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체코-프라하(Praha) 

환희를 노래하는 블타바강 변 프라하의 봄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체코항공 편으로 프라하의 바츨라프 하벨 공항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스메타나의 [블타바강]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이 선율만큼 프라하의 봄을 가슴 깊이 느끼게 해주는 음악이 또 있을까? 이곳에서 ‘프라하의 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68년 공산치하에서 민주화가 싹트던 역사적 사건을 지칭하기도 하고 매년 5월 대대적으로 열리는 프라하 국제음악제의 명칭이기도 하다.

▎블타바강이 흐르는 프라하 시가지. / 사진:정태남
“체코는 동유럽 국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체코에서 독일어나 러시아어가 널리 쓰인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비셰흐라드 언덕에서 만난 한 체코 대학생의 말이다. 체코는 동서냉전 시대에는 동유럽 국가였다. 또 언어적으로는 러시아어, 폴란드어, 슬로바키아어 등과 함께 슬라브어권에 속한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보면 슬라브 민족 국가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독일,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따라서 독일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동유럽과 서유럽을 연결하는 요충지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은 독일어권 사람들과 다른, 체코 사람이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한다. 이토록 민족의식이 강한 것은 이들이 겪어온 역사가 고난과 격동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2018년은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100주년과 1968년 공산치하에서 민주화 바람이 불던 ‘ 프라하의 봄’ 5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해다.

신성한 비셰흐라드 언덕과 블타바강


▎비셰흐라드 언덕에서 본 블타바강. 멀리 성 비투스 성당과 프라하 성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체코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왕은 카를 4세(체코식은 카렐 4세: 1316~1378)다. 프라하는 그가 통치할 때 발전하기 시작하여 유럽에서 파리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로 손꼽히게 되었다. 사실 카렐 다리, 성 비투스 성당을 비롯한 주요 랜드마크 건축물들은 그가 통치하던 시대에 완공되거나 착공되었다. 체코 역사의 시작은 카를 4세 시대 이전으로 몇백 년 더 거슬러 올라간다. 10세기 후반 이곳을 통치하던 프르제미슬 왕조는 보헤미아에서 체코 역사의 문을 연, 순수 체코 민족의 왕조였다. 비셰흐라드는 바로 이 왕조의 탄생 전설이 배어 있는 신성한 언덕이다. 신비에 휩싸인 듯한 비셰흐라드 언덕 아래로는 블타바(Vltava)강이 흐른다. 체코는 크게 서쪽의 보헤미아 지방과 동쪽의 모라비아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블타바강은 남부 보헤미아 숲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줄기에 서부 보헤미아 숲에서 흘러나오는 또 하나의 지류가 합류하여 프라하 시가지를 관통하면서 독일의 엘베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 강은 독일식 이름 몰다우(Moldau)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카렐 다리와 블타바강. 유람선 ‘비셰흐라드’호 뒤에 보이는 건물이 스메타나 박물관이다. / 사진:정태남
블타바강 건너편 언덕 위에는 마법의 성처럼 솟은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성당이 마치 수호신처럼 프라하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프라하는 마치 ‘인간이 사는 도시의 아름다움은 이러한 것이다’라고 만방에 천명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토록 아름다운 도시 이면에는 수난과 시련의 역사가 스쳐간 흔적이 보인다.


▎시민회관의 주옥같은 스메타나 홀. ‘프라하의 봄’ 음악제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 사진:정태남
체코는 17세기에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약 300년이 지난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야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으로 비로소 독립국이 되었다. 하지만 격동기는 계속되었다. 나치독일의 점령, 공산주의 통치,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짓밟은 소련의 침공과 이에 맞선 시민들의 대대적인 항거, 반체제 작가 바츨라프 하벨이 중심이 된 1989년 벨벳혁명 등을 거친 다음에는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조용히 갈라졌던 것이다. 이러한 격동기 속에서도 프라하는 다행히 파괴되지 않고 아름다운 옛 시가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체코 근대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


▎체코 아르누보 건축과 예술의 결정체인 시민회관. / 사진:정태남
프라하의 유서 깊은 명소 카렐 다리는 블타바강 풍경의 초점을 이룬다. 이 다리 남쪽 탑 가까이 강변에는 스메타나 박물관이 있고 바로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 ich Smetana 1824~1884)는 체코 국민음악의 선구자다. 그의 17년 후배인 드보르작은 그가 다져놓은 토양 위에 체코 음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승화시켰고 스메타나보다 훨씬 높은 명성을 누렸다. 하지만 스메타나만큼 체코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음악가는 없다. 그런데 스메타나의 동상을 보니 얼굴에 애수가 흐르는 듯하다.

그가 24세였을 때인 1848년의 일이다. 그해 일어난 프랑스 2월 혁명은 유럽에서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민족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눈뜨게 했다. 프라하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항거하여 시민들이 일어섰는데 이 투쟁에 스메타나도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 후 그는 민족의식에 더욱 불타올라 음악가로서 체코 음악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더 근대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지배하에서는 독일어가 공용어였기 때문에 독일어는 그의 모국어나 다름없었다. 그가 체코어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이미 30세가 넘었을 때였으니 그의 체코어 이해력이나 구사력은 한계가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독일문화권 음악의 주류에 뿌리를 두고 체코의 역사, 영웅담, 전설, 민속 등과 같은 요소를 첨가하거나 체코의 풍경을 표제로 하는 등 음악에 체코 민족의 혼을 불어넣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운명의 신과의 싸움 그 자체였다. 젊었을 때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처절하게 겪었고, 어느 정도 사회적 기반을 갖춘 다음에는 딸 넷 중에서 셋이 죽는가 하면, 첫 번째 아내도 병으로 잃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간적인 슬픔도 겪었다.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큰 시련이 또 엄습해왔다.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인 재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청력상실이었다. 운명의 신은 베토벤에게 주었던 시련을 스메타나에게도 주었던 것일까. 베토벤은 그래도 왼쪽 귀로 아주 조금은 들을 수 있었지만 스메타나는 그런 미약한 청력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가혹한 운명의 신과 맞섰다.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작곡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연작교향시 [나의 조국](Ma Vlast)이다. 6곡으로 이루어진 이 교향시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곡 [비셰흐라드]와 [블타바강]은 1874년에 작곡되었고 나머지 4곡은 그가 완전히 귀머거리가 된 다음인 1879년에 완성되었다.


▎스메타나의 동상. 그 뒤로 카를 다리와 프라하 성 및 성 비투스 성당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그런데 운명의 신은 계속 가혹했다. 청력장애에다가 정신착란증까지 겹치게 되었다. 1884년 5월 12일 프라하의 정신병동에서 스메타나는 60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는데 눈을 감은 그의 모습은 매우 평온했다고 한다. 마치 운명의 신과 겨룬 싸움에서 이긴 듯. 그는 모든 체코 국민의 애도 속에 블타바강 변 비셰흐라드 묘지에 안장되었다.

[나의 조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은 단연 두 번째 곡 [블타바강]이다. 두 곳의 다른 원천에서 흘러나와 합류하여 프라하를 지나는 블타바강처럼, 이 곡에서도 그의 마음에 드리워진 슬픔과, 이를 극복하고 승화된 우아함이 어우러져 흘러가고 있다. 애수 어린 환희를 담고….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제


▎블타바강의 명소 카렐 다리. 강 건너 언덕 위에 성 비투스 성당과 프라하 성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매년 5월 스메타나 기일 전야에는 체코 대통령을 비롯한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제 막이 오른다. 공연장은 체코 아르누보 예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시민회관이다. 이를 설계한 건축가는 체코인이고 외부와 내부를 장식한 예술가들도 유명한 알폰스 무하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체코 예술가들이다. 그러니까 시민회관은 오스트리아 지배하에서 ‘보란 듯이’ 세운 ‘ 체코인의, 체코인에 의한, 체코인을 위한’ 문화의 전당이다. 이곳에서 핵심이 되는 공간은 보석처럼 화려한 스메타나 홀이다.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6년에 지휘자 쿠벨릭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고 1952년부터는 매년 스메타나 기일에 맞추어 [나의 조국]연주로 개막한다.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체코슬로바키아가 자유화된 다음 개최된 1990년의 프라하의 봄 음악제에는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백발의 쿠벨릭의 지휘로 서막이 올랐는데 이때 청중들은 벅찬 감격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음악제는 약 3주간 프라하 여러 곳에서 개최된다. 마지막 날은 다시 스메타나 홀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에 부쳐’]로 막을 내린다. 이때는 혹독한 겨울이 완전히 지나가고 마치 하늘의 은총이 내린 듯 봄 향기가 블타바강 변에 퍼지는 계절이다. 그야말로 프라하의 봄이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1805호 (201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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