphorae).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대형 와이너리들이 변신을 시작했다. 규모의 성장뿐 아니라 부티크 와이너리가 갖춘 프리미엄 품질로 개선을 본격화한 것이다. 특히 친환경과 지속가능성에 기댄 시도가 멈추지 않았다.

골란 하이츠와 갈릴마운틴(Galil Mountain) 와이너리는 친환경 공법을 자랑한다. 약 1000m에 가까운 고도의 북갈릴리 지역에서 나는 고급 품종은 자연과 과학의 조화로 일군 결과다.

갈릴마운틴 와이너리를 방문한 3월 초엔 아직 포도잎이 나기 전이었다. 일렬로 늘어선 포도나무들 사이로 풀과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갈릴마운틴 포도원 재배를 돕는 매니저 유리(Yuri)는 “우린 관개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아 일부러 민들레가 피고 자라는 것을 내버려두고 있다”며 “나중에 포도가 자랄 때 포도 알맹이가 수분을 응집해 당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또 “포도나무 뿌리가 깊고 탄탄하게 내리려면 약간 부족한 듯한 환경이 중요하다”며 “자연발생적인 원리가 가장 좋은 품종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카멜(Carmel) 와이너리. 과거 양조방식에 쓰인 동굴이다.
와이너리들은 사업의 다각화도 꾀하고 있다. 프랑스식 이스라엘 와인을 만들어 프랑스로 역수출하는 도메인 세로(Domaine Seror)는 골란고원의 고품질 와인 생산과 더불어 갈릴리 마을 여행객들을 위해 정부의 지원을 받아 관광 호텔을 짓고 있다.

이스라엘 와인은 이제 세계 소믈리에들에게 주목받고 있다. 전반적으로 와인 품질이 놀랍게 달라진 데다, 개성 있는 와인들이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고 있어서다. 뜨거운 지중해의 열정과 유서 깊은 고대의 향기를 동시에 만나고 싶다면, 이스라엘이다.

- 텔아비브·지크론 야콥·로쉬피나·예루살렘·비냐미나(이스라엘)=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

201804호 (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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