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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과 신탁 

 

배정식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
이혼소송 시 재산분할로 인한 감정적·체력적 소모 때문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어른들도 이런 지경이니 남겨진 자녀가 겪을 고통은 더할 것이다. 여기에 자녀를 위해 남겨둔 재산은 이혼 재산분할의 새로운 불씨가 되고 있다. 이에 ‘신탁’이 해결사 노릇을 했던 사례를 모아봤다.

‘10만6000건’

통계청이 밝힌 지난해 한국 내 이혼 건수다. 이 중에서 20년 이상 된 부부는 3만3100만 건으로 31.2%, 30년 이상 부부의 이혼도 1만1600건으로 전체의 10.9%를 차지했다. 특히 결혼한 지 4년 이하의 신혼이거나 미성년 자녀를 둔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는 47.2%에 달한다. 이들 모두 이혼하면서 ‘재산분할’이란 큰 산을 넘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어린 자녀, 독립하지 않은 성인 자녀, 상속권을 가진 자녀에게 갈 재산을 어떻게 정할지 또 한 번 고민에 빠진다.

숙제는 계속 이어진다. 친권과 양육권이 누구한테 갈지 정해야 하고, 미성년 자녀가 보유한 재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도 첨예한 이슈다. 이혼 후 친권자 및 양육권자가 사망하면 어떻게 될까. 이후 상속재산을 관리하는 문제 등 후속관리는 여전히 미흡한 상황이다. 그래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해결방안과 개선점을 짚어봤다.

이혼 후 자녀 명의 예금은 신탁에 맡겨야

첫 번째 사례는 자녀의 예금통장 문제다. 부부는 이혼했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자녀 명의로 예금계좌를 개설했다. 미리 학자금이나 기타 비용을 적립하겠다는 뜻이었다. 40대 초반의 이 부부가 중학생 자녀 명의로 개설한 통장에는 상당한 금액이 쌓여 있었다. 이혼 절차가 끝났지만, 막상 자녀 명의 통장을 열어보니 걱정이 생겼다. 일단 친권과 양육권은 엄마 쪽에 돌아갔다. 자녀 양육을 위해서 전 재산의 60%를 엄마 쪽에 분할했다. 하지만 매듭이 깔끔하지 않았다. 자녀 학자금으로 쓰려던 자녀 명의의 통장 때문이다. 남편과 아내 모두 이 통장을 두고 근심이 생겼다. 혹시나 그 예금을 한 쪽이 임의대로 처분하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부모 모두 자신들은 갈라섰지만, 이 예금이 아이가 대학에 입학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은 같았다.

보통 친권자는 자녀와 자녀가 가진 재산에 대해 법률 대리인 역할을 하므로 자녀 명의의 예금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다. 결국 부부는 자녀 명의의 통장을 신탁에 맡기기로 했다. 엄마가 친권자지만 자녀 명의 예금은 자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부 중 누구도 임의로 처분하지 않겠다는 묵시적 동의로 ‘신탁’을 선택한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부부가 이혼 후 일방이 사망한 경우다. 이혼 후 아들, 딸 두 자녀는 각각 부부에게 따로 맡겨졌다. 하지만 딸의 친권자였던 엄마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사망보험금을 받게 됐다. 우선 이 보험금은 아들과 딸 두 자녀에게 절반씩 돌아가게 계약돼 있다. 부부가 정상적으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법정대리인인 아빠가 보험금을 받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외손녀를 사실상 양육하던 외할아버지 입장에선 보험금 관리와 양육권 문제가 골치 아픈 일이었다. 특히 딸의 사망보험금을 이제 남이 된 사위가 임의로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생겼다. 그래도 자녀의 친권자인 사위가 보험금은 수령하되 그중 반은 미성년인 손녀를 위해 신탁 관리하기로 합의했다.

세 번째 사례는 부부가 이혼 후 외아들의 친권자인 엄마의 건강이 악화된 경우다. 직장인인 엄마는 곧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이혼 후 외아들의 친권자였던 그는 자신이 사망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혼한 남편은 재혼한 상태였다. 그래서 아들에게 남길 재산은 신탁에 맡기기로 했다. 또 이모를 후견인으로 지정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유언장을 작성하는 등 각종 보호장치를 마련했다.

마지막 사례는 부부가 이혼한 상태에서 외동딸의 친권자인 엄마가 사망한 경우다. 아빠는 이미 재혼한 상황이었고, 갑작스러운 사고 탓에 엄마는 생전에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외조부가 실질적인 양육을 맡았고, 아이를 위한 상속재산관리도 병행해왔다. 하지만 이혼한 사위가 친권이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외조부는 즉각 손녀에게 돌아갈 보험금과 각종 재산을 신탁 계약에 맡겼고, 재산관리와 분쟁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결국 법원까지 갔지만, 재판부도 재혼한 아빠보다 외조부를 후견인으로 선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위 사례에서 보듯이 ‘신탁’은 이혼 후 남겨진 자녀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막이 되고 있었다. 친권자 입장에서 생전에 유언을 남기거나 후견인을 염두에 둔다면 좋지만, 어디 삶을 예측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불의의 사고는 피할 수 없고, 남겨진 재산조차 분쟁의 대상이 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게다가 법적 이혼이 흔해진 시대, 신탁은 분쟁 해결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 배정식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

201805호 (201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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